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은 을사년입니다. 을사년 하면 을사늑약을 기억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을사늑약은 120년 전인 1905년 11월 17일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강제로 체결한 조약입니다.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나서 3일 후 그 당시 황성신문 주필이었던 장지연은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 이날에 목 놓아 크게 우노라)이란 제목의 사설을 황성신문에 게재했습니다. 이 사설에서는 오호통의(嗚乎痛矣), 오호분의(嗚乎憤矣), 통재통재(痛哉痛哉)라는 표현이 사용됐습니다. 영조는 자기 가족의 조문(弔文)이나 비명(碑銘)의 마지막 부분에서 오호통재(嗚乎痛哉)라는 표현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우리말에는 평서법, 의문법, 명령법, 청유법, 감탄법 등 5가지 서법(敍法, mood)이 있습니다. 그중 감탄법을 적용한 문장에는 으레 감탄사를 앞세우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호통재나 오호애재도 감탄사에 해당합니다. ‘오호’는 감탄사인데 특이하게 순우리말 ‘오호’와 한자어 ‘오호(嗚呼)’의 쓰임이 다릅니다. 우리말 오호는 ‘오호, 이제야 알겠군’처럼 뭔가 새로운 것을 깨달았을 때 내는 감탄사로 쓰이는 반면에 한자어 오호(嗚呼)는 ‘오호, 슬프도다’처럼 슬플 때나 탄식할 때 쓰이며 주로 ‘오호라’ 꼴로 표현됩니다.
그러나 현대어에선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오호(嗚呼)’나 ‘오호라’는 거의 쓰이지 않고 기쁜 일, 슬픈 일에 통용되는 ‘아/아, 기쁘다’, ‘아/아아, 슬프다’처럼 ‘아/아아’ 또는 ‘어, 합격이네’, ‘어, 돌아가셨구나’처럼 ‘어’로 표현됩니다. 한 가지 덧붙이면 ‘뜻밖에 기쁜 일이 생겼을 때’ 표현하는 ‘와’는 ‘우와’의 준말이 아니라 ‘우아’의 준말입니다. 따라서 ‘우와’는 잘못 쓰이는 표현입니다.
요즘 우리말 성경 출판 작업에 교열 일로 참여하다 보니 성경의 표현 하나하나에 부쩍 관심이 많아졌습니다. 그래서 개정개역 성경에 14차례 등장하는 ‘오호라’라는 표현에 꽂혔습니다. 구약 사무엘하 1장에는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을 애도하는 표현으로 ‘오호라 두 용사가 엎드러졌도다’라는 표현이 세 번(19절, 25절, 27절) 나옵니다. 개역개정판 신약성경에 유일하게 ‘오호라’가 표현된 곳은 로마서 7장 24절입니다. 감탄문으로 표현된 바울의 탄식입니다. 다른 번역본에서는 감탄사를 쓰지 않거나(공동번역), ‘아’(새번역), ‘아아’(현대인의성경)를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24절의 감탄사 ‘오호라’는 25절의 ‘감사하리로다’라는 표현과 대비됩니다. 선과 악이 공존하는 장면을 바울은 절묘한 대비법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로마서 7:2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로마서 7:25)
“나는 누구인가(Who am I)?”
이 질문에 수많은 철학자와 인문학자들은 저마다 수많은 대답을 내놓았지만, 바울만큼 명쾌한 답은 없습니다. 바울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스스로 답하고 있습니다. 헬라어 원문 성경을 보면 24절은 ‘비참하다’는 의미의 ‘탈라이포로스(ταλαίπωρος)’로, 25절은 ‘감사하다’는 의미의 ‘유카리스토스(εὐχάριστος)’로 시작됩니다. 이 두 구절을 결합하면 ‘나는 비참한 사람이며 감사하는 사람’으로 요약됩니다. 비참한 것은 ‘몸’이고 감사하는 것은 ‘마음’이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탄식하는 24절에는 한자어 ‘오호(嗚呼)’를, 감사하는 25절에는 순우리말 감탄사 ‘오호’를 사용해서 번역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오호, 나는 비참한 사람이로다….”(24절)
“오호, 나는 감사하는 사람이로다….”(25절)
박재역 원장∥중학교 교사를 접고 동아일보 교열기자로 입사했다. 동아일보에서 정년퇴직 후 중국해양대학교 한국학과 초빙교수로 재직하며 중국 대학생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쳤다. 현재는 한국어문교열연구원을 운영하면서 문서 교열과 등록민간자격 '어문교열사' 양성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저서로는 《성경고유명사사전》 (2008, 생명의말씀사), 《교열기자의 오답노트》(2017, 글로벌 콘텐츠), 《다 쓴 글도 다시 보자》(2021, 글로벌콘텐츠), 《맛있는 우리말 200》(2023, 글로벌콘텐츠) 등이 있으며 현재 다산은혜교회(대한예수교장로회)에 장로로 섬기고 있다.
블로그 http://blog.naver.com/jacobp1
홈페이지 www.klpi.kr 휴대전화 010-6745-9927
출처 : 본헤럴드(https://www.bonhd.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