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의심문은 상대를 자극할 뿐이다.
“공부 잘 되니??⤤ 왜 저를 의심하세요?”
밑줄 그은 곳을 눈 여겨 보세요. 조카가 나의 집에서 고3을 보내던 9월 어느 날 이었다. 오후 2시쯤 조카가 학교에서 왔다. 마침 나는 집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였다. 조카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온 순간 서로 마주보며 놀랬다.
순간 나의 감각 기능은 의심으로 이동하는 거였다. 고3 학생이 수업도 마치기 전에 오다니?? 그럼 오늘뿐만 아니고...“너 공부 안 되지”라고 묻기에는 너무 돌직구 같아서 커브로 약간 비틀어서 물었지요. “공부 잘 되니??⤤” 커브로 던졌더니 바로 조카도 알아차렸는지 배트를 휘둘렀습니다. 빨랫줄 같은 홈런 성 타구가 날아왔습니다. “왜 그러세요?” “오늘 저희 학교 개교기념일이에요.” “학급 회장들만 나와서 회의 한 거에요” 나도 바로 반사적으로 수비에 들어갔지요. “아니, 너 공부 잘되는지 염려해서 그런거야” 엉성한 가짜 수비는 스피치 생태학 전문가에게도 별 소용이 없었다. 정말 카운터펀치가 날아왔다. 조카의 돌직구, “저를 지금 의심하고 있지 않아요” “아니 그게 아니고...” 조카는 즉각적으로 나의 의도를 파악한 것이다. 완전히 속 보인 하루였다.
그 동안 의문문에 대한 강의를 얼마나 많이 해왔는데 “의문문은 가능한 끝을 내리십시오. 특히 아랫사람에게는 무조건 낮은 음성으로 끝 부분을 내려야 합니다”라고 강의를 해온 내가 의심문을 모르는 아이에게 잡히다니, 그날은 학문연구 차원에서도 사색의 시간이 되었다. 특히 의심의 말투가 주는 부정의 전파력은 관계를 끊어놓을 만큼 교만의 탈을 쓴 가면이었다. 조카도 의심을 받았다는 수모에 자존심이 상했겠지요. 공부할 맛도 뚝 떨어졌겠지요. 차라리 학교에서 일찍 돌아온 조카에게 “어디 아프니?”↷ “조퇴하고 오는거니”↷ 라고 하였더라면 서로의 인격적 대화는 깨지지 않았을 거예요. 독자 여러분은 이와 같은 상황들을 경험해 본 적은 없습니까? 영혼을 감동시키는 말이 울림이라면, 영혼을 자극하는 말은 때림입니다. 그러나 영혼을 의심하는 말은 때림도 아닙니다. 그것은 포기와 속상함을 강요하는 악마의 속임수일 뿐입니다.
심리학자 알프레드 아들러 Alfred Adler는 이렇게 말 하더군요. “인간에게 놀랄만한 특성중의 하나는 마이너스를 플러스로 바꾸는 힘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다.”
의심은 용기를 부여하지 않는다. 의욕만 꺾을 뿐이다. 의심형을 피할려면 일단 문장 끝을 내려야 한다. “공부 잘되니?”↷ 그런데 질문체의 ‘니’와 ‘니까’의 의문형은 끝을 올리면 의심과 부정을 동반할 때가 많다. 그래서 ‘니’가 어려우면, ‘~지’로 바꾸어 사용해 보라고 제안을 합니다.
공부 잘되지↷ 하면 끝이 부드럽게 내려가면서 ‘잘되고 있을 거야,’ ‘잘 되어야 하고,’ ‘너는 잘하지’ 라는 바램과 믿음이 함께 따라갑니다.
4) 의문문 1도 내리면 왜 기회가 더 커질까요?
국어사전에 동의同意란 “같은 의미, 의사나 의견을 같이함. 다른 사람의 행위를 승인하거나 시인함” 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제 의문문이 동의문으로 되는 과정을 보겠습니다. 동의同意 공감共感 으로 까지 넓게 이해해도 무리는 없을 듯합니다.
“배 고프지?⤥” “ 배고프니??⤤”
(엄마用) (아빠用)
저녁 10시쯤 고1학년 자녀가 들어온다. 거실에 앉아있던 엄마가 배고프지 하고 맞이한다. 그리고는 아이의 대답도 듣지 않고 주방으로 간다. 왜 그럴까요? 아이의 저녁 밥상을 차리겠다는 신호이다. 옆에 있던 아빠는 밥 먹었니⤤ 하고 올렸다. 아이가 “먹었어요” 꽝하고 문을 닫고 제방으로 들어간다. 엄마가 물었을 때는 아무 답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아빠가 물었을 때는 퉁명스럽게 “먹었어요”하고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아버지도 화가 난다. 여러 생각이 들어간다. 모처럼 아이하고 대화 좀 하려고 했던 아버지의 희망이 사라진다.
잠시 후 엄마는 아이를 데리고 나와 식탁에 앉힙니다. 아버지가 “밥 먹었느냐”고 물었을 때는 분명히 “먹었어요” 라고 대답을 하였다. 조금은 공손한 대답은 아니었지만, 먹었다고 하였거든요. 그런데 엄마가 데리고 나와 밥을 먹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독자 여러분들은 학창시절 이런 경험은 없었는지요? 엄마는 동의 문으로 배고프지?⤥를 물은 것입니다. 사실은 물어보는 질문체가 아닌 ‘밥줄께’를 말하고 있는 거죠. 아이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맛있는 엄마 밥 먹어야지” 엄마의 첫마디 “배고프지?⤥⤿↷” 는 ‘우리 아가 얼마나 배고프니, 늦게까지 공부하느라 힘들지, 맛있는 것 해놓았어’ 까지 담긴 따끈따끈한 마음의 언어입니다. 아이의 마음과 엄마의 마음이 같습니다. 이것을 동의, 동감이라 부릅니다.
의문문 끝을 내리면 일단 의심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런데 아빠가 물어보는 대화의 형식은 대화를 나누겠다는 신호가 아니다. 배고프니⤤ 하는데 90%는 의심과 부정으로 해석한다. 문을 꽝 닫고 들어간 것은 부정으로 이해한 거다.
“지금 몇 시인데 밥도 안 먹고 다니느냐?” 라고, 아이는 해석을 하고 꽝하고 문을 닫았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평소에 아빠가 자주 하셨던 말씀이 떠오릅니다. “아빠는 30(12km)리길을 초등생부터 걸어 다녔다(왕복60리.24km) 자장면도 중학교 입학식 때 처음 먹었다. 너희들은 정말 좋은 환경에서 공부하고 있다. 공부방이 없니, 냉장고가 없니, 이런 환경에서 공부 못하면 말도 안 되지, 아빠의 과거팔이에 이제는 곰팡이가 필 지경이다.
엄마의 배고프지⤿ 의 한 마디는 어디에서도 들어본 적 없는 마음의 안식처다. 나를 숨 쉬게 합니다. 숨은 쉼이기 때문입니다. 동감同感을 표현하는 것은 상대 쪽에서는 안정과 편안함을 느끼는 상태다. 내편이 되어주기 때문이지요.
요즘은 지나치게 합리적이고, 논리적이고, 기계적이다 보니까 배고프지 하고 부엌으로 가는 엄마가 얼마나 있겠습니까마는, 예전 어머니들은 이런 부분에서 공감대 형성이 풍부했었던 같아요. 그런데 의문문 끝을 올리면서도 순수 의문형으로 전달되는 특별한 유형이 있다. 문재인 대통령의 화법이다. 이를테면 OO하지 않습니까? OO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 하십니까? 에서 니까의 표현법이 아주 독특하다. 물음표 끝을 내리지는 않는다. 끝을 올리는 과정이 무척 신선하고 순수하게 들려온다. ~하지 않습니까?에서 ↺↺ 내려갔다 올라갔다 다시 끝쪽을 한번 돌렸다 내려가는 형태다. 이런 어조는 청중들을 향하여 동의와 구애를 표시하는 순수 청년의 고백문 연설이다.
다음 문장을 눈 여겨 보실까요?
“어찌 합니까? 어떻게 할까요. 감히 제가 감히 그녀를 사랑합니다. 조용히 나조차 나조차도 모르게 잊은 척 산다는 것 살아도 죽은 겁니다”
위 내용은 가수 임재범의 고해苦海 의 노랫말이다. 첫 문장만 불러 보시죠. “어찌합니까?” 물음표 ~니까? 에서 어떻게 처리하시겠습니까? 끝을 올리렵니까? 내리렵니까? 수평으로 가렵니까?
어느 날 우연히 정말 순간적으로 T.V에서 임재범 가수를 보았다. 히든싱어라는 프로였다. 여섯 명이 한 소절씩 고해라는 노래를 부르는데 그 맴버들 속에 원조가수도 섞여있다. 나는 임재범의 노래를 듣는 그때 입을 다물지 못했다. 생각이 멈추었어요. 나의 영혼을 꺼내가는 순간이었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는가! 또한 그의 소리는 타고난 목소리 위에 삶의 나이테까지 촘촘히 얽혀진 빛깔 이었어요. 태고의 힘겨운 소리부터 담고 있더군요. 길들여지지 않던 야생마의 외침도 기록하고 있었어요. 야성까지 절제하는 군자의 모습이라 할까요. 나는 고해의 길에서 빚어진 그의 천연의 소리에 TV를 끄지 못했다. 정신 감응에 붙들린 거다. 임재범의 특별한 설명이 있었다.
노랫말 첫 소절 “어찌합니까?를 따져서는 안된다”는 거였어요. 모창 가수들은 의문형이기 때문에 약간은 물음표 끝 쪽에서 올리듯 말 듯, 끝을 올리면 내가 어떡해야 하냐고, 나더러 어떡하란 말이냐 처럼 따지는 형태가 되겠지요. 임재범은 “따지면 안 된다는 거예요” “절규하며 물어야 한다”는 거예요.
나는 얼마나 가슴을 치며 감사 했는지요. “절규하며 물어야 한다”는 그의 말뜻은 나는 이렇게 받아들였어요. 나의 사랑에 동의를 구합니다. 내가 그녀를 사랑하는 것에 대하여 거부하거나 부정하면 안 됩니다. 그녀에 대한 나의 사랑을 인정해주세요 하는 ‘절규의 동의’ ‘동의를 구하는 절규’ 라고 해석하고 있어요.
5) 긍휼의 메시지는 의심 문을 여는 키
의문문 속에는 숨어있는 비밀이 있다. 그것은 의문형 속에 감추어진 긍휼이다. 긍휼은 상대의 아픔을 내 마음으로 느끼는 상태를 말한다. 긍휼이란, 측은한 마음 부어 주기이다. 손이 시릴 때 손 잡아주고 장갑 끼어주는 마음이다. 울고 있는 사람과 함께 울어주는 마음이다. 빗방울 손등으로 가리며 멋쩍어 하는 친구에게 함께 쓰는 우산이다. 산모퉁이에서 강도 만나 피 흘려 쓰러져가는 사람에게 다가갔던 선한 사마리아인을 아십니까? 바로 그의 행함이 긍휼입니다. 긍휼은 감성과 공감, 이해와 동의, 사랑과 아픔을 연결하는 이음새다.
다음은 의문문에 감추어진 긍휼의 메시지를 만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도 잘 되고 계십니까?⤿ 또는 잘 되고 계시는지요?⤿" 에서 끝을 1도 내리면 동의문이 된다. 그러나 사랑이 넘치는 목사님이라면 동의에서 머무르지 않는다.
“요즘 휴가철이 되어 기도 생활을 게을리하는 교인들이 있는 것 같아 저의 마음이 아픕니다.” “꾸준하게 기도 생활 했으면 좋겠습니다. “코로나 19의 어려운 환경에서 균형 있는 신앙생활을 유지했으면 좋겠습니다.” 라는 목사님의 간절한 바램 까지 들어가는 메시지가 긍휼의 메시지다. 현상 너머에 있는, 상대의 소망까지 아우르는 실상이다. 거기까지 볼 줄 아는 것, 느낄 줄 아는 것. 불쌍해서 함께 아쉬움을 토로하는 모양까지 나아가는 떨림이 동의를 뛰어넘는 긍휼의 환경이다. 사실 설문조사를 해보면 한국의 대다수 목사님들은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다.
동의와 긍휼은 상대를 먼저 인정하는 태도이다. 긍휼의 마음은 가장 인간다운 성스러운 품성이다. 긍휼은 상대를 희망의 눈으로 보는 시선이다. 긍휼은 상대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나누는 손길이다. 여기까지 진보하셔야 합니다.
친구들끼리 가끔 언쟁이 높아지는 현장을 상상해 보자. 약속시간보다 늦게 도착한 친구에게 “바쁘니??”↗하는 표현법은 ”바쁘면 약속을 하지 말든지“ 라는 의미가 들어있지요. ”바쁘지“?↘↷
하고 낮은 목소리로 부드럽게 내린 표현법은 “너 바쁜 거 알고 있어” “얼마나 힘드니” 라는 친구의 따뜻한 이해의 언덕이 전달되는 표현입니다.
동의와 긍휼은
상대를 먼저 인정하는 태도이다.
저하고 함께 공부 하였던 부산의 박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체격이 마른 편 이었어요. “저는 살이 찌고 싶은데 안찌는 체질이다.” 라고 하시더군요. 강의 참석 2개월이 지난 후였다. 점심 식사를 대접한다는 거였다. 30명이 넘는 동기 목사님 모두에게 식사를 섬긴다고 광고를 했다. 박수 치고 앵콜하고 축제 분위기였어요. 식사 대접하는 배경은 이러했다. 20년 만에 체중이 4kg가 늘어 예전 옷들을 입을 수가 없었답니다. 더욱 기뻐 할 일은 유학 간 자녀가 잠시 들어왔는데 아버지의 설교를 듣고 충격을 받았데요. 기쁨의 충격, 감탄의 소리로 눈물을 흘렸다는 거예요. 따님이 10여 년 동안 기억하고 있는 그 사나운 패턴이 바뀌었으니, 놀랄만한 사건이 되었겠지요.
“의문문 끝부분 하나 바뀐 것 뿐 인데” 더더욱 놀라운 사건은 어느 날 부터인가 교회가 조용해졌답니다. 장로님들과 권사님들께서도 회의 때 “네, 네” 만 하더라는 거예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반론을 펴시고, 반대를 위한 반대만을 하신 분들도 있었는데, 뿐만 아니라 살이 쪄서 셔츠가 터질 것 같은 모습을 보고 옷 선물이 밀어 닥쳤데요. 듣고 있던 저는 눈물이 나더군요. 수없이 들어왔던 체험담들이었지만, 살까지 쪘다는 그 말씀이 그렇게 행복 할 수가 없었어요. 박목사님의 명언이 들려 왔습니다.
“물음표가 느낌표로 바뀌더라” “성도들의 괜한 걱정 때문에 마음이 시려지더라” 제 강의 중에 “무엇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상황은 바뀐다.” 는 말이 실감 난다고 하더군요. “눈은 관계의 틀이다” 제가 가끔 이런 말을 강조했지요. “성도는 가르침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이다.” 이 글을 읽는 분이 선생님이라면, 여러분의 학생들은 어떤 대상일까요? 가르침의 대상일까요? 꿈을 키워줄 대상일까요?
의문문 끝부분 하나
바뀐 것 뿐 인데...
의사 선생님 한분이 계셨어요. 1년을 넘게 공부 하였지요. 주 2회 1:1 코스였습니다. 김 원장님은 실력이 좋기로 소문난 의사였다. 평소의 말소리, 소통능력, 외부 초청강의 등에도 평가가 좋은 편이었다. 그런데 한 가지 풀리지 않는 숙제가 있다고 하더군요. 간호사님이나 후배 의사, 원무과 직원들은 자기를 너무 무서워 한다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원장님은 성격도 날카롭고 우리의 인격까지도 무시 할 때가 많다”고 불평하는 얘기들이 들려 왔다는 거예요. 자신은 직원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며 힘쓰고 있는데 자신의 깊은 뜻을 져버리는 마음이 섭섭하다는 거였어요.
그러던 어느 날 직원과 통화하는 모습을 내가 듣게 되었다. 의문형 끝자리는 무조건 파 솔 이상으로 올라갔다. 부정과 명령 이었다. 갑과 을의 관계처럼 선이 그어져 보였다. 대화의 내용 면에서는 잘못된 부분은 없었다. 사용하는 단어도 존댓말 이었어요. 다만 의문문 끝을 습관적으로 올려 쳤어요. 이후 의문문과 긍휼 강의를 집중적으로 쏟아 부었지요. 편의점, 식당에 가서도 무조건 끝마디를 내리는 트레이닝을 하였지요. 효과는 바로 나타났습니다. 어떻게요?
“사람이 바뀌었다.” “사람이 달라졌다.” “갑자기 바뀌니 걱정이 된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감탄의 소리. 남편과 자녀로부터도 행복의 기운이 날아 왔답니다. 김원장 본인도 “세상이 참 맑더라”고 고백을 하더군요.
리더의 덕목 중에 긍휼은 선택이 아니다. 긍휼을 모르는 리더는 자신의 잘못과 실수를 인정하지 않는다. 동시에 어려운 이웃을 이해와 용서의 가슴으로 만나주질 않는다. 긍휼이 없는 지휘자는 과정을 보지 않는다. 그들은 실패를 실패로만 본다. 결과만을 보고 성패를 따진다. 이런 유형의 리더들은 공적 주의에 빠져서 자신의 업적만을 자랑하는 삼류의 길을 갈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