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을 품은 유모 보딩 선교사

  • 입력 2021.09.30 10:38
  • 수정 2021.12.03 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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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신배 교수의 구약이야기 (234) - 구약성경과 선교이야기 (46)

박신배 교수 / 연세대 구약학 박사, 현 KC대 교수, 창조문학 편집위원, 한국 평화학회 전 부회장, 한국 구약학회 전 부회장, KC대 전 총장
박신배 교수 / 연세대 구약학 박사, 현 KC대 교수, 창조문학 편집위원, 한국 평화학회 전 부회장, 한국 구약학회 전 부회장, KC대 전 총장

네가 하나님의 오묘함(타크리트)을 어찌 능히 측량하며(하헤케르) 전능자를 어찌 능히 완전히(샤다이) 알겠느냐”(11:7).

참으로 알 수 없는 나날들이다. 불안과 무기력, 두려움과 좌절이 우리는 짓누르고 있다. 이 펜데믹이 언제 멈출 것인가. 이러한 기세를 보니 일 이 년을 더 갈 것 같다. 우리는 우리의 일상 속에서 지금의 상황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을 상태를 예상하고 준비하고 심판과 재앙에 맞는 회개를 하며 창조적 시간과 개인의 깊은 고뇌의 시간을 가져야 할 것이다. 욥은 욥기 42장에 걸쳐서 깊은 내면의 들여다보기를 하며 자신의 인생의 고난과 실존, 하나님 만나기를 집중적으로 하고 있다.

욥기 11장과 12장은 모든 것이 여호와의 손에 달렸고, 여호와가 모든 것을 행하신다는 것을 말한다. “지혜의 오묘함(타아루모트, 은밀함)으로 네게 보이시기를 원하노니 이는 그의 지식이 광대하심이라 하나님께서 너로 하여금 너의 죄를 잊게 하여(야쉐, 사면) 주셨음을 알라”(11:6). 11장에서는 욥의 세 번째 친구인 소발이 변론하며 욥을 공격하는 장면이다. 소발은 고지식하고 무례한 교리주의자이다. 소발은 욥이 당하는 고통에 대하여 비난하며, 현재의 고통에 해당하는 죄를 짓지 않았다는 욥의 말을 공격한다. 신앙적인 면에서는 뛰어나게 보이는 소발의 모습이다. 하나님의 지혜를 찬양함으로써 간접적으로 욥의 항변을 묵살한다. “하늘보다 높으시니(가베헤) 네가 무엇을 하겠으며 스올보다 깊으시니 네가 어찌 알겠느냐 그의 크심은 땅보다 길고 바다보다 넓으니라(레하바)”(8-9).

만일 네가 마음을 바로 정하고 주를 향하여 손을 들 때에 네 손에 죄악이 있거든 멀리 버리라 불의가 네 장막에 있지 못하게 하라”(11:13-14). 소발은 욥에게 회개를 거듭 촉구하며 회개를 한 뒤에 누릴 축복을 말한다. “그리하면 네가 반드시 흠 없는 얼굴(파네이카 미뭄)을 들게 되고 굳게 서서 두려움이 없으리니 곧 네 환난을 잊을 것이라 네가 기억할지라도 물이 흘러감 같은 것이며 네 생명의 날이 대낮보다 밝으리니 어둠이 있다할지라도 아침과 같이 될 것이요”(15-17). 욥의 고난은 우리들의 고난의 모습과 비슷하다. 소발이 바라보는 욥의 실존은, 욥이 느끼고 살아가면서 체감하는 하나님의 앞에 실존과 달랐다. 결국 하나님 앞에서 갖는 신앙양심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며 이러한 고난의 과정을 통해 정금과 같이 나오는 신앙인의 삶을 보여준다.

네가 희망(티크와)이 있으므로 안전할 것이며 두루 살펴보고 평안히 쉬리라(티쉬카브)”(18). 본문 자체의 말씀이 주는 평화와 평안, 희망과 위로가 우리에게 오늘날 필요하다. “네가 누워도 두렵게 할 자가 없겠고 많은 사람(파네이카 라빔)이 네게 은혜를 구하리라(힐루)”(19). 이러한 평화의 종, 위로의 전도자가 바로 선교사들이었다.

우리나라의 영유아 복지사업의 선구자였던 보딩(M. P. Bording, 1878-1957)은 공주 지역에서 선교하였다. 그녀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영유아를 위한 우유급식소를 운영했다. 보딩은 1916년 필리핀에 처음 파송 받아 사역하다가 1922년 한국에 전임되어 공주 진료소를 중심으로 파운드 선교사와 더불어 순회 진료 활동을 펼쳤다. 그녀는 19241월 진료소 한 쪽 방에서 유아질병과 건강관리를 위한 진료소를 차리고 유아 복지 사업을 열었다. 11명의 유아들을 데리고 시작한 유아 진료소가 이듬해에는 새 건물이 필요할 정도가 되어서 직원들과 모임을 갖으며 매주 1회는 특별 기도회를 가졌다. 그런데 놀랍게도 기도의 응답으로 미국의 어느 노인이 기금을 보내주어 1926년 한국의 최초의 유아들을 위한 우유 급식소가 생기게 되었다.

보딩선교사와 중앙유아원 (출처 : 공주기독교 중앙사회복지관)
보딩선교사와 중앙유아원 (출처 : 공주기독교 중앙사회복지관)

1938년 우유보급소에서 1년에 3백 명의 유아들에게 7만 병의 우유를 공급하였다. 이렇게 발전하면서 건강 검진을 2천명에게 실시하며 영유아 복지 사업을 확장하여 유아 사망률을 격감하게 하였다. (당시 자료에 따르면 1925년 서울의 5세 미만 영아사망률은 49.6%나 됐는데, 보딩은 1927년 여성 선교사 연차 총회에서 자신의 진료소 운영을 통해 젖병소독과 우유 급식으로 위탁받은 영아의 사망률을 5%로 낮췄다고 보고했다.)

하지만 1941년 일제의 의해 보딩은 추방되었고, 1944년 그녀가 세운 대전 중앙영아관이 군부대 사무실이 되면서 선한 사업이 중지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영유아 복지 사업은 해방 이후에 영향을 미쳐서 영유아 복지 사업의 뿌리가 되었으며 그 사업이 발전하는 기초가 되었다. 한 알의 밀알이 썩어서 많은 열매를 맺는 결실이 보딩의 사역이었음을 알게 된다. 인생은 결국 사랑만이 남는다는 사실을 기억할 때, 보딩의 사랑이 우리나라 영유아 복지의 씨앗이 되었다. 오늘도 이 사랑의 씨앗이 절실히 필요한 시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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