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명철 목사】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 (14)

  • 입력 2024.04.30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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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더 루터의 이 세상의 친구들 나를 버려도는 곰곰이 생각하고 반추할수록 진솔한 고백이다. 좋은 친구도 이런 저런 이유로 멀어진다. 끝까지 자신과 함께 할 친구는 사실 없다. 우정과 연관된 감동적인 얘기와 실화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실제 인간의 우정은 궁극적으로 신뢰할 만큼 값어치가 약하다. 폐일언하고 진실한 친구는 예수뿐이다. 천지와 인심이 변하고 홀로인 날 버리지 않고 끝까지 함께 할 친구는 예수뿐임이 얼마나 큰 위로인가!

오래 사귀어 친함이 무르익고 얽혀도 편함이 유지됨은 친구이기 때문에 그렇다. 함께 하면 괜히 즐겁고 떨어지면 햇살 끝의 그림자처럼 그리움이 곳곳에 스며든다. 주고받음이 자연스럽고 형제자매 같은 동질감에 고락을 같이 하며 공유할 추억이 삶의 가장자리에 머문다. 소식이 뜸해지면 기억조차 희미해지고 유명을 달리 하면 관계는 정지화면이 되어버린다. 있는 듯 없는 듯 배우자의 그늘을 처마삼아 남은 인생이나마 고이 접어감이 지혜다.

일흔 고개를 넘고 보니 지난 세월은 아득하고 미지의 남은 시간이 광막한 우주처럼 날 뒤덮는다. 두뇌의 이상은 오색이 영롱하고 칠색 무지개를 넘어선다. 지혜는 진주처럼 영롱하고 학습 열기는 숙성된 장맛처럼 깊고 그윽하다. 생각함이 즐겁고 글로 조각되는 언어의 형상이 경이롭다. 영의 활동량은 오히려 증가하고 후패한 몸이 결을 맞추느라 고생이 심해 미안하다. 물길이 바뀌어도 흐르는 물은 변함없어 엘리사를 기다리는 엘리야의 겉옷이다.

깊은 밤의 신음하는 탄식 속에 영근 기도 언어가 허공을 휘감고 돌더니 보좌로 직행이다. 아침 기도 후 자리를 잡으니 진종일 각성의 메시지가 가슴을 때린다. 성경을 뒤적이며 자판을 두드리니 68825이다. “부흥을 원하느냐?” “, 주님!” 문답이 있자 던져진 메시지이다. 여섯 개의 통회 자복과 여덟 개의 진단과 여덟 개의 권면과 25개의 명령이다. 길다. 처음부터 끝까지 들을 자 누구겠는가? 부흥의 길이 주어졌어도 닿기는 심히 어렵다.

홀로 가슴 치며 울부짖는다. 통회하고 자복한다. 성경에서 바라본 10건의 통회 자복을 매일같이 묵상하며 말씀을 반복적으로 묵상한다. 머리에 기억하고 생각으로 저장한다. 심비에 새기고 영혼에 각인시킨다. 아직도 때는 무르익지 않았다. 아론과 훌의 협력, 다윗과 요나단의 조합, 예후와 요나답의 악수, 두 선지자의 동역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낙심은 내게 속한 것이 아니다. 여전히 부흥의 날을 사모하며 부흥의 노래를 부르며 부흥의 기도에 젖는다.

모두가 능력을 원하지만 능력이 주어지기까지의 과정을 중시하지 않는다. 지혜를 구하지만 지혜에 이르는 길을 탐탁히 여기지 않는다. 축복을 갈망하지만 축복의 원리를 가르쳐도 짧은 주문 같은 비결만 원하지 정확하고 세밀한 외길 걷기를 주저한다. 결국 절실한 소원을 가졌으면서도 실제로 거절하는 온통 아이러니 판이다. 능력이, 지혜가, 축복이 그렇게 쉽게 획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부흥이 더딘 것은 결국 인간의 미흡한 준비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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