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호용 교수】 아자브(AJAB) 신학에서 아자바스(AJABAS) 운동으로

  • 입력 2024.04.29 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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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자브(AJAB) 신학과 요한 르네상스 (53)

 

 

다시 성령’(Again Spirit)의 새바람을 고대하며

1. 필자는 지난 20221031일 종교개혁 505주년에 겟세마네 신학교 교정(수원 향기나는나무교회 내)에서 아자브’(AJAB) 신학을 제창하였다. 아자브(AJAB) 신학은 개신교 신학의 본질인 다시 예수’(Again Jesus), ‘다시 성경’(Again Bible)이라는 종교개혁의 모토로 다시 돌아가자는 환원신학의 일환으로 시작한 것이다.

그러다가 2024년을 앞 둔 지난해 연말(20231229), 인천에 위치한 로이교회(윤사무엘 목사 시무)에서 아자브 신학이 단지 사변적인 지식 차원을 넘어 이제부터는 교회와 세상을 변화시키는 운동으로 차원으로 승화되어야 한다는 판단 아래 아자바스’(AJABAS) 운동을 전개하였다. 여기서 아자바스란 아자브(AJAB)다시 성령’(Agian Spirit)을 첨가한 말로서, 우리의 운동이 성령이 이끄는 운동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우리는 이 운동을 먼저 함께 모여 성경을 읽고 중보기도하는 호모 부커스’(Homo Bookus) 모임으로 시작하였다.

호모부커스, 조상연 저,  파지트
호모부커스, 조상연 저, 파지트

초대교회 운동이나 기독교회사의 다양한 운동을 보면, 거기에는 강력한 성령의 역사하심이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구약성경 에스겔서 37장에 보면 우리의 뼈들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37:11)는 말씀이 있다. 이는 바벨론 포로 이후의 이스라엘의 절망적 상황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 죽은 지 오래되어 마른 뼈가 굴러다니는 비참한 상황에서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는 말씀을 들려주셨다. 여기서 말하는 생기는 원어로 루아흐’(רוּחַ)로써 신약으로 말하면 프뉴마(πνευμα), 즉 성령의 바람을 일컫는다. 겨우내 죽은 것처럼 지내던 만물들이 봄바람과 더불어 다시 소생하듯이, 하나님의 생기인 성령의 새 바람으로 인해 이스라엘 민족은 다시 소생하는 기적을 맛보게 될 것이다.

아자바스’(AJABAS) 운동멤버
아자바스’(AJABAS) 운동멤버

지난 3년여 동안의 코로나 정국은 인류의 재앙이라고 할 정도로 엄청난 희생을 가져왔다. 그 재앙 가운데서 살아남은 자도 영과 육이 황폐할 정도로 피폐해졌다. 또한 기후 온난화로 인한 자연 재앙이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다. 거기에 더하여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이스라엘-하마스 전쟁까지 겹쳐 경제적 불황이 가중되었다. 이는 교회에도 그 영향을 미쳐 많은 교회들이 문을 닫는 사태까지 이르렀다. 살려달라는 사람들의 아우성 소리가 땅을 진동시키고 하늘을 찌를 것 같은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에 처해 있다. 이 난국을 누가 타개할 것이며, 어떻게 해쳐 나가야 할 것인가?

바벨탑 사건(11)에서 보듯이, 인간의 오만이 하늘에 닿았을 때 하나님은 바벨탑을 무너뜨렸다. 그리고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기 위해 아브라함을 부르셨다. 이는 모든 것을 원점에서 다시 시작하라는 사인이 아닌가.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공생애 제일성이 회개하라였다. ‘회개에 해당하는 헬라어 원어 메타노이아’(μεταάνοια)는 방향을 바꾸라는 뜻과 더불어 이전에 왕 삼은 것을 내려놓고 새 왕이신 하나님(예수 그리스도)를 왕 삼으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이제 온 인류는 다시 성삼위 하나님을 왕 삼고, 그분께 방향을 돌려 그분이 말씀하시는 세미한 음성을 들어야 할 때이다. 나아가 지금은 강력한 성령의 능력(권능)을 힘입어야 할 때이다.

신구약성경은 강력한 성령의 권능을 증언하고 있다. 창조 시에 하나님의 영(루아흐)이 혼돈으로 상징되는 수면 위에 운행하셨다(1:2)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니까 성령의 권능으로 만물이 창조되었다. 성령은 인간을 만드실 때도 역사하셨다(2:7). 성막의 일꾼으로 부르심을 입은 브살렐은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충만하게 임하므로 지혜와 총명과 지식으로 여러 가지 일을 하게 되었다(35:31).

모세가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자 그에게 지혜의 영이 충만하게 임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으로 이끌었다(34:9). 여호와의 영이 옷니엘에게 임하자 그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어 메소포타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을 이기고 이스라엘에게 평안을 가져다주었다(3:10). 사울에게 여호와의 영이 크게 임하면 그가 예언을 하고 변하여 새 사람이 될 것을 말씀하셨다(삼상 10:6). 그런데 사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자 여호와의 영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게서 부리시는 악령이 그를 번뇌케 하였다(삼상 16:14). 반면에 사무엘이 기름 뿔병을 가져다가 다윗에게 붓자 그가 여호와의 영에 크게 감동되어 장차 사울을 대신하여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삼상 16:13).

갈대아 땅 그발 강 가 포로민 가운데 있던 제사장 에스겔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고 여호와의 권능이 그에게 임하자 그가 예언자가 되었다(1:3). 그는 하나님께서 바벨론 포로민들에게 행하실 소망의 메시지를 전했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준 땅에서 너희가 거주하면서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36:26-28). 또한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에스겔에게 임하고 그의 영으로 그를 데리고 가서 마른 뼈 골짜기 가운데 두자 그가 마른 뼈들이 살아나리라는 하나님 말씀을 대언하였다(37:1-14).

또한 선지자 요엘은 메시아 시대에 임할 성령의 임재를 이렇게 예언하였다.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변하려니와/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2:28-32).

이 같은 선지자 요엘의 예언이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임하므로 성취되었다.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2:1-4). 이때 성령 충만을 입은 베드로는 학문 없는 범인이지만 놀라운 설교를 했고, 성전 미문에 앉아 있는 앉은뱅이를 고치는 놀라운 권능을 행하였으며, 공회원들 앞에서 담대히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했다(2-4).

또한 예수 믿는 자를 박해하려던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 앞을 보지 못하다가 아나니아에게 안수를 받자 성령의 충만을 입었다(9). 그 후 바울은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교사가 되었다. 바울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고자 했으나 그 길을 막으시고 오늘날 유럽에 해당하는 마케도냐 사람의 요청을 받고 마케도냐로 향한 것도 성령이셨다(16:1-10).

사도행전의 주제인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1:8)는 말씀처럼 사도행전은 성령께서 주도하여 이끌어가신 성령행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역은 성령의 주도로 행해져야 강력한 권능과 더불어 올바르게 사역할 수 있음을 엿보게 된다.

 

2. 초대교회는 성령을 삼위일체의 한 위격으로 고백했지만 교회사에서 성령은 성부와 성자보다 정당한 관심과 대접을 받지 못했다. 성령을 중심으로 교회를 재구성하려는 일체의 노력은 오랫동안 교회에서 미운 오리새끼취급을 받았다. 하지만 그런 시대는 지나갔고 그야말로 이제는 성령의 시대다.

성령의 주도적 역사 속에 교회가 탄생했지만 초기에 경험했던 성령의 역동성은 빠르게 약화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몬타누스(Montanus)는 이제 성부 외 성자의 시대는 지나고 성령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주장했다. 그들의 열정적인 신앙과 엄격한 도덕적 삶이 많은 사람들에게 큰 도전과 자극이 되었지만, 자신들만 성령과 계시를 독점했다고 주장하며, 말씀보다 황홀경 속의 예언을 더 중시했기에 교회를 큰 혼란에 빠뜨렸다. 결국 교회에서 성령운동은 의혹과 감시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12세기에 활동했던 시토회 소속의 피오레 요아킴(Joachim of Fiore)로 인해 주변으로 밀려났던 성령에 대한 관심이 다시 교회사의 수면으로 부상했다. 뛰어난 영성과 요한계시록 연구로 명성을 얻은 그는 인류 역사를 성부시대, 성자시대, 성령시대로 구분하고, 1260년에 성령시대가 시작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의 사상은 신곡의 작가 단테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그는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반대를 받았고, 교황들에 의해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이처럼 초대와 중세에 성령운동은 교회의 제도화나 형식화에 대한 도전으로 출현했고, 특히 종말론과관련되었으나 기존 교회의 깅력한 비판 속에 억제되었다.

서방교회의 전통을 이어받은 종교개혁자들은 성령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았으나 그들의 주된 관심은 성자 예수에게 집중되었다. 마르틴 루터는 성령을 말씀을 깨닫는 영으로 이해했고, 칼뱅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구원의 근본이며, 이 연합을 성령의 역사라고 보았다. 그리하여 칭의(justification)그리스도의 의에 의해, 성화(sanctification)그리스도의 영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주장하였다.

종교개혁자 중에서 비교적 성령에 대해 많은 관심을 보인 사람들은 재세례파’(Anabaptist)였다. 특히 한스 후트(Hans Hut)와 한스 뎅크(Hans Denck) 같은 이들은 성경과 함께 성령의 계시도 강조했고, 그리스도의 임박한 재림을 열정적으로 선포했다. 그러나 중세의 성령운동가들처럼 이들도 성령의 직통계시와 종말신앙을 강조했기 때문에 기성교회의 혹독한 박해를 피할 수 없었다.

17세기의 독일 경건주의와 영국 청교도 운동이 출현하면서 교회사에서 성령에 대한 관심이 급증했다. 경건주의는 독일 교회가 종교 개혁의 동력을 상실하고 교조주의로 빠르게 퇴락하는 것에 대한 비판적 반성에서 기원했다. 청교도 운동은 영국 국교회가 가톨릭교회의 잔재를 일소하지 않음으로써 종교개혁의 정신을 온전히 구현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도전으로 출현했다. 두 운동은 칭의 대신 중생을 선호하며, 인간이 내적 변화를 추구했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성령을 더욱 의지하고 강조하게 되었다. 경건주의는 18세기 영국에서 존 웨슬레(John Wesley) 목사에 의해, 청교도운동은 18세기 미국에서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목사에 의해 각각 절정에 달했다.

19세기에 이르면, 미국에서 성령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먼저, 1800년에 미국에서 제2차 대각성운동이 일어났고, 켄터키 주 케인릿지(Gane Ridge)에서 열린 부흥회에서 강력한 성령의 임재가 있었다. 감리교 목사 존 맥기(John McGee)가 열정적으로 설교할 때 집회에 참석했던 사람들이 거룩한 광란’(godly hysteria)에 빠졌다.

1830년대에는 찰스 피니(Charles G. Finney)를 중심으로 개혁주의 진영에서, 동시에 피비 파머(Phibe Palmer)를 중심으로 웨슬리안 진영에서 성령운동이 일어났다. 피니와 팔머는 모두 성령세례를 강조했고, 성령세례의 내용으로 성결(성화)를 강조했다. 이 운동을 성결운동(the Holiness Movement)이라고 부른다. 특히 성령세례를 강조했던 피니의 부흥운동은 당시 미국 사회의 영적 각성뿐 아니라 노예제 폐지운동과 여성운동 같은 중요한 사회개혁운동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 외에도 20세기 초반 아주사거리 부흥운동, 1940년대 신유운동, 늦은비 운동, 1960년대 신오순절운동 혹은 은사주의운동, 1990년대 이후 빈야드운동, 그리고 21세기 교회성장학자 피터 와그너(Peter Wogner)와 존 켈리(John Kelly)2의 사도시대가 2001년에 시작되었다고 천명함으로써 소위 신사도운동’(New Apostolic Movement)이 공식적으로 탄생했다.

한편, 19세기 말에 한국에 복음을 전한 미국 선교사들은 당시 미국에서 절정에 달하던 종말론, 선교운동, 그리고 성결운동이 결합된 독특한 형태의 성령운동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다. 20세기 초반에 영국, 미국, 인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 성령운동이 이들에게 간접적 영향을 끼치면서, 1903년에 원산에서 부흥운동이 발생했고, 그것의 연장선에서 1907년 길선주 목사를 중심으로 평양대부흥운동이 일어났다. 이 운동은 거대한 회개와 전도운동으로 표출되었고, 한국교회의 체질을 성령 중심으로 재구성했다. 그 결과, 평양 대부흥운동을 직접 체험했던 선교사 노블(W.A. Noble)은 이것을 사도행전 이후 가장 강력한 성령의 역사라고 평가했다.

일제강점기였던 1920년대 말에는 한국교회에 신비주의적 성령운동이 자생적으로 강력하게 발생했다. 원산에서 이용도, 백남주, 유명화를 중심으로, 철산에선 김성도가 주축이 되어, 입신과 방언 등의 신비 체험이 강하고 빈번하게 발생했다. 이런 현상은 당시 교회의 심각한 오해와 우려를 촉발하며, 혹독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1940년대부터 용문산 기도원의 나운몽 장로가 입신, 방언, 신유 등을 중심으로 성령운동을 이끌었고, 1950년대에는 박태선 장로가 이런 흐름에 합세했으며, 1960년대부터 조용기 목사가 성령운동을 주도했다. 한편, 1980년대에는 온누리교회가 구도자예배와 성령운동을 결합하여 성령운동의 새로운 장을 열었고, 1965년에 태백에 세워진 예수원은 수도원운동, 토지개혁, 성령운동을 결합한 수도원공동체를 실험했다.

교회 역사속에 진행되어 온

성령운동의 흐름

 

3. 여기서 ‘Acts 29’를 외치며 성령의 사람으로, ‘성령 목회를 했던 한 사람을 소개하고자 한다. 그는 사도행전적 교회를 꿈꾸며 온누리교회를 설립한 하용조(1946-2011) 목사다. 그는 2003년에 성령님에 관한 설교집 바람처럼 불처럼2007년에 인격적인 성령님이란 제목으로 개정해서 출간했다.

 

그 서문에서 시로 쓴 하용조 목사의 성령론을 보도록 하자.

성령님이란 말은 우리의 심장을 뛰게 하고/ 우리의 눈에 눈물을 만들고/ 우리의 가슴을 감동으로 젖게 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사모할 만한 아름다운 이름이 있다면/ ‘예수님의 이름이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역이 있다면/ ‘성령님의 사역이다.

성령님에 대해 설교한 것을 책으로 만들게 된 것은/ 말씀의 완성도가 높기 때문이 아니라/ 너무나 성령님을 사모하기 때문이다.

오순절날 성령님이 바람처럼 오셨고 불처럼 오셨다./ 그리고 사람들 안으로 들어오셔서/ 충만하게 임재하시기 시작했다.

람들은 그 순간부터 변하기 시작했다./ 얼굴 표정이 달라지고, 생각이 달라지고,/ 언어가 달라지고, 행동이 달라졌다.

바람은 공간에 임한다./ 불은 사람에게 임한다.

오순절의 사람들은 성령 충만을 경험하기 시작했다./ 그렇다. 이 책을 읽는 모든 사람들도/ 오순절의 동일한 성령님의 임재를 경험하기를 기도한다.

하용조 목사는 교회는 성령님이 이끌어 가야 한다는 전제하에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금까지 목회를 하면서 깨달은 진리 가운데 하나는, 교회는 성령님이 이끌어 가야 한다는 것이다. 성령님이 움직이시는 교회가 성경적이다. 성령님을 최우선 순위로 생각하는 곳이 교회라는 말이다.”

그러면서 그는 지식이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고, 기술이 사란을 변화시키는 것도 아니며, 성령님이 사람을 변화시킨다고 강조하고 있다. 심지어 목사가 설교를 잘한다고 사람이 변화시키는 것도 아니라고 했다. 그가 전하는 말씀에 성령님이 있으면 사람이 변하고, 성령님이 없으면 변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설교를 할 때 성령님을 앞세워야 한다. 심방을 할 때도 성령님을 앞세워야 한다. 성령님이 역사하시지 않으면 백날 심방을 다녀도 그 집은 안 변한다. 그러나 성령님이 역사하시면 그날로 그 집이 변한다. 이 비밀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하고 반문한다. 많은 목회자들이 성령님에 대해 민감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성령님을 믿지 않는 목회자는 없지만, 많은 이들이 성령님을 모시지 않고 자신의 힘을 앞세워 설교하고 교회를 운영하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성령님의 역사는 오심으로 시작되었다. 하용조 목사는 신구약성경 곳곳에서 사역하시는 성령님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은 곳곳에서 성령님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실제로 그 일을 담당하신 분은 성령님이셨다. 태초에 성령님은 수면에 운행하셨고 인간을 만드실 때에도 역사하셨다. 또한 성령님은 성경을 기록하게 하셨으며, 구약 시대의 여러 사건들 속에서 일하셨다. ... 성령님의 역사는 신약 시대에도 계속되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잉태되었으며, 예수님이 사역을 시작하실 때에는 성령님이 비둘기처럼 임하셨다. 그리고 성령님의 기름 부으심이 있고 나서부터 예수님이 능력이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그 성령님이 이천 년이 지난 지금 우리들 안에도 여전히 역사하고 계신다고 선언함으로써 사도행전 28정 이후 성령님의 역사가 21세기 한국교회와 온누리교회를 통해 일어나고 있음을 상기시키고 있다.

우리는 한국개신교선교 140주년이라는 뜻깊은 역사적 시점에 서 있다. 이에 우리는 한국교회의 새로운 부흥과 세계복음화를 위해 지난날 한반도에 불어닥쳤던 강력한 성령의 바람이 다시 한 번 휘몰아쳐 오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구하옵나니 불길 같은 성령이여,

다시 한 번 한국교회에 뜨겁게 임하소서!

구하옵나니 태풍 같은 성령이여,

다시 한 번 한국 민족에 강하게 임하소서!

아자바스운동이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손에는 성경을, 또 한손에는 성령을 붙잡고 신학과 선교를 선도하는 거룩한 도구로 쓰임받기를 두 손 모아 빈다. 그동안 참으로 부족한 사람의 글을 읽어주신 모든 독자 제위께 심심한 감사의 인사를 전하는 것으로 이 글을 마감한다. 모든 영광 하나님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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