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정어와 상처
“공부가 그리 중요한 것이오? 옷차림이 그리 중요한 것이오? 나는 임금도 싫고 권력도 싫소, 내가 바란 것은 따뜻한 눈길 한번 다정한 말 한마디였소”
위 메시지는 2014년에 상영되었던 이준익 감독의 영화 ‘사도’ 의 한 장면이다. 자신을 뒤주에 가둔 아버지 영조 임금을 향한 사도세자 이산의 불만의 메시지이다. “나는 임금도 싫고, 권력도 싫소, 내가 바란 것은 따뜻한 눈길 한 번, 다정한 말 한마디였소”
따뜻한 눈길과 다정한 말 한마디. 나는 이 둘을 합쳐 관심이라고 부른다. 관심은 말하고 싶은 눈길이다. 관심은 닫힌 문 열어주는 말길이다. 관심은 차가운 손 잡아주는 손길이다.
관심은 상처가 없습니다. 관심은 따뜻한 시선이 보내는 손길이지요. 따뜻함은 참 좋은 단어입니다. 따뜻함에는 상처가 없기 때문이지요. 어떤 손길은 우동 한 그릇에도 따뜻함을 담아 놓습니다. 그 손길은 처음부터 따뜻한 모양을 만들었습니다.
이철환 작가는 ⟪연탄길1⟫에서 “상처를 주지 않고 사랑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소리 없이 아픔을 감싸준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상처는 ‘아파요’하는 흐느낌이다. 우리는 타인의 삶에 상처자국을 남길 때가 더러 있다. 어떤 사람은 상처위에 또 상처를 남긴다. 새살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상처를 파는 이것들은 무관심보다 더 큰 웅덩이를 파지요. 그 웅덩이는 ‘부정어’란 단어입니다. 무관심은 시간 속에서 엷어지기도 하고 얕아지기도 한다. 색깔이 옅어져서 잊혀 지기도 한다. 하지만 부정어는 시간과 함께 상처의 부위를 파고 들어갑니다.
특히 부정어로 상처 낸 인격적 모욕侮辱은 가슴이 아파한다. 분함이 통증을 때린다. 천성이 여린 사람은 혼자 끌고 가다, 영혼을 놓아 버린다.
부정어는 부패어로 변질된다.
부정 표현은 특히 정치 현장에서도 흔하게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상대 당을 비판할 때 솔라시도의 높은음에서 처리한다. 부정어를 최대의 공격형 무기로 작동시키는 것이다. 부정어를 반복적으로 힘주어서 강조하게 되면 부정어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부정어는 부패어로 변질이 되어 주변까지도 악취를 풍긴다.
일부 목사님들의 설교전달도 정치연설처럼 부정어에서 높은 음성으로 힘을 준다. 부장님도, 박사님도, 부정어를 강조한다. 그들도 어린 시절부터 익숙해진 부정어 사용법을 구사하고 있었다.
어느 날 김 목사님의 고민을 들었습니다. 교인들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하면 교인들은 미워하는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목사님은 우리를 못한다고만 하신다.” “평소에는 인자 하시는데 강단만 올라가시면 사나운 이리로 변한다.” “사랑의 설교가 아니라 치는 설교만 하신다.” “이중인격자다” 이런 불만의 소리가 들려온다는 거예요. 심지어 사모님까지도 “왜 성도들을 주눅 들게 하세요.” “평소하고는 전혀 다른 사람이에요” 하신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교만은 나쁜 인간들이 하는 행동입니다.” 교만과 나쁨은 부정어지요. 이 단어에 파,솔,라 높은 음으로 박력 있게 밀어붙이면 회개가 주눅으로 바뀝니다. 여기에다 제스추어까지 동반하면 어떤 반응들이 나올까요? 보편적으로 대화나 강연에서도 부정어 사용할 때 주먹을 쥐고 강조하거나 손을 흔드는 분들이 있지요.
그럼 목사님은 왜 부정어를 강조하셨을까요? “교만하면 안 됩니다”를 강조 하기위해 음성을 높인 것입니다. 교만하지 말고 겸손 하라는 뜻으로 사용한 것이지요. 그런데 교인들은 어떤 의미로 받아들였을까요? 너희들은 교만한 사람들이다. 선생님들께서 지각을 강조한 것과 같은 현상입니다. 필자가 진단하는 한국 목회자들의 인격적 태도는 대다수 희생, 헌신, 긍휼, 감사, 검소, 소박, 기도, 겸손, 열정을 갖춘 분들입니다. 90%는 자신보다는 이웃을 더 섬기는 아름다운 분들이지요. 그들은 오랜 기간 사명자의 훈련을 받아왔고 성도에 대한 희생적 사랑을 실천해 왔다. 제가 부정어 사용법을 발견한 것은 설교스피치 강의 시작한지 12년이 지난 뒤였다.
커뮤니케이션의 본질을 발견한 것이지요. 의미 전달에 있어 말과 글의 차이를 찾아냈어요.
부정어에 숨어 있는 속뜻을 발견하였습니다. 하늘의 선물 이었습니다. <표1>을 보겠습니다.
이 결과물은 5년 동안 전국순회 세미나를 통해 조사한 설문 내용입니다. 많은 분들께서 2-30년 동안 고민했던 문제가 해결 되었다고 좋아들 하셨지요.
<표1>
목사님은 3대 악 설교를 하고 있습니까?
1.거친설교 85%
2.사나운 설교 53%
3.빨리하는 설교 75%
조사기관 : 한국설교스피치전문학교
조사대상 : 한국목회자(담임목사) 2000명
조사기간 : 2005년 2월-2009년 8월
조사방법은 강의 참석자에 한해서 제한을 두었다. 우리 연구소에서는 매년 1월과 8월 두 차례 전국대도시 중심으로 순회 세미나를 개최한다. (2005~2014) 특이한 것은 조사 할 때 마다 매년 3대악 설교의 통계는 비슷했다. 3대악 설교 중에서 가장 큰 문제는 거친 설교 부분이다. 전국평균 85%대, 그럼 3대악 설교란 어떤 설교인가? 조금은 거친 설교를 말합니다. 내용은 좋은데 전달이 잘못되어 본질이 변질된 내용을 말합니다. 커뮤니케이션 기준으로만 제한한 것이므로 착오 없도록 부탁합니다. 3대악 설교에 관한 이론은 제가 처음 창안하여 사용한 것이지만, 새로운 이론은 아닙니다. 내가 개념을 정리했을 뿐입니다.
부정어는 중독증이 있다. 부정어를 큰 의미 없이 습관적으로 사용하면 어느 사이 부정적 인간이 된다는 사실이다. “그 애는 틀렸어” “우리 회사는 이제 끝났어” “머리 우둔한 사람은 아무쓸데가 없지” “한국축구는 골 결정력이 없어” “100년 가도 우승은 어림도 없지” “부자 놈들 다 도둑놈들이야” “나는 아부를 못해서 출세하기 틀렸어”등등
*부정어 남발은 부정적 사고로 가는 과정이다.
*부정적 사고는 창조와 혁신의 영감을 거부하는 하향평준화 이다.
*부정부터 선택하는 것은 실패의 유혹을 따르는 것과 같다.
*부정은 시작과 도전을 찾지 못하고 도망과 포기부터 찾는 쇠락의 과정이다.
영화 300의 원작자 불의 문 Gate's fire를 쓴 스티븐 프레스필드 Steven Press field 의 부정에 관한 이론입니다. 그는 ⟪최고의 나를 깨워라⟫에서 “부정적인 힘은 저항이다.”라고 정의 하고 있다. “저항이 노리는 한 가지 목적은 우리가 낮은 차원에서 높은 차원으로 발전하는 것을 가로막는 것이다. 저항은 주변에 있는 반대자들이 아니다. 저항은 우리 자신 안에 있다. 저항은 우리 안에서 생겨나며 우리 자신에 의해서 지속된다. 저항은 내부에 있는 것이다.”
부정적인 태도는 진보를 가로막는 주저함이다. 망설임이다. 부정적인 반응은 짜증스런 말투로 이동한다. 시비를 키운다. 부정적인 반응은 움츠려들거나 소리를 크게 지르게 한다. 부정은 남 잘되는 꼴을 못 본다. 선거 전략에서도 네거티브negative 전략이 있다. 네거티브 사전적 의미는 ‘부정적이거나 반감을 살만한 것들을 부각시키는 방법이나 전략이다’라고 정의하고 있다.
영하 5도의 날씨에 바람이 세차게 부는 날의 체감온도는 영하 15도 정도로 느낀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입을 통해 만나는 부정어와 글속에서 만난 부정어와의 체감 차이는 바람과 태풍의 차이다. 더구나 네거티브가 몰고 오는 태풍은 진흙탕을 동반하고 오기 때문에 지저분하고 끈적거리며 추하기가 이를 데 없다. 정말 숨이 막힐 지경이다. 막말 바이러스는 우리들의 숨을 헐떡이게 한다. 주위에 그런 사람 있으면 참 밉다. 한 대 때려주고 싶다. 공동체 내에서도 부서별로 헛소문 띄워 공동체를 아프게 하는 사건들이 얼마나 많은가요?
긍정심리학 창시자인 마틴셀리그만 Martin EP.Seligman 은 ⟪긍정의 심리학⟫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부정 정서가 당신에게 승자와 패자를 가리는 제로섬 게임을 하고 있음을 알려주며 ‘여기 물리칠 적이 있다’는 경고 신호를 보내는 감각계라면 긍정 정서는 이제 곧 윈-윈 게임이 시작 될 것이라는 신호를 보내며 ‘여기 발전할 기회가 있다’는 대형 네온사인을 켜주는 감각계인 셈이다. 긍정 정서는 발전적이고 유연하며 창조적인 사고 작용을 활성화함으로써 사회적, 지적, 신체적, 심리적 혜택을 한껏 누리게 해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