내가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라

  • 입력 2021.09.28 11:05
글자 크기
프린트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승희 목사의 CDN 성경연구】 (130) 보호(Protection)

 

NC. Cumberland University(Ph.D.), LA. Fuller Theological Seminary(D.Min.Cand.) , 총신대학교 일반대학원(Th.M.), 고려신학대학원(M.Div.), 고신대학교 신학과(B.A.), 고신대학교 외래교수(2004-2011년), 현)한국실천신학원 교수(4년제 대학기관), 현)총회신학교 서울캠퍼스 교수, 현)서울성서대학 교수 현)대광교회 담임목사(서울서부노회, 금천구)
NC. Cumberland University(Ph.D.), LA. Fuller Theological Seminary(D.Min.Cand.) , 총신대학교 일반대학원(Th.M.), 고려신학대학원(M.Div.), 고신대학교 신학과(B.A.), 고신대학교 외래교수(2004-2011년), 현)한국실천신학원 교수(4년제 대학기관), 현)총회신학교 서울캠퍼스 교수, 현)서울성서대학 교수 현)대광교회 담임목사(서울서부노회, 금천구)

일곱 편지와 그 후에 이어지는 환상 내용을 담고 있는 여러 장들에 시험이 나타난다. 성도들과 불신자들을 동일하게 경험하는 시험이다. 성도들에게 시험은 다르다. 믿음을 단련하는 시험이다. 불신자들에게 시험은 그들을 강퍅하게 하는 시험일뿐이다. 하나님의 보호는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서 오레스테스에게 한 아폴로의 보호와 다르다. 오레스테스는 아버지 아가멤논을 죽인 어머니 클리템네스트라를 죽인다. 피로 물든 칼을 들고 델피 신전으로 들어갔다. 아폴로는 끝까지보호하겠다고 말한다.

그리스도는 환난을 당할 때에, 특히 그리스도를 증언하면서 보여준 신실함으로 말미암아 빌라델비아 교회가 영적으로 보호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신다. 환난 중에서 이러한 보호가 다른 곳에서 달리 묘사된다. ‘인을 치다’, ‘측정하다’, ‘광야에서 양육하고 보호하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인내하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충실하게 지키고 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시험의 때에 지켜 주실 것을 약속한다. 곧 보호해 주실 것이다. 교회의 행동과 그리스도의 행동 간의 연계성에 주의를 집중시킨다. 요한은 환난을 통하여 신앙을 지켜가는 빌라델비아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영적인 보호를 설명한다.

 

1. 그리스도인들에게 환난의 때가 있다

시험에 해당하는 페이라스모스는 실명사로 요한계시록 3:10에만 나온다. 동사는 세 번 나온다. 페이라스모스는 어떤 사람 또는 사물의 본질 또는 성격을 알리려고 한다는 의미에서 시험이다. 또한 어떤 사람에게 죄를 짓게 하려고 꾀한다는 의미에서 유혹이다. 이곳에서 페이라스모스는 악한 자들에게 대해 사용되는 유일한 예일 것이다. 전쟁, 폭력, 그리고 경제적인 궁핍뿐만 아니라 거짓 예배의 유혹과 박해의 위협을 포함한 어려움의 전조가 된다. 여기에서는 고난또는 재앙을 의미하는 데 사용되고 있다. 시험은 소아시아 지역에 임한 환난이나 또는 더 일반적으로 로마 제국에 임한 환난을 가리킬 수 있다. 시험의 때의 환난은 하나님이 믿지 않는 자들에게 내리시는 징계의 심판으로 의도된다. 땅에 거하는 자들이 받을 환난이다. 우상숭배자들을 가리키는 전문용어다. 이 환난은 이미 시작되었다. 일곱 편지 여러 곳에서 임박한 환난과 동일시될 수 있다.

시험의 때는 초기 유대교와 초기 그리스도교가 하나님의 종말론적 승리 직전에 일어날 것으로 예상했던 큰 고통과 고난의 시기를 언급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시험의 그 때는 주님의 재림을 향해 나아간다. 주의 재림을 포함하는 마지막 시험이나 환난의 시기를 가리킨다. 저자는 요한계시록 나머지 부분에서 묘사되는 환난의 때를 언급하고 있을 것이다.

요한의 두 본문은 믿음에서 떨어지게 하는 시험, 즉 불신앙을 초래하는 시험으로부터 보호를 언급한다. 이런 의미에서 시험의 때를 세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소유격으로 보면 시험하는 때. 내용의 소유격으로 보면 시험으로 가득 찬 때. 목적어 소유격으로 보면 시험을 위한 때. 마지막을 가리킬 가능성이 크다. 두 본문의 차이점이 있다. 종말에 앞서 임하는 마지막 시험을 가리킨다. 시험의 면제로 보기보다는 오히려 시험 속에서 보호가 더 적합하다. 모든 종류의 환난이나 박해에서 면제가 아니다. 시험을 당한다. 그 가운데서도 믿음을 지키게 해 주실 것이라는 의미다.

묵시서들은 하나님의 미래의 승리 이전에 환난이 있을 것을 예견한다(12:1, 10). 시험의 때는 환난의 날로 묘사되어진 다니엘 12:1, 10이 잘 암시되어 있다. 그것을 알림으로 증거하고 있다. 다니엘서 본문의 그 때는 많은 사람이 연단을 받는다. 정결케 된다. 죄인들은 죄를 범하는 환난의 그 날로 직접 묘사된다. 요한계시록은 시험의 때에 믿는 자들은 환난으로 인내하고 순결하게 되지만 동시에 비신자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받는 이중의 효력이 있음을 암시한다.

복음서에서도 전쟁, 자연 재해, 거짓 교훈의 확산, 충성된 신자들을 향한 위협을 포함한 다가올 환난에 대해 이야기한다.

세대주의 입장에서 볼 때 요한계시록에서 가장 중요한 구절이다(3:10). 세대주의 해석의 대표적 사례는 세 가지다. 성경의 문자적 해석, 이중재림설, 이스라엘과 교회의 분리다. 세대주의적 해석자들은 그리스도의 재림 이전에 일어날 것으로 기대되는 7년 대환난이 시작하기 전에 땅으로부터 하늘로 휴거’(raptured), 혹은 들리어 올라감으로 이 환난을 피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환난의 때에 하나님의 진노가 교회에 쏟아질 때다. 교회가 지상에 존재하지 않고 들림을 받는가. 하나님이 이집트에 내린 열 가지 재앙은 하나님의 백성이 비록 그 땅에 살고 있었지만 이집트인들에게 닥친 불행을 맛보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시험의 때를 면하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임하지 않도록 천사가 이마 위에 인을 치는, 즉 보호하는 것과 같다.

미국의 설문조사 기관인 라이프웨이리서치는 1000명의 미국교회 담임목사를 대상으로 언제 휴거가 일어난 것인가를 물었다. 응답자의 36%대환난 이전이라고 말해 환난 전 휴거를 인정했다. 요한계시록에 언급된 대환난, 즉 최후의 환난은 반드시 물리적 시험의 특성과 관련하여 강조되는 것이 아니다. 물리적으로 이해하면 감당할 수 없으니 피하는 게 상책일 것이다. 그래서 휴거가 필요할지 모른다. 요한계시록에서 종말의 환난, 즉 대환난은 환난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강조한다. 대환난은 어린 양이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시작되었다. 어떤 물리적 시험도 죽임 당한 어린 양의 시험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2. 그리스도는 환난의 그 때에 교회를 끝까지 보호하신다

하나님의 진노에서 보호받는다는 것은 인간의 분노 또는 박해에서 벗어난다는 뜻이 아니다. 교회는 계속해서 환난을 겪어야 한다(24:9). 환난 전 휴거주의자들이 가르치는 두 단계 재림은 아무런 성경적 근거가 없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큰 환난 이후에 발생하는 하나의 단일한 사건으로 여겨야 한다. 환난은 이미 첫 세기에 시작되었다. 최후의 종말이 다가올수록 더욱 격화될 것이다. 마지막 때의 환난을 거치는 동안 주어질 그리스도의 보호가 있을 것이다. 서머나 교회 교인들은 투옥과 사형과 같은 시험을 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 그리고 이후의 환상들은 그중에 폴리캅 같은 사람들은 순교하게 될 것을 추론한다.

Antoninus Pius 황제 시대 서머나에서는 10여 일간 기독교인들에 대한 참혹한 박해가 있었다. 굶주린 사자들이 먹잇감을 기다리고 있던 원형 경기장에는 게르마니쿠스를 비롯한 수많은 신자들의 팔다리, 창자와 오장육부가 여기저기 쓰레기처럼 아무렇게나 널려 있었다. 대지는 축축하게 피에 젖은 채 피비린내를 풍기고 있었다. 2세기 중엽에 서머나의 감독 Polycarp86세에, 박해를 피해 도망치지 않았다. 그리스도를 부인함으로 죽음을 피할 것을 거부하였다. 불이 붙기 전에 이런 기도를 하였다. “, 아버지여, 나를 순교자의 한 부분을 담당할 자로 여기시니 주를 찬송합니다.” 화형을 당하기 전에 총독은 폴리캅에게 이제 고령이지 않느냐,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로마 황제를 경배하라고 설득했다. 폴리캅은 “86년간 그분을 섬겼으나 나에게 한 번도 고통을 준 적이 없는 나의 왕을 어찌 모독할 수 있단 말이냐고 대답하고 열린 문을 향하여 걸어갔다. 구원받는 자는 환난으로부터 면제되는 것이 아니다. 환난을 통과한다. 환난을 이긴다. 열린 문으로 들어간다. 새 예루살렘에서 생명을 얻는다.

고통스러운 행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확인하는 제도인 신명재판과 다르다. 신명재판에는 여러 방식이 있 나름대로 정해진 절차가 있다. 원래는 달군 쇠를 잡는 방식이었다. 벌건 쇳덩이를 잡고 몇 걸음을 걷게 한다. 찬송가를 한 곡 부르게 한다. 붕대로 손을 싸맨다. 사흘 후 풀어서 상처 정도를 살핀다. 상처가 심하면 유죄다. 그렇지 않으면 무죄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증명하고 무죄를 뒷받침하기 위해 상처를 입지 않게 하지 않으신다. 시험의 때에 면하게 하는 것은, 이런 시험이 있을지라도 손에 상처를 입고, 사람들로부터 유죄라고 정죄당하고, 순교할지라도 우리의 영혼을 보호하신다는 것이다.

상호 관계(reciprocity)가 있다.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지켰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그들을 시험의 때에 지키실 것이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인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자신의 이름, 하나님의 이름, 새 예루살렘의 이름을 그들 위에 기록할 것이다. 빌라델비아는 소아시아의 다른 도시들보다 지진으로 인해 피해를 많이 입었다. 참된 교회는 영적으로 파괴되지 않고 보호받는다. 하지만 교회가 물리적인 형태로 있는 동안은 환난을 당한다. 이것이 아마도 성전 바깥뜰은 그냥 두라는 의미일 것이다. 하지만 최후의 절정 상황에서는 어떠한 물리적·영적 형태의 환난이 교회를 해하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의 충만한 임재가 그들 중에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고통이 모두에게 다 친구 같고 메시지 같은 것은 아니다. 어떤 이들은 길고 처참한 병고로 인해 가족들마저 피폐해지는 것을 보고 더 고통스러워한다. 치료가 되었어도 병과의 전쟁 같았던 투쟁은 여전히 심리적 정신적 고통으로 이어질 수 있다. 십자가 처형은 인건비가 많이 들어가는 형벌이다. 그래서 기독교 박해 말기에는 십자가 대신 경기장에 몰아넣고 맹수 등을 이용해 죽였다. 사나운 이빨에 물려 죽은 억울한 목숨이 대략 50만 명 정도라고 한다. 성도들은 세상에서 고통을 경험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평강을 얻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가 세상을 이기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영적으로 보호하시거나 지키실 것을 간구하였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었기 때문이다.

저작권자 © 본헤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