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하나님의 의’에서 ‘하나님의 나라’로(주어 바꾸기 운동)
‘천동설’(天動說)에서 ‘지동설’(地動說)로의 과학적 패러다임의 변환(paradigm shift)처럼, 종교개혁은 ‘복음(예수와 성경)의 재발견’으로서의 패러다임의 변환이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바울 복음’에 기초한 ‘로마서의 재발견’이었다. 종교개혁 505주년을 맞이한 오늘의 시점에서 필자는 바울 복음보다 더 근원적인(Ad fontes!) ‘예수 복음’에 기초한 ‘요한복음서의 재발견’을 말하고자 한다.
종교개혁운동은 무엇보다도 성경과 씨름하는 학문적 노력으로부터 결실한 것이다. 이는 성경 연구의 중요성을 말하는 것이다. 루터 연구의 권위자인 발터 폰 뢰베니히는 이렇게 말했다. “종교개혁은 환상이나 비합리적 경험으로부터 자란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학문적 노력으로부터 자라난 것이다. 루터는 본문을 철저히 조사하고 그리하여 분명한 모순을 인식했다”(W. von Loewenich, 박호용 역, 『마르틴 루터』, 123-124).
루터의 바울 복음의 재발견은 ‘하나님의 의’의 재발견으로 나타났다. 그것은 중세 가톨릭교회(스콜라신학)가 가지고 있던 인간(나) 주어를 하나님(예수 그리스도)으로의 주어바꾸기(교체) 운동이었다. “하나님으로 하나님 되게 하라!” 이것이 종교개혁의 핵심 모토였다. 루터의 종교개혁의 핵심 주제인 이신칭의(以信稱義)는 ‘하나님의 의’(롬 1:17)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 가톨릭교회가 주장하는 인간을 주어로 하는 ‘능동의 의’(active righteousness, 인간의 공로가 포함된 의)를 하나님을 주어로 하는 ‘수동의 의’(passive righteousness,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의)로의 주어교체운동(갈 2:20)이었다.
그런데 종교개혁 500여 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러 바울 복음에서 보다 더 근원(Ad fontes!)인 예수 복음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이는 바울신학의 핵심인 ‘하나님의 의’에서 예수 선포의 핵심인 ‘하나님의 나라’(막 1:15; 마 3:2; 요 3:3,5; 18:36)로의 강조점의 변화를 의미한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나라’의 의미는 ‘하나님이 왕이 되어 다스리는 나라’(하나님의 주권, 지배, 통치)를 의미한다(시 68:24; 103:19). 이를 위해 하나님이 인간 세상으로 찾아오신다(요 1:14). 따라서 ‘회개’란 내가 왕 삼았던 것(막 10:17-31; 마 19:16-30; 눅 18:18-30)을 내려놓고, 그 자리에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는 것’(왕의 교체)을 의미한다.
이는 동양에서 소위 ‘천당(天堂)’ 개념, 즉 인간이 그 어딘가에 있을 장소를 ‘찾아가는’ 의미와는 전혀 다른 의미이다. 즉 하나님 나라(천국)란 인간이 주어가 되어 ‘내가 찾아가는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어가 되어 ‘하나님(예수님, 성령님)이 찾아오시는 나라’이다. ‘하나님의 의’가 ‘능동의 의’가 아닌 ‘수동의 의’인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 또한 ‘능동의 나라’가 아닌 ‘수동의 나라’이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다시 말하기, 즉 ‘내가 가는 나라’에서 ‘하나님이 오는 나라’로의 주어 바꾸기(주어의 교체), 즉 ‘회개 운동’이 바로 아자브 운동이다.
B. ‘십자가 신학’에서 ‘부활의 신학’으로!(신학 바꾸기)
루터의 종교개혁운동은 중세 가톨릭 교회의 빗나간 신학과 논쟁하기 위해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성교회 정문에 <95개조 논제>를 붙이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중세 가톨릭 신학이 ‘교황과 교회의 영광’이라는 인본주의적 ‘영광의 신학’(Theologia gloriae)을 주장한 데 반해, 루터는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의 신학’이라는 신본주의적 ‘십자가 신학’(Theologia crucis)을 주장하였다. 그에 따라 지난 500년 동안 개혁교회는 루터가 주장한 십자가 신학을 강조하였다.
그러다보니 또 하나의 복음인 ‘부활의 신학’(Theology of resurrection)이 갖는 복음(부활)의 능력을 상실하였다. 부활 복음의 능력이란 크리스천의 3대 적(사탄과 죽음과 세상)을 이가는 힘을 말한다. 이에 대해 요한복음서는 ‘부활의 신학’(요 11:25-26)을 통해 예수께서 명령하신 제자의 길(요 21:15-18)로서의 십자가의 길을 잘 말해주고 있다. 예수의 길은 ‘십자기-부활의 구조’이지만, 제자의 길(제자도)은 ‘부활-십자가의 구조’라는 점을 다시 말함으로써 사탄과 죽음과 세상에 져서 위기에 처한 그리스도인과 교회를 다시 살리는 길을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 ‘부활의 복음’의 중요성은 주님께서 부탁하신 제자도에 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막 8:34; 마 16:24). 제자도의 측면에서 보면 ‘부활의 신학’은 ‘십자가 신학’의 전제가 된다(요 16:33). 예수의 제자들은 모두 십자가 앞에서 예수님을 버리고 다 도망갔다. 이는 그들에게 죽음의 강을 넘어선 부활 체험(부활 신앙)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을 다시 만나고(요 20장), 성령강림 사건을 체험한 후에(행 2장) 그들은 모두 참 제자의 길을 갔다. 그들은 모두 주님과 교회를 위해 순교로 헌신했다. 이는 바울 사도에게도 마찬가지이다. 바울은 주님을 만나기 전 구약성경에 기초한 말씀, 즉 나무에 달린 자는 저주받은 자(신 21:23)라는 율법에 기초하여 예수님을 메시아 그리스도로 받아들인 수 없었다. 그런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행 9:1-19) 십자가의 비밀을 깨닫게 된 것이다.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행 9:17-18).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다시 보게 되었다’는 대목이다. see again이 되면 born again이 된다. encounter again, find again(εὑρήκα, 유레카). 그는 변하여 새사람이 되었고, 부활의 증인으로서 일생을 이방인의 사도로 헌신하였다.
C. P=BJ2 (기준 바꾸기)
지난 20세기 최고의 과학혁명공식은 아인슈타인(1886-1975)의 E=mc2 (에너지는 질량과 빛의 속도의 제곱에 의해 그 힘이 결정된다)이다. 핵폭탄 제조의 기본 공식이 된 E=mc2 공식은 그 의도와 상관없이 인류에게 <죽음과 파괴 공식>이 되었다. 필자는 21세기 신학혁명공식(하나님의 공식)으로 P=BJ2 공식을 말하고자 한다. P=BJ2(P는 Power or Peace, B는 Bible, J2은 Jesus in John). P=BJ2 공식은 <생명과 평화 공식>이다. 이 공식은 능력(power, 롬 1:16) 또는 평화(peace, 요 14:27)는 요한복음에 나타난 예수에다가 신구약성경 66권이 곱해질 때 나타나는데, 그 힘(평화)은 이 세상 그 어떤 것과도 비교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힘, 성경 말씀의 힘을 다시 찾는다.
“왜 다시 예수, 다시 성경인가?” 예수와 성경만이 영원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는 영원하신 분이다(요 1:1-3; 20:28-31). 예수 그리스도는 역사를 바꾼 분으로, 역사(BC와 AD)의 중심이자 성경의 중심(요 5:39)이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우리가 먹어야 할 영원한 책이다(사 40:8; 신 8:3; 겔 3:3). 하나님의 영감으로 쓰인(딤후 3:16) 신구약성경은 세계를 바꾼 책으로,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풍성한 삶)을 얻는다(행 16:31; 요 10:10)는 하나님의 복을 말하는 책이다. 또한 예수와 성경보다 세상을 이기는 더 큰 힘(power)이 없으며, 참된 평화(peace)를 가져오는 것은 없다. 따라서 예수와 성경은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비교가 불가하다.
성경 66권 전체는 1,189장(구약 929장, 신약 260장), 31,102절(구약 23,145절, 신약 7,957절)인데, 이 가운데 한 구절, 즉 요한복음 3장 16절을 ‘복음 중의 복음’이라고 말한다. 왜 그런가? 그것은 “기준바꾸기”, 즉 이 세상의 모든 기준을 다 폐하고, 이제부터 예수 그리스도(=성경 말씀, 1:1,14)를 기준으로 하자는 것이다. 예수(말씀) 혁명! 이보다 더한 혁명은 이 세상에 없다(끝, 요 19:30). 예수(말씀) 충격!! 요한복음서가 ‘천하제일지서’인 까닭이 여기에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