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역사의 시초인 창세기에 가인과 아벨이 제물을 드린 제사가 처음으로 등장한다. 그 실행 방식에 대해서는 직접적으로 기록되어 있지 않다. 겉보기에는 둘 다 제사를 드렸다. 옳은 일을 했다. 제 때에 드렸다. 자신의 직업에 알맞은 것을 드렸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만 받으셨다. 창세기에는 아벨의 믿음을 언급하지 않는다. 왜 그의 제사가 더 나은 제사인지에 대한 암시는 제공되지 않는다. 힌트가 있다면 가인도 잘했다면 그가 인정받았을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는 것이다(창 4:7). 여기에 하나님은 예물을 드리는 자들과 ‘그 제사에 대하여 증언하는’ 자리에 있다. 예물을 드리는 자가 결정권자가 아니다. 정성이나 제물의 종류나 분량이나 가격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지 않는다. 제사를 열납 하시고 또는 거부하시는 결정권은 하나님께 있다.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을 하나님께 드렸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믿음으로 드렸다. 아벨의 제사는 믿음의 제사다. 아벨의 제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실체이신 하나님과 그의 신실하심에 맞춰진 아벨의 삶의 방향을 반영하고 있었다.
1. 더 나은 제물을 하나님께 드리다
하나님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을 받으셨다. 하나님께서 왜 그의 제사만 받으셨는지 설명이 없다. 창세기의 첫 번째 제사인 가인과 아벨의 제사는 ‘민하’(מִנְחָה)다. 희생제사(제바흐)가 아니다. 노아의 제사는 번제를 뜻하는 ‘올라’이다(창 8:20). 민하는 ‘소제, 제물, 선물, 공물, 희생제물’를 뜻한다. 모세의 율법에 규정되어 있는 제사법에 소제는 민하다.
두 형제의 제사에서 두 종류의 제사를 구별할 수 없다. 히브리서 저자는 아벨의 예물을 ‘도론’이라 번역한다. 도론이 인간의 선물(마 2:11), 헌금(눅 21:1), 하나님의 선물(엡 2:8)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제물’로 사용된다(마 5:33). 가인과 아벨의 제사가 하나님이 계시하신 제도를 따른 것이 아니었다면, 아마도 인간들 사이에 선물을 주고받는 것을 본뜬 행위였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민하, 즉 선물을 받으신 것은 물질적 내용 때문에 열납 하신 것이 아니다. 민하를 소제로 이해하면 가인의 민하를 받으셔야 한다. 민하가 선물이라면 선물을 주는 자와 그 선물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하다는 것이다. 아벨은 하나님이 복을 주셔서 목축을 할 수 있었기에 감사하는 마음을 담았을 것이다. 아벨의 제사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의 외적 표현이었기에 열납 된 것이다. 제사의 본질에서보다는 선물을 주는 그의 마음과 감사와 헌신의 외적 표현을 하나님이 열납 하신 것이다. 아벨이 드린 제물은 그가 가진 믿음의 진정성을 증명하고, 하나님께서 열납 하신 것은 그의 믿음을 인정하는 가시적인 표현이다.
아벨의 직업은 목자다. 양을 치는 목자다.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이다. 아담에게 주신 창조 계획을 이루어가는 아들이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에덴동산에 두신 까닭이 무엇인가. ‘경작하고 지키게’ 하기 위함이다(창 2:15). 두 단어는 짝을 이루어 구약성경의 다른 곳에서도 병렬되어 나타난다. ‘경작하다’에 해당하는 ‘아바드’는 ‘섬기다’는 뜻이다. ‘지키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이스라엘의 백성의 행동을 가리킨다(대략 10회). 특히 성막에서 직무를 지키는 제사장들을 가리킨다(5회). 창세기 1-2장은 아담을 왕적인 정원사와 제사장으로 묘사된다. 아담이 이런 직무와 관련해서 에덴은 성소다. 그는 하나님의 부섭정(vice-regents) 역할을 함으로써 그분의 왕권을 반영해야 했다. 그리고 제사장이다.
아벨은 양을 지키는 목자이면서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이다. 하나님이 아담을 에덴에 두신 목적을 아벨은 들판에서 그 뜻을 이어가고 있다. 비록 부모처럼 쾌적한 에덴의 태곳적 언덕 위는 아니지만 에덴 바깥에는 황량한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고 있다. 아벨은 하나님의 복을 받아 양의 개체수가 많아질수록 알맞은 목축지를 넓혀야 했을 것이다. 가시와 엉겅퀴로 뒤덮인 무질서한 지역을 쾌적한 공간으로 바꿈으로써 말이다. 아벨이 드린 예물은 희생 제물과 다른 하나님께 드리는 선물이었다(출 28:38; 민 18:11).
제사의 형태에 대한 상세한 내용들은 결여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를 왜 받으셨는지 설명이 없다. 성경은 아벨의 제사에서 특별히 더 나은 점이 무엇이었는지 말하지 않는다. 예수님께서는 아벨을 의인으로 언급한다(마 23:35). 요한은 아벨을 의로운 행위자로 말한다(요일 3:12). 히브리서 저자는 믿음의 사람으로 소개한다. 종합적으로 볼 때, 아벨은 의로운 자요, 믿음의 사람이다. 히브리서 12장에서 저자는 아벨을 또 다른 시각에서 언급하고 있다. 이곳에서 아벨을 그의 형제 가인과 비교하지 않고 예수님과 비교하고 있다.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뿌린 피니라.”(히 12:24).
신약성경에서 아벨은 믿음의 사람으로 묘사된다(히 11:4). 목자와 제사장으로 하나님을 섬긴 자다. 왕적 제사장으로 하나님께 자신을 드린 예수님을 예표한다. 이런 제사를 주재하는 제사장은 바로 그 예물을 드리는 자, 즉 그리스도인들이다. 왕 같은 제사장인 그리스도인들이 예물을 바치는 성소는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다. 지성소 휘장이 찢어진 이후에 성령 안에 있는 자들이 이미 들어간 하나님의 나라다.
확실한 것은 아벨의 제사는 자신과 준비한 제물을 하나님께서 열납 하셨다는 것이다. 레위인들도 어떻게 보면 하나님께 바쳐진 사람들이었다(민 18:6). 아벨의 제사는 자신을 드린 제사다. 하나님께서 제사하는 아벨을 받으신다. 이것은 그 사람의 아들로서 많은 사람을 위하여 자신을 화목제물로 드리신 예수님을 상기시킨다. 아벨은 목동이면서 하나님께 제사하는 제사장이다. 고대 근동에 목자는 왕을 가리킨다. 왕적 제사장의 모습을 아벨을 통해 보게 한다.
2. 아벨의 피는 예수님의 피에 대해 말하고 있다
‘믿음의 명예 전당’에 등록된 최초의 인물이 아벨이다. 그의 모습은 유사한 희생자들에게 격려가 된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신다. 하지만 섭리를 통해 ‘의인’에게조차 악한 일이 일어나도록 허용하신다. 그 모든 일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신비한 방법으로, 때로는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성취된다.
성경에 하나님이 인간에게 하신 최초의 질문은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이다(창 3:9). 두 번째 질문은 “네 아우 아벨은 어디에 있느냐”이다. 고정희 시인은 ‘이 시대의 아벨’ 시에서 아벨을 찾는 하나님의 마음을 시를 통해 쏟아낸다. “너의 안락한 처마 밑에서/ 함께 살기 원하던 우리들의 아벨/ 너의 따뜻한 난롯가에서/ 함께 몸을 비비던 아벨은 어디로 갔는가/... 어둠의 골짜기로 거슬러 오르던/ 너희 아벨은 어디로 갔는가?” 가인이 범한 보다 원천적인 죄는 불신앙이었다. 그와 그의 제물이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그가 하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경은 가인이 왜 아벨을 죽였는지, 어떻게 살해했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살인 동기와 살해 방법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 하나님이 이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시지만 ‘네 동생 아벨이 어디 있느냐’고 질문을 하신다. 하나님이 가인을 찾아온 목적은 형제를 살해한 가인보다 사라진 아벨에게 있다. 하나님의 관심은 가인의 범행 진술보다 땅에서 부르짖는 아벨의 핏 소리다. 아벨의 피는 아직도 땅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는 자들에 대한 경고의 소리를 외친다. 순교당한 의인들의 원한을 풀어 설욕하여 줄 것을 부르짖고 있다.
하나님이 가인을 찾아온 목적이 어디 있는가. 인류 최초의 살인자를 심판하기 위함이 아니다. 땅에서 부르짖는 아벨의 핏 소리에 응답하신 것이다. 창세기 기사에서는 핏 소리가 부르짖는 내용에 대해서 언급이 없다. 고발 내용이 없다. 죽었지만 땅에서부터 핏 소리는 지속적으로 하나님께 호소하는 점을 부각한다. ‘호소하다’에 해당하는 고발이나 복수의 뜻이 내포된 ‘부르짖다’이다. 히브리서에는 달리 보다 중립적인 용어인 ‘말하다’를 사용하고 있다. 히브리서에도 호소의 내용은 언급되지 않는다. 히브리서는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히 11:4b)고 인용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핵심은 아벨이 오래전에 죽었다. 그러나 현재는 없다는 것이 아니다. 지금도 살아 있다. 그리고 그는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많은 학자들이 의인 아벨의 죽음을 순교로 이해한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유일하게 나오는 탄원 기도가 있는 하늘 제단 아래에서 죽임을 당한 영혼들의 탄원과 연결시키고자 한다(계 6:9).
아벨의 핏 소리가 호소한다는 강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지만 실제적으로 가해자에 대한 복수를 외치고 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 어떤 내용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의로운 죽음 또는 순교한 영혼이 계속해서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육신은 땅 속에 묻혔지만 영혼은 죽지 않고 지속적으로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다. 히브리서 저자는 아벨의 피를 순교자의 피로 끌고 가기보다 예수님의 피와 연관시킨다.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님이 흘린 피가 아벨의 피보다 더 낫다고 기술한다(히 12:24).
예수님의 피와 아벨의 피는 큰 차이가 있다. 전자는 후자와 다르다. 전자는 새 언약의 피다. 많은 사람을 위해 흘리는 보혈이다(막 10:45). 그래서 전자는 후자보다 더 나은 피다. 전자는 실체다. 후자는 전자의 원형(prototype)이다. 후자는 땅 속에서 하나님께 불의한 자를 보수(vengeance)해 달라는 탄원이다. 전자는 불의에 대한 하나님의 복수를 부르짖어 죄 사함을 말하는 것이다. 죄인들을 하나님과 화해를 가능하게 한 전자는 만족스러웠다. 구원을 말한다. 여기서 비교되는 것은 그리스도가 바친 제물과 아벨이 바친 제물 사이에 있는 것이다. 자비를 요구하는 전자와 복수를 요구하는 후자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