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으로 이뤄진 지역에서는 주로 천막을 치고 유목생활을 한다. 천막은 모래 위에 튼튼한 나무 기둥을 땅에 단단히 꽂는다. 가죽을 지붕으로 올려서 만든다. 기둥은 힘찬 발걸음, 즉 step을 딛듯이 땅에 세게 꽂아야 한다고 해서 stebh라고 불렀다. 지팡이를 뜻하는 staff는 ‘떠받들다’인 선사 인도유럽어 stebh에서 나왔다. 기둥은 제라쉬(Jerash)에서 도시의 중심 도로의 장식 용도로 주로 사용되었다. 신전에 기둥들을 줄지어 세웠다. 몇몇 기둥들은 사람처럼 보이도록 조각했다. 인간의 형상을 각인시키는 것은 흔한 풍습이었다. 여섯 처녀의 형상으로 조각된 아테네 신전의 기둥들이 가장 유명하다. 이 모습은 한 신에게 영원히 봉사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기둥은 성경에 약 120회 언급된다. 평범한 상황이 아니라 특별한 상황에서 나온다. 기둥은 두 종류다. 건축을 지지하는 버팀목이다. 또 하나는 독자적으로 자유롭게 서 있는 기둥이다. 성경에서 기둥의 중요성은 건축학적이지 않다. 다소 상징적이다. 성막과 성전을 묘사할 때 많이 등장한다. 부차적으로 기념물로서의 기둥이다.
기둥의 전이된 의미는 믿을 만한 사람을 가리키기도 한다. Greco-Roman 세계에서 특별한 사회를 위해 중요한 인물을 ‘기둥’으로 말하는 은유를 자주 발견할 수 있다.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의 야고보, 베드로와 요한과 같은 지도자들을 기둥이라는 은유로 사용했다(갈 2:9). 교회를 ‘진리와 기둥과 터’로 묘사한다. 이 비유의 배후에는 한 건물로서의 믿음의 공동체에 관한 생각이 깃들어 있다. 유대인 철학자 아브라함 요수아 헤셸은 히브리의 옛말에 따르면 “세계는 공부, 예배, 자애라는 세 개의 기둥 위에 서 있다”고 한다. “공부는 하늘의 지혜를 더불어 나누는 것이요 예배의 대상은 창조주며 자애는 이웃의 아픔에 대하여 마음을 열고 동정을 베푸는 것”이라고 말한다.
기둥은 안전성과 영속성이다. 받쳐 주는 것보다 굳게 서는 것에 강조점이 있다. 빌라델비아 도시는 지진이 자주 일어나는 불안정한 도시였다. 교회 역시 박해로 인해 안전성과 영속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래서 성전의 기둥이 되리라는 약속은 가장 환영할 만한 것임에 틀림없었다.
LXX에서는 장막을 지지하는 기둥들을 ‘장대’(poles)라고 칭한다(출 26:15-25). 솔로몬은 성전 입구에 두 기둥을 세웠다. 야긴과 보아스라는 이름을 붙였다. 전자는 ‘그가 세우다’, 후자는 ‘그 안에 힘이 있다’라는 뜻이다. 독립 구조로 청동으로 만든 것이다. 주랑 앞에 세웠다. 성전을 지탱하는 용도가 아니다. 건축적인 요소보다 성전의 부속설비를 포함시키고 있다. 두 기둥은 ‘현관 앞’과 ‘현관에’ 또는 ‘현관 가까이’에 위치해 있었다. 문기둥들의 상징적인 기능이 있다. 하나님께서 그 문들을 통과하여 그의 백성 가운데 거하셨다는 사실을 표시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요한이 말한 ‘성전의 기둥’은 야긴과 보아스와 연관이 없다. 기둥은 성전의 이미지에 기초를 두고 있다.
1. 하나님 성전의 기둥
빌라델비아 교회는 이방 출신의 그리스도인들로 주축을 이루었다. 유대인들의 태도와 영원한 성전에서 영원히 있게 됨을 강조하는 것을 고려하면 이사야 65:5을 상기하게 된다. 여기서 이방인들과 고자들이 하나님의 집 안에서 이스라엘이 가진 것보다 더 나은 기념물과 영원한 이름을 가질 것을 말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새 성전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 될 것이다. 유대 회당에서 추방당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성전에서 하나의 공간과 새로운 이름을 받는다는 의미다.
이기는 자에게 하나님의 성전의 기둥이 되게 하리라는 약속은 이사야 56:3-5의 인용이다. 이방인들에게 주어진 ‘이름을 기록한 장소’가 나타난다. 이사야는 이방인의 이름이 기록된, 하나님의 집 돌 기념물에 대해 기술한다. 요한은 이기는 자에게 하나님의 영원하신 이름이 선명하게 그려진 기둥을 기술한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백성을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새로운 성전으로 세우신다는 것은 그 당시 아시아의 교회들에게 익숙한 이미지였다.
요한계시록에서 요한은 구약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특권과 약속들을 신약 교회가 이어받았다고 가르친다. 열쇠, 문, 성읍, 성전, 기둥이라는 개념 자체가 그리스도교적 개념으로 사용된다. 반전의 기초를 이룬다.
이기는 자는 이중적인 약속을 받는다. 도시 주민들의 경험과 기억과 관련된 것들이다. 성전의 기둥에 이름을 새기는 것이다. 이기는 자는 하나님 성전의 기둥이 될 것이다. 실제의 성전이나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언급하는 것이 아니다. 하늘 성전에 대한 언급이다. 종말론적 구원을 나타내는 은유다. 도시 사람들의 머리에 떠오르는 기둥은 지진 후에 초라하게 남은 신전의 돌기둥들이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성전의 기둥은 다르다. 어떤 격동과 흔들림에도 붕괴되지 않는 안전하고 영원한 하늘 성전의 기둥을 약속한다. 지상의 성전이나 신전은 무너지고 파괴된다. 이기는 자는 하나님의 집에서 영원할 것이다.
구약성경에 하나님은 성전 안에 계신다. 요한계시록의 성전은 하늘 성전이다. 새 예루살렘이다. 성도들을 위한 종말론적 공동체다. 새 예루살렘에는 더 이상 성전이 필요 없다. 새 예루살렘 자체가 지성소다. 하나님과 어린 양이 그 성전이다. 성전의 기둥이 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상속받을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은유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의 공동체를 성전으로 묘사했다. 한 공동체의 지도층들을 ‘기둥들’이라고 불렀다. 이기는 자는 성전의 기둥이 되게 하실 것이다. 성전과 영원히 동일시되게 한다. 하나님의 임재라는 주제를 더욱 강조한다.
2. 이기는 자는 성전의 기둥이 되게 하리라
빌라델비아 교회에 주는 약속은 다섯 가지다. 서머나 교회와 함께, 가장 연약한 것처럼 보이는 교회가 가장 큰 보상을 받는다. 한 가지 약속에 대한 다섯 가지 국면이다. 모두 하나님과 연합 그리고 교제의 표현이다. 빌라델비아에는 대규모 유대인 공동체가 존재했다는 증거는 전혀 없다. 서머나에서처럼, 빌라델비아의 신자들도 갈등을 경험하고 있었다. 회당에서 추방당했다.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고 비방했다.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예수님은 그들을 자신의 집으로 환영하신다. 하나님의 성전의 기둥이 된다는 약속이다. 하나님과 함께 한다는 약속이다. 회당에서 배제되어도 하나님의 나라에서 성전같이 소중히 여김을 받을 것이라는 확신으로 들렸을 것이다. 두 번째 예루살렘, 즉 새 예루살렘은 물리적인 성이 아니다. 사람의 공동체다.
빌라델비아 신자들은 하나님의 성전의 기둥이 되리라는 약속을 반겼을 것이다. 흔들리지 않고 확고부동하게 될 것이라는 약속이다. 이는 도시가 자주 경험했던 지진의 재앙과 대조된다. 빌라델비아는 소아시아의 다른 도시들보다 지진으로 인한 피해를 많이 받았다. 참된 교회는 영적으로 파괴되지 않는 성전이다. 하지만 지상의 교회는 물리적 형태로 있는 동안 여러 가지 고난을 받는다. 이것은 ‘성전 바깥뜰은 그냥 두라’는 의미일 것이다. 빌라델비아는 카타카우메네, 즉 문자적으로 ‘완전히 불탄’이라고 불리는 화산 지역에 위치했다. 유익도 있지만 위험도 경험했다. 유익은 기름진 땅을 공급했다. 포도원 농사가 잘 되었다. 위험은 지진과 여진이다. 단층선과 더 가까웠기 때문이다. A.D. 17년에 지진으로 아시아 12도시들이 초토화되었다. 빌라델비아도 황폐화되었다. 세 개의 도시 중심부를 다 평평하게 만들어 버렸다.
지진의 여파로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인 도시를 떠나 외곽 농촌에 거주했다. 불안과 두려움을 직접 경험한 이들이 있었을 것이다. 건물 붕괴로 인해 다치거나 죽지 않기 위해 집과 도시를 탈출한 일이 있었다. 하나님의 성전의 기둥이 된다는 것은 안전성과 영원성과 연관된다. 그곳에서는 흔들림이 없다. 확고부동하게 될 것이다. 영원히 안전할 것이다.
영원함의 측면은 다음과 같이 강조된다.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이기는 자들은 더 이상 나갈 필요가 없다. 새 성전과 연합되기 때문이다. 주변 상황과 상관없이 안전하게 영원히 거하게 될 것이다. 빌라델비아에 사는 것은 불확실함과 연약함이 특징이었다. 지진으로 물리적 피해와 정신적 고통, 외적 박해까지 겪고 있다. 그런데 그들은 더 이상 불안하거나 두려워할 필요 없다. 그토록 갈망하던 안전과 능력을 갖게 될 것이다. 끝까지 이기는 자는 하나님의 성전의 기둥이 될 것이다.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그리스도께서 빌라델비아 교회에 열린 문을 두셨다. 새 예루살렘을 향한 문이다. 이기는 자에게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가게 하신다. 이긴 성도와 성전이 하나가 된다. 영원한 동일화가 이루어진다. 그리스도께서 성도들에게 비가시적인 구원의 성소의 문을 열어 두신 것과 함께 시작된 과정이 완성된 상태를 가리킨다.
기둥의 이미지는 하나님 앞에 영원히 있게 되는 복을 누린다는 것을 묘사한다(시 27:4). 새 예루살렘에는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가 있을 뿐 성전은 없다. 이기는 자에게 성전의 기둥이 된다는 것은 영원히 하나님과 뗄 수 없다는 확신을 가져다준다.
신자들을 성전에서 영원한 기둥이 되게 함으로써 성전과 영원히 동일시된다. 하나님의 임재라는 주제를 더욱 강조한다. 새 예루살렘에는 물리적 성전이 없다. 하나님과 어린 양이 성전이다. 기둥에 새기는 것은 고대 동방 건축물의 공통된 특징이다. 사람을 신전 벽에 자신의 이름이 기록된 것으로 자신과 그 신전의 신이 지속적인 연합을 이루었다고 믿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