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견해로는 부정적 설교란 없다. 그런데 왜 부정적 설교란 용어가 설교자와 성도들 사이에서 통용되고 있는가? 신학자와 목회자들 사이에서 사용되고 있는 두 부류의 설교형태를 관찰해 보겠습니다.
전병욱 목사는 ≪낙타무릎≫에서 다음과 같은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언젠가 로버트 슐러의 메시지에 당혹한 적이 있었다. 그는 ‘교회 부흥을 위한 설교학’을 강의하면서 교회성장을 위한 설교는 절대로 부정적인 이야기를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될 수 있으면 죄, 심판, 징계는 하지 말고 오로지 긍정적인 희망, 확신, 가능성만을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말에 통탄해 마지않는다. 명심하라! 오류가 성공하는 것은 크나큰 재앙이다. 왜 그런가? 많은 사람들이 그것이 옳은 것인 줄 알고 따르기 때문이다. 결국은 이 ‘적극적인 사고방식’이 많은 긍정적인 기여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한국 기독교를 이렇게 저속하게 만든 최고의 책임이 있지 않나 생각한다. 적극적인 사고방식형의 설교가 일시적으로 수적 증가를 보인 것 같이 보였지만, 엄밀한 의미에서의 ‘십자가에 의한 회심 신자’를 만드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은 가감 없이 선포되고 읽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성경은 수많은 부정어(문)로 많은 구절 말씀이 작성되어있다. 그럼에도 성경 말씀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은 없다. 모든 설교는 긍정적이다. 다만 설교 전달 과정에서 의미 전달을 잘못함으로써 긍정의 설교가 부정의 설교로 변질 된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긍정적 설교가 어떻게 해서 부정적 설교로 변질되는지 그 과정을 설명하고 대안을 제시하려고 한다. 핵심은 부정어(문)과 의문문에 있다.
1. 부정어(문) 설교문장
디모데후서 3:16-17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설교에서 교훈과 책망이 없으면 소금이 짠맛을 잃은 것과 다름이 없다. 그런데 그 교훈과 책망을 어떻게 가르치고 강조하며 선포할 것인가가 문제의 핵심이다. 설교자가 작성한 설교문은 보통 평서문, 부정문, 의문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때 부정어로 구성된 부정문장은 낮은 음성(도, 레 정도)으로 선포한다. 특히 부정어 속에 감추어진 의미를 파악 할 줄 알아야 한다. 바로 부정어 속에는 긍휼의 마음이 담겨있다. 여기까지 전달되어야 한다. 다음 환난과 관련된 예문을 하나 보겠습니다.
◎ 환난과 건짐
낮은 음성(부정어) 으로 선포하는 단어 : 환난, 싫어하다, 죽음, 사업실패, 쓰라린 고통, 가정불화, 아픔, 슬픔, 탄식, 괴로움, 불행, 원망)
사람은 누구나 환난을 싫어합니다. 아마 환난을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사는 동안 많은 환난을 겪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겪습니다. 사업실패의 쓰라린 고통을 겪습니다. 가정불화의 아픔을 겪습니다. 여러 형태의 환난이 쉬지 아니하고 일어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이 세상은
환난의 장소요
환난의 창고요
환난의 집합소와 같습니다.
환난이 오면 사람들은 슬퍼합니다. 탄식하며 괴로워합니다. 자신만이 불행하다고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시편 50:15) (->미파솔 높이로 선포) 이렇게 말씀 하십니다.
우리가 환난을 당하여 사람을 찾아가면 한두 번 들어주다가 나중에는 피합니다. (도 음성)
어떤 이는 처음부터 피하려 들것입니다. (도 높이)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네가 환난을 당했느냐? 그러면 나에게 와서 나를 부르라” 고 하십니다. (파솔라 높이)
이 시간 환난을 당하신분은 (도 높이) 그 환난을 가지고 하나님을 부르시기 바랍니다. (파솔라 높이)
“내가 너를 건지리라” (파솔라 높이) 이것은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약속의 말씀입니다. (파솔라 높이)
2. 의문문 설교문장
앞에 설교선포의 원리 5대 구조에서 설명한대로 두 번째 구조인 문답형 대화체 설교 선포의 원리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설교문에서 의문문 문장은 끝부분에서 낮은 음성으로 선포하면서 끝을 내린다.
예문1)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즈음 온라인 예배를 임하는 여러분들의 마음가짐은 어떻습니까?↷ (도 음성)
기도 생활은 변함없이 실천되고 있는지요?↷ (도 음성)
특히 자영업을 하시는 여러 사장님들께서는 얼마나 힘드십니까?↷(도 높이)
의문문 끝을 올려 부치면 의문문이 의심문으로 변질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설교문에서 의문문이 감추고 있는 숨은 뜻을 파악하셔야 합니다. 얼마나 힘드십니까? 에서 질문체가 아닌 “힘드실텐데 어떻게 지내고 계시느냐” 라는 긍휼. 동의를 표현해 보시길 바랍니다.
설교자의 마지막 행위는 설교전달력입니다. 전달력을 단련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훈련 밖에 없습니다. 반복 또 반복. 이것만이 체화되는 길입니다.
스포츠 선수들은 운동장에서 90%, 강의실에서 10%를 땀 흘리고 있습니다. 설교자는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할까요? 서재에서 20%, 강단에서 40%, 기도실에서 40%! 연구, 훈련, 기도만이 살아있는 설교를 선포 할 수 있습니다. 설교문이 그물이라면 전달력은 그물 던지는 실력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