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기 인생의 시작, 교회 임직 장로의 은퇴를 앞두고 현대 의료기술의 발달로 호모 헌드레드 120세 시대에 내 삶의 발자취를 돌아봅니다.
나의 인생 제1기. 인생의 첫 출발 출생, 저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진주시 은행원 총각과 통영의 꿈 많은 소녀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6.25 전쟁의 총성이 멈춘 후, 서울시 남산 기슭의 2층짜리 조그만 일본식 집은 날마다 사람들로 바글거렸습니다. 우리 형제와 삼촌, 시골에서 올라온 친척까지 합하여 15명 정도의 대가족이었습니다. 가장 나이가 어린 나는 대가족 사이에서 부대끼며 자랐습니다. 삶의 고단함, 생존의 본능, 어렴풋한 기억입니다. 지금 돌아보면 15명의 대가족을 책임지는 아버지는 그 중압감이 얼마나 컸을지 느껴집니다. 아버지, 감사합니다.
1960년대 초등학교는 학생 수가 너무 많아 오전반과 오후반으로 나누어 수업했습니다. 6학년 때는 학생 수가 100명에 달했습니다. 초등학교 운동장은 쉬는 시간마다 아이들로, 인산인해로 인해 뿌옇게 먼지가 일었습니다.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우리나라 산업화가 시작되는 시기. 학교 옆 공터, 지금 어디인지 찾을 수 없는 성수동 논밭에 공장이 들어서기 시작했습니다. 벽돌공장에서 뿜어내는 시커먼 연기가 신기했습니다. 공장 옆에는 논밭에 돼지 도축장이 있었습니다. 길가 바로 옆 마당에서 휘두르는 몽치, 돼지가 비명과 함께 쓰러지는 모습을 친구들과 보았습니다. 밭두렁 사이로 붉은 선혈과 푸른 하늘. 멀리 학교를 배정받아 약 1시간 걸린 버스 통학길은 도시 개발의 현장이었습니다.
1970년대 고등학교 입학으로 아침 등교 시간에 발 비빌 틈 없는 짐짝 버스에 올라타야 했습니다. 운전기사는 일부러 승객을 차 안쪽으로 몰아넣기 위해 요리조리 곡예 운전을 했습니다. 버스에서 내릴 때 온몸이 납작하게 찌부러졌습니다. 청소년기는 질풍노도의 암흑기였습니다.
제2의 인생은 대학 입학하면서 시작합니다. 산업화의 그늘과 유신독재는 대학 생활과 함께하였습니다. 데모는 자연스러운 행사로 대학교 교정은 최루탄이 자욱했습니다. 전투경찰들과 숨바꼭질, 최루탄, 스크럼, 유신의 삼권 분립에 대한 의분의 돌멩이, 무릎 꿇고 살지 말자, 경찰에 붙들려 치른 유치장 곤욕, 아련한 기억입니다. 경춘선 열차와 M.T(수련회), 방학 때 시골 교회에 전도와 봉사, 보육원과 교도소의 방문, 파란 하늘에 흰 구름의 조각. 그러나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한복음 8:32).”라는 교지, 언더우드 선교사의 꿈을 알게 된 것은 무엇보다 젊은 날 나의 가장 큰 기쁨이자 선물입니다.
대학 졸업과 함께 엄격한 수련의 시절입니다. 밤늦도록 일하다가 통행금지를 피하려고 숨이 닳도록 뜀박질했습니다. 수련 시절에도 틈틈이 교회 야학에서 가르치기도 했고 청년부 총무와 찬양대 총무로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태복음 6:33).” 바로 젊은 날에 붙들린 말씀입니다.
30세에 결혼은 또 다른 하나님의 인도입니다. 초짜 가장으로 여러모로 많이 미숙했습니다. 아버지로, 또 남편으로 하나님께서는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십여 년의 대학교수로서 안정된 교정을 떠나 개업, 어언 20년이 흘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부족한 저를 집사, 장로로서 믿음의 생활을 이끌어 주셨습니다. 지나온 나의 삶을 돌아볼 때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합니다. 이제 교회 임직 은퇴, 새로운 믿음의 길을 준비합니다. ‘저 산지를 내게 주소서.’ 이제부터는 지난 70년 동안 꾸었던 내 꿈이 아니라 하나님의 꿈을 꾸고 싶습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리라.(마태복음 6:3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