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정어 뒤에 숨어있는 동의어
“당선된 후에 신뢰를 어기는 배신의 정치는 결국 패권주의와 줄 세우기를 양산하는 것으로 반드시 선거에서 국민들께서 심판을 해주셔야 할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이라면 고딕체 단어들을 표현 할 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한번 소리 내어 읽어 보세요. 과거처럼 파 솔 라 높이로 외쳐보세요. 어떠신지요? 마음의 평화가 오나요? 분함이 올라오나요?
그럼 이제 지금 공부하고 있는 부정어 사용법에 따라 낮은 음성인, 도 정도로 전달해 볼까요? 조금은 안정이 되십니까? 분함이 가라앉고 안타까움이 올라오나요.
중요한 비밀 하나 고백합니다. 음성만 1도 낮춰가지고는 완전한 울림을 기대할 수 없다. 울림이 감동되기 위해서는 부정어 뒤에 숨어있는 동의를 찾아내야 한다.
꼴도 보기 싫은 그에게도 지난시절 한번은 좋았던 관계가 있었을 것이다. 아니면 미워지는 그에게도 좋은 점 하나는 보인다. 그도 하나님의 작품이니까요. 지나간 좋았던 시절, 고마워하고 불쌍한 그의 모습을 그리면서 다독거려 보세요. 부정어가 아니라 긍정어보다 더 강한 긍휼, 용서, 사랑스런 부활의 언어로 재창조 됩니다.
배신이라는 단어와 심판이라는 단어는 무서운 단어이다. 일상생활에서 흔하게 사용하는 단어가 아니다. 외시(사전적)의미만 보면 날카로운 부정어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이들도 따뜻한 시선과 결합하게 되면 함축적 의미로 재생산 된다.
스티븐 코비Stephen Covey는 ⟪원칙 중심의 리더십⟫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원칙중심적인 사람들은 표정이 밝고 유쾌하며 행복에 차 있다. 태도 역시 낙관적이고 긍정적이며 또한 기대에 차있다. 정신면에서도 이들은 열성적이고 희망적이며 신념이 깃들어 있다. 이러한 긍정적 에너지는 마치 이들을 에워싸고 있는 에너지 장(場)이나 혹은 영기靈氣 와 같아서 주변에 있는 에너지 장을 충전시키거나 변화를 시킨다. 이들은 또한 보다 작은 긍정적 에너지를 끓어 들여 확장시킨다.”
부정어를 공감어로만 볼 수 있다면, 열등의 하향평준화를 벗어나 함께 하는 공감과 화합을 모색하는 공생의 삶을 이루어 갈 수 있습니다.
부정어를 공감어로 바꾸라
“경쟁을 멈추고 공생을 시작하라” 생태학자 최재천은 21세기 새로운 인간상으로 호모심비우스! 화이부동을 제시한다. 그는 ⟪호모 심비우스⟫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호모 사피엔스’라고 추켜세운다. ‘현명한 인류’라고 말이다. 나는 우리가 두뇌회전이 빠른, 똑똑한 동물이라는 점에는 동의하지만 현명하다는 데에는 결코 동의 할 수 없다. 우리가 진정 현명한 인류라면 스스로 자기 집을 불태우는 우는 범하지 말았어야 한다. 우리가 이 지구에 더 오래 살아남고 싶다면 나는 이제 우리가 호모 심비우스로 겸허하게 거듭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호모 심비우스는 동료 인간들은 물론 다른 생물 종들과도 밀접한 관계를 유지한다. 호모 심비우스의 개념은 환경적이기도 하지만 사회적이기도 하다. 호모 심비우스는 다른 생물들과 공존하기를 열망하는 한편 지구촌 모든 사람들과 함께 평화롭게 살기를 원한다.
호모심비우스(나는 이 개념을 공생을 뜻하는 ‘symbiasis'에서 착안하여 만들었는데, 이 단어는 ’함께with'라는 뜻의 고대 그리스어‘ ’sym'과 ‘삶living'라는 뜻의 ’biosis' 라는 말에 뿌리를 두고 있다)의 생물학적 기본은 생태학과 진화 생물학에 있지만 그 개념은 동양과 서양의 고대철학 모두에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일찍이 우리 인간을 ‘사회적 동물’이라 일컬었다.
논어論語 는 ‘화이부동 和而不同’ 즉 남과 사이좋게 지내지만 무턱대고 한 테 어울리지는 아니한다‘는 정신을 얘기한다. 공자가 말하기를 “군자는 화이부동 하지만 소인은 정반대로 한다”고 했다. ’호모 심비우스‘라는 새로운 호칭과 개념은 지난 세기말부터 새로운 세기는 물론 새로운 밀레니엄을 맞이하는 차원에서 내가 생각해 낸 것이다.(...) 그래서 나는 21세기 새로운 인간상으로 ’호모 심비우스‘를 제안한다.”
어떻게 들으셨습니까? “경쟁을 멈추고 공생을 시작하라” 좌우를 한 번 둘러보시겠습니까?
최재천 교수가 제안하는 21세기 인간상 ‘호모 심비우스’ 참으로 감동적이고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공생하는 인간상은 상상만 해도 용기를 주고 기쁨을 주는 살아있는 생생한 언어다. 이해의 지평이 열리는 공감 언어이다.
윤종록은 그의 책 ⟪이매지노베이션.Imaginnovation⟫에서 ‘창의적 상상력이 세상을 바꾼다’고 말하고 있다. 특히 유대인의 창조정신을 연구. 분석한 자료 중심에서 밝히고 있다. 그의 책 추천사를 쓴 이스라엘의 글로벌 엑셀런스 의장 헤츠키 아리엘리의 글이다.
“이스라엘은 전 세계 어느 국가보다도 혁신적이고 창의적인 경제를 선도하는 나라지만, 유대인이 태어날 때부터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것은 아닙니다.
비결이 무엇일까요?
오늘날 이스라엘이 건국이후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단시간에 창업국가 Start-up Nation 로서 성공적으로 자리매김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창의성은 정원 가꾸기와 비슷합니다. 정원 가꾸기의 목적은 독창적인 형태의 매력적이고 예쁜 꽃들을 키워내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원을 만드는 것입니다. 정원사는 그의 상상속에 존재하는 정원을 만들기 위해 정원의 토양을 관리하고, 꽃을 심고 아름답게 가꾸어야 합니다. 아이디어는 정원의 꽃과 같습니다. 또 우리는 아이디어라는 꽃을 가꾸는 정원사가 될 수 있는 잠재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창의성은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어느 누구도 창의성을 처음부터 갖고 태어나지는 않습니다. 반대로 창의성 없이 태어나는 사람도 없습니다. 창의성은 어느날 갑자기 머릿속에서 튀어 나오지 않습니다.
건강하고 비옥한 토양에서 자라는 꽃과 같이, 창의성은 환경과 노력을 통해서만 얻어지는 능력입니다. 창의성이 보장되고 상상 할 수 있는 환경에서만 창조적 아이디어가 나올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행복과 긍정적인 사고에서 시작됩니다. 행복은 유대인의 문화와 전통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탈무드」에도 나와 있듯이 행복은 유대문화의 핵심이며 유대인의 성공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행복은 창조적 아이디어가 자라고 성장할 수 있는 토양이며 행복이 없다면 창의적인 사고가 불가능합니다. 우울한 사람이 창의적이지 않다는 사실은 누구나 압니다. 행복은 동기가 자랄 수 있는 인큐베이터입니다. 행복이 우리 정원의 토양이라면 동기는 정원과 꽃에 에너지를 공급하는 태양과도 같습니다. 동기가 부족하다면 창조도 있을 수 없습니다. 동기는 열정을 유발하고, 열정은 행동과 성공을 가져옵니다.
행복은 창조적 아이디어가
자라고 성장할 수 있는 토양
어떤 일을 시작하는데 있어 추진하는 부류는 세 가지 형태로 나눌 수 있다. 처음부터 긍정하며 시작하는 사람이 있고 처음부터 의문하며 가능성을 갖고 시작하는 사람이 있다. 반면에 처음부터 부정 판단 내리고 움직이지 않는 유형도 있다. 독자 여러분은 어떤 유형의 인물인가요?
다시 윤종록 교수의 말을 직접 듣겠습니다. “과학기술은 혁신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그러나 지난 20년을 살펴보면 혁신의 추세가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이제 과학기술은 연구 개발보다도 상상력 imagnation에서 훨씬 큰 폭의 혁신이 이루어지는 예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1999년에 창업한 구글Geogle 은 불과 15년 만에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회사로 발돋움 했다.
구글은 노벨상을 받을 만큼의 어마어마한 기술을 만든 것이 아니다. 오로지 마흔이 넘은 한 여직원의 평범한 상상력만이 있었을 뿐이다. 성경구절을 쉽게 찾아내는 법을 연구하는 성경 색인학자였던 요엘 마르크는 이스라엘 연구소의 평범한 직원이었다.
그녀는 간단한 상상력을 제안했고 회사는 그것을 무시하지 않고 채택한 것뿐이다.(...) 열린 사고로 지식을 공유해야 한다. 만약 공동 지혜를 놓치면 현재 일어나고 있는 발전. 아이디어. 성과 창출의 기회를 놓치게 된다.
회사를 경영하는 경영진은 열린 사고를 하고 있을까? 그렇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직원들의 생각을 격려하기 보다는 그들의 의견에 부정적으로 대응하면서 자신감이 결여되게 만드는 경우가 허다하다. 경영자의 생각에는 직원의 답변이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지만 세상에 바보 같은 답이란 없다. 지금 당장 관련이 없어 보일수도 있지만, 경영자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에서 관련이 있을 수 있으므로 바보 같은 답변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콜게이트라는 치약회사가 있다. 콜게이트에서는 어떻게 하면 판매실적을 올릴 수 있을지 세미나도 하고 브레인스토밍도 했다.
디자인을 바꾸자. 행사를 늘리자. 광고를 바꾸자 등 다양한 의견이 나왔다. 콜게이트 회장은 모든 의견을 듣고는 이제까지 해오던 것과 다를 바 없는 아이디어라고 일갈했다. 모두 좋은 아이디어였지만, 그것만으로는 판매실적을 획기적으로 올리는 돌파구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러자 비서가 새로운 아이디어를 조직 밖에서 찾는 편이 낫지 않겠냐는 조언을 했다. 그 의견이 반영되어 전국적으로 아이디어 콘테스트가 열렸다. 그 결과 놀랍게도 수천 개의 아이디어 중 최고의 아이디어는 11살짜리 여자 아이가 낸 것이었다.
“치약 나오는 구멍을 크게 하면 돼요. 사람들이 한번 누를 때마다 치약이 좀 더 나오기 때문에 이전보다 더 많이 사용하게 되거든요.” 아이의 생각은 무척 창의적이다. 콜게이트는 아이의 생각을 받아들여 치약이 나오는 구멍을 좀 더 넓혀 판매실적을 많이 올릴 수 있었던 것은 회장이 열린 사고를 가지고 그 아이디어를 채택 하고 마켓팅에 접목을 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상자 안에서 늘 갇힌 사고를 하는 습관이 있기 때문에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떠올리지 못한다. 상자 밖에서 생각하는 습관을 들이면 창의적인 생각을 해낼 수 있고 좋은 해결책을 찾아 낼 수 있을 것이다. 경영자에게 필요한 것은 사원들에게 열린 마음으로 대하고 배우라는 의지다.
긍정적 사고는 어느 분야이든 절대적 사고체계로서 화합과 단합의 키워드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하게 간과해서는 안 될 문제가 하나 있다. 부정어를 자주 사용하는 사람과 부정적 사고의 틀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과의 관계설정이다.
나와는 조금 다른 견해를 가진 자 에게 적대적 관계로 단정 짓지 말고, 나와는 차이가 있을 뿐 또 다른 시선을 가진 자 라고 인정하면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순간이 온다. 새로운 시선은 균형이나 조화를 보게 하지요.
물론 부정적 습관과 피해의식에 묶여있는 자들은 바꿔지기 어렵다. 더욱이 자신의 생각과 주장도 없이 영혼 없는 3류 인간들은 더더욱 분별력이 없다. 이들에겐 가르치려고 하지 마세요. 설득하려고 가까이 다가가면 오히려 분위기만 싸늘해질 뿐입니다. 이해하면서 기다려 보세요.
나와 다른 견해는
적인가? 새로운 시선인가?
나의 친구 정교수 이야기이다. 한 달에 한두 번 정도 통화하고 1년에 2회 정도 함께 식사하는 친구이지요. 언제부턴가 그 친구의 언어사용법을 알았어요. 어떻게 지내느냐고 물으면 “죽겠다”고 한다. 남들은 총장하고 장관도 나가는데 자기 꼴이 이거 뭐냐는 것이다. “안교수 너는 어떻게 지내냐, 잘 지내지” 하면 나도 그냥 지낸다 하면서 그 친구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위로한답시고 “그럭저럭 지낸다” 하며 얼버무렸지요.
어느 해에 이르러서야 이 친구의 사고체계와 어투를 발견했어요. 그 이후부터는 “아주 잘 지낸다.” “ 요즘은 전국을 순회하면서 강의 여행 다니고 있다.” “얼마나 신나는지 모른다.”
이렇게 답을 하면 그 친구의 반응은 “힘 안드나 이 더운 8월 여름에 나 같으면 당장 때려 치겠다” 합니다. 그럴 때 마다 “요즘 KTX 실내온도가 최적이다.” “기차에서 먹는 도시락,커피는 먹어보지 못한 사람은 그 맛을 느낄 수가 없다.” “어린 시절 소풍 때 먹는 맛이라고 생각하면 돼. 그리고 4주 연속 풀 강의 하는 사람 나 외에 얼마나 있겠냐.?” “촌놈이 서울 와서 이 정도면 너무 큰 출세야 기적이지. 감사할 뿐이야.”
“그런데 나는 소읍 출신이지만, 너는 완전히 전기불도 안 들어온 깡촌 두메산골 촌놈 아니니?”
“나에 비하면 정교수 너는 두 배 출세 한 거지.” “너 있는 학교는 규모가 큰 대학 아닌가?”
“부모님께 감사해라.” “난 너라면 강의실 들어가고 나올 때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하고 꾸벅 인사 하겠다.” 한바탕 웃는다. 그러다 정교수가 하는 말이 걸작이다. “그렇지 우리 동네 생긴 이래 고등학교 나온 사람은 내가 최초였으니까,” “그리고 나는 유학파도 아닌데 학교에서 교수로 채용 해주는 것만 봐도 기적이지”
이렇게 그 친구의 언어가 바뀌기 시작하였다. 헤어질 때마다 “안교수 너만 만나면 힘이 난다.” “ 젊음이 따로 있냐” 지금은 낙관 주의자로 바뀌었습니다. 그 친구는 내가 의도적으로 대화를 이끌어 갔는지 지금도 모르고 있지요.
언어가 바뀌면 눈동자가 바뀐다. 가르치고 설명하고 지적하면 상대는 바뀌지 않는다. 변명부터 하려고 든다. 자녀들이나 아랫사람들은 주눅이 들거나, 하던 행동을 감춘다.
말처럼 흡수력과 전염성이 강한 도구는 없다. 스피치 파워는 긍정적이고 진취적인 화법자를 따라가게 되어 있다. 방향을 던져준 메시지는 울림이 커진다고 고백들 한다. 정치 연설도 나의 경험으로는 네거티브 전략보다 훨씬 큰 파급력은 파지티브 Positive 전략이라고 생각한다.
어느 공동체에서도 부정표현을 통해 불평을 유발시키고 분노를 자극하여 여론과 소문을 결집시키는 방법은 좋은 태도가 아니다. 부정적인 언어와 불손한 태도는 어느 분야 어떤 환경에서도 화목과 기쁨을 담아 내지 못한다.
잠시 신사의 품격, 숙녀의 품격에 대하여 생각을 해봅니다. 왜냐하면 요즘 40대만 하더라도 80% 가깝게 대학 공부를 하였습니다. 어학실력, 영화, 음악, 독서, 체력 등에서 지성적인 인프라를 갖추고 있다. 그럼에도 품격 있는 커뮤니케이션은 미성숙에 머무르고 있다. 요인은 품격 있는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차원 높은 인간의 능력 범주 안에 두지 않기 때문이다. 표현은 표정을 만든다. 표정 없는 이미지는 삭막한 모래밭이다.
지금은 휴먼커뮤니케이션의 시대, 말의 시대입니다. 말에는 힘이 있습니다. 말의 그릇에 여러분의 능력을 담으십시오. 언어는 그 사람의 비주얼입니다. 진실로 스펙 중에 스펙은 다양한 어휘력과 논리와 감성을 겸비한 표정 있는 커뮤니케이터입니다. 직장에서, 일터에서, 공동체에서 성공하고 싶다면 덕스런 말로 분위기를 이끌어 가십시오. 진실로 좋은 친구가 되어주고 싶다면 좋은 점만을 발견하는 좋은 눈을 가지십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