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신배 박사】 많은 글과 논문으로 한국 교회에 업적을 남긴 노블 선교사

  • 입력 2024.08.15 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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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신배 교수의 구약 이야기 (378) - 구약성경과 선교이야기 (190)

박신배 교수 / 연세대 구약학 박사, 현 강서대 교수, 창조문학 편집위원, 한국 평화학회 전 부회장, 한국 구약학회 전 부회장, 강서대 전 총장
박신배 교수 / 연세대 구약학 박사, 현 강서대 교수, 창조문학 편집위원, 한국 평화학회 전 부회장, 한국 구약학회 전 부회장, 강서대 전 총장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시어(쉐라흐 오레카 와아미테카 헴마)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거룩한 산과 주께서 계시는 곳에 이르게 하소서(예비우니 엘 하르 카드쉐카 웨엘 미스케노테이카)”(43:3).

세계 경제가 안 좋고 경기는 바닥을 치고 있다. 나스닥 증권의 주식이 폭락하면서 한국의 서킷 브레이커(조건에 맞는 상황이 오면 일정시간 동안 주식 시장 거래를 전면 중단하는 제도)가 발동하고 있다. 날씨는 기상 기온으로 열대야 현상과 폭염으로 사람들은 더위에 너무도 힘들어하는 시절을 보낸다. 우리는 이러한 어려운 때에 하나님의 말씀에 귀기울이며 그 분에게 소망을 두고 살아가려 한다. “그런즉 내가 하나님의 제단에 나아가 나의 큰 기쁨의 하나님께 이르리이다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웨오데카 베키노르 엘로힘 엘로하이)”(43:4). 시편 기자는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도 믿음을 가지고 주께 나아가며 주의 진리와 주의 빛을 보내시는 분께 소망을 가지고 굳게 나아가서 주의 거룩한 산과 주께서 계시는 곳에 이르게 해달라고 간구한다(시편43:3).

시편 43편에서는 거룩한 산, 시온 예루살렘 산을 암시한다. 이 산은 바로 하나님이 거하시는 산이며 하나님이 임하는 성전산이다. 이 성산에서 구약제사와 예배가 이뤄진다. 시편 24, 42, 48, 84, 118편에서, 성전에서 제의 절차가 진행되는 과정을 지시하고 있다. ‘주의 거룩한 산과 주께서 계시는 곳에 이르게 해달라고 고백하는 시인은 바로 이 성전 제의를 염두해 두고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인 하나님의 제단에서 하나님을 만나려 한다. 거기서 속죄제, 희생제사, 화목제물을 드리며 또 번제 기름의 제사, 자원제, 전제 등을 드림으로써 하나님께 예배드리겠다고 한다. “내가 하나님의 제단에 나아가 나의 큰 기쁨의 하나님께 이르리이다(웨아보아 엘 미즈바흐 엘로힘 엘 엘 세메하트 길리)”(43:4)고 시인은 고백하고 있다. 국가 탄식시편인 시편 42-43편은 9-10편과 13, 31, 35, 55, 56, 59, 69, 94, 102, 109, 142편 등과 함께 일인칭 시편(I-시편)으로서 아주 개인적이지만 국가(회중)시편의 실제가 들어있다. 이 그룹의 시편들은 일반적으로 적이 이미 땅과 백성을 위협하고, 그로 말미암아 국가에 가져온 질병과 재난을 묘사하고 있다(44; 74; 89).

하나님이여 나를 판단하시되 경건하지 아니한 나라에 대하여 내 송사를 변호하시며(샤프테니 엘로힘 웨리바 리비 미고이) 간사하고 불의한 자에게서 나를 건지소서(로 하시드 메이쉬 미르마 웨아웨라 테팔레테니)”(43:1). 이 시편은 성전과 제사에 대한 언급속에 성전 제의를 통해 고통과 위협을 해소시키고자 하는 시인의 호소를 보게 된다. 우리는 시편 42-43편의 땅끝에서 부르짖는 기도를 듣게 된다. 요르단 땅과 헐몬 산에서 부르짖는 소리를 듣게 된다. 이 시편에서는 왕의 고백과 기도를 보게 되며 성전에 오르는 야웨를 보며 또 야웨 성전에 오르는 왕의 제사와 제의를 보게 된다. 특히 시인을 통해 전시(戰時)에 간구하는 야웨 성전 제의를 보게 된다(61; 120). “주는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이시거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키 아타 엘로헤 마우지 라마 제나흐타니)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억압으로 말미암아 슬프게 다니나이까(라마 코데르 에트하레크 베라하츠 오예브”(43:2). 탄식의 상황을 개인적으로 표현하지만 이는 이스라엘 전체의 고백으로서 대적자들과 원수의 핍박을 말하며, 공격하는 적들에 대한 탄식의 간구를 하고 있다. 이 경건한 왕의 시편은 개인의 고백으로 나가지만 하나님과 개인의 경건한 관계가 제의에서 사용될 때, 개인에게서 회중의 차원으로 나아가 개인의 경건의 고백이 제의적 회중에게 같이 사용되어 공동체와 개인 시편으로서 그 의미가 같이 사용되며 종교적 절정을 보여준다(51, 23, 42-43). 이 성전 시편은 하나님께 간구의 응답으로서 그 여호와의 집에 대한 열심을 보여준다(6, 22, 23, 26, 51, 69, 73편 등).

결국 시인은 결국 수금으로 하나님께 찬양하겠다고 고백한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마 티쉬토하히 나프쉬 우마 테헤미 알라이)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호히리 레로힘 키 오드 오데누 예슈오트 파나이 웨로하이)”(43:5). 시편은 영혼의 해부학으로서 영혼의 문제 해결은 바로 하나님을 만나서 해결 받는 길을 제시한다. 하나님께 소망을 둔 사람만이 그 분의 해결을 받고 인생의 문제를 풀 수 있는 방법임을 알게 된다. 이 시편 43편은 바로 그 해결책을 알고 있으며 시인은 하나님을 만나는 방법과 기쁨과 소망을 말한다. 시인은 희망을 그 분께 두며, 찬양하며 해결 받겠다는 의지를 더욱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 시편 기자는 간사하고 불의한 자에서 구원받고 원수의 억압을 해소하고 벗어나는 길을 가르쳐 주고 있다. 이 시편에서 송사와 불안함, 낙심에서 벗어나며, 경건하지 않는 나라에서 해방되는 길을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시편 세계처럼 하나님 안에서 성공하고 승리하는 인생의 길을 살아간 분이 계시다.

노블 선교사(W. Arthur Noble, 1866-1945, 노보을(魯普乙))는 미국 펜실베니아 주 스프링 데일 출신으로 1889년 와이오밍 신학교를 거쳐 드류 신학교를 졸업하고 매티 윌콕스와 결혼한다. 그 후에 노보을은 189210월 한국에 선교사로 들어온다. 그는 홀(W.J.Hall) 선교사의 권유로 선교사로 파송 받아 배재 학당 교사로 사역을 한다. 노보을 선교사는 배재에서 3년간 가르치며 홀 선교사의 소천 이후 1895년 평양에 파송, 15년간 평양지역 선교를 하게 된다. 그는 평양을 주재하면서 한국 북지방 감리사로 봉사하며 또 수원 지방 감리사로 시무하며 사역을 하다가 19335월 은퇴하게 된다. 그는 부인(Mattie W. Noble, 1872-1956)과 함께 내한하여 평양시내 여자 아이들을 모아 교육을 시켰으며 1900년 평양 남산현 교회에서 주일학교 교사를 양성하여 유년 주일학교를 시작한다. 그는 <어머니에 대한 강도, 예수교서회, 1916>, <자모권면, 예수교서회, 1916>, <승리의 생활, 예수교 서회, 1927>, <초기 한국 그리스도인의 승리생활, 동경, 교문관, 1934>, <매티 노블의 저널, 1892-1934> 일기를 남긴다. 딸 둘과 아들 다섯을 두었는데 큰 딸(Ruth Noble Appenweller)은 아펜젤러 선교사의 장남과 결혼하였다.

노블 선교사와 그의 아내 메티 노블의 “노블일지 1892-1934: 미 여선교사가 목격한 한국 근대사 42년간의 기록”, 강선미, 이양준역, 이마고 출판사,
노블 선교사와 그의 아내 메티 노블의 “노블일지 1892-1934: 미 여선교사가 목격한 한국 근대사 42년간의 기록”, 강선미, 이양준역, 이마고 출판사,

노블 선교사는 18944월 매티의 폐병으로 미국으로 안식년에 돌아가서 18968월 한국에 귀환한다. 9월 평양에서 이주하여 15년간 평양 사역을 감당한다. 그는 배재학당에서 교사로 활동하여 애오개 지역 선교를 감당하다가 나중 평양에서 사역을 한다. 그의 부인 매티는 북한 지역의 최초 여성 교육기관을 시작하여 후에 초등 과정의 정진, 중등 과정의 정의학교로 발전하게 된다. 평양과 서울 지방 감리사를 역임하며 한국 선교지의 70%을 관할하는 선교의 핵심적 역할을 감당한다. 아내 매티는 최초의 여성 성경학교를 조직하였고 한국 최초의 어머니 날을 기념하였다. 노블 선교사는 수원, 경기, 황해, 평안도를 순회하면서 한국 선교의 책임자로 활동하게 된다. 노보을은 협성신학교, 연희 전문학교 설립 등에도 큰 기여를 한다. 아내 매티도 어린이 여성 교육 사역에 헌신하여 강경, 진남포, 봉산, 신계 등에 여학교를 세웠고, 병원 설립에도 적극 참여 하였다. 노블 선교사 부부는 40주년 기념 예배를 드리고 19333월 은퇴하고 19341142년의 한국 선교를 마치고 귀국한다. 그는 귀국 후에도 사위 H.D. 아펜젤러 교장을 통해 자신이 사역했던 배재학당에 현미경 10대를 기증하는 등 그의 한국 선교는 계속되었다. 미국에서 여생을 보내던 노블 선교사는 1945년 미국 캘리포니아 주 스톡튼에서 79세 나이로 소천한다. 그는 처음 사역을 시작할 때는 50명의 교인이 있었는데, 은퇴할 당시에는 2만 명의 교인으로 늘어나게 하였다.

노블 선교사의 <한국 이야기><이화 한 세기 만에 밝혀진 숭고한 사랑 이야기>이현주 역, 넥서스 크로스, 2011. <내미 노블의 조선 회상: 조선 사람들의 영혼과, 사회의 시대적 아픔을 평생 따스한 가슴으로 보듬어 안은 어머니와 같았던 선교사의 순례기>, 손현선 역, 좋은 씨앗 출판사, 2010. <노블일지 1892-1934: 미 여선교사가 목격한 한국 근대사 42년간의 기록>, 강선미, 이양준역, 이마고 출판사, 2003. 윌리암 노블의 <한국 선교 밭(코리아 미션 필드)> 저널에 여러편의 선교 이야기를 전한다. 그는 이처럼 많은 논문과 글을 기고하기도 했지만 소설(이브, 한국의 이야기)을 쓰기도 하였다. 이처럼 문필가로서 많은 저서와 글, 논문 등을 썼고 또 아울러 주일학교 운동을 일으키며 한국 교육과 주일학교 운동을 벌였다. 노보을 선교사 가문은 아펜젤러가()와 더불어 선교의 명문가문으로써 한국 선교의 금자탑을 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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