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사에 근무하던 어느 날 아침 편집회의에 참석하고 내려온 팀장의 얼굴이 어두웠습니다. 슬슬 눈치를 살피고 있던 차에 팀장의 입에서 느닷없는 질문이 툭 튀어나왔습니다.
“김가, 박가 할 때 ‘가’가 한자로 무슨 ‘가’야?”
선뜻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저 역시 그때까지 무슨 ‘가’인지 모르고 있었으니까요. 그 당시 아침 회의에 참석한 팀장은 편집국장에게 똑같은 질문을 받았고, 비록 방언을 섞은 답변이었지만 팀장은 정확하게 답변했다는 후일담을 들었습니다.
“어이, ○팀장, 김가, 박가 할 때 ‘가’가 한자로 무슨 ‘가’야?”
“예, 옳을 가(可)를 동갠 성씨 가(哥)입니다.”
팀장의 표현 중에 ‘동개다’는 ‘포개다’의 방언이었습니다. 그다음 날 신문에 “구가(具家)의 한자 ‘家’는 ‘哥’로 바로잡습니다.”라는 정정기사가 나간 건 물론입니다.
저는 몇 년 전 작심하고 개역개정판 성경을 23일 만에 읽어내면서 맞춤법이나 표준어 오류를 눈에 띄는 대로 모아본 적이 있습니다. 수도 없는 오류가 발견되었지만 번역자나 감수자를 나무라지 않을 수 없는 결정적인 오류 하나를 발견하고 아연실색하고 말았습니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베드로전서 2:24)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개역한글판 이사야 53:5)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개역개정판 이사야 53:5)
‘그게 그거 아닌가, 그 뜻이 그 뜻 아닌가’ 하고 쉽게 생각할 수 있지만 결코 그게 그거 아니며, 그 뜻이 그 뜻이 아니기에 몹시 안타까웠습니다. 두 표현은 구조 자체가 다릅니다. ‘맞음으로’는 명사형 ‘맞음’과 조사 ‘으로’가 결합된 구조이고, ‘맞으므로’는 동사 ‘맞다’의 어간 ‘맞-’과 어미 ‘-으므로’가 결합된 구조로, 구조뿐만 아니라 의미도 다릅니다. 조사 ‘으로’는 수단이나 방법을 나타내지만, 연결어미 ‘-으므로’는 까닭이나 근거를 나타냅니다.
결론은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았기 때문에 그 결과 우리가 나음을 입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우리의 나음을 위해 그 수단(방법)으로 채찍에 맞음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구원)을 이루시려고 예정된 십자가의 길(수단)을 선택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수단)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것(목적)이지 죽으시므로(까닭) 우리가 구원받게 된 것(결과)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개역개정판 이사야 53장 5절 말씀은 예수님의 의도를 곡해한 표현으로 분명한 오류에 해당합니다.
조선의 명장 남이(南怡)는 ‘평할 평(平)’을 ‘얻을 득(得)’으로 단 한 글자가 조작되어 ‘미평국(未平國)’이 ‘미득국(未得國)’으로 바뀌며 반역이란 모함을 쓰고 20대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그 역사적 기록은 하나의 글자가, 한 가지 표현이 언어를 통한 의미 전달과 이해에 얼마나 중요한 기능을 하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가 될 수 있습니다.
“요나가 밤낮 삼 일을 물고기 뱃속에 있으니라.”(욘 1:17)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요 21:3)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마 14:17)
요나는 3일간 ‘물고기’ 뱃속에 있었고, 주님 부활 후 베드로는 ‘물고기’ 잡으러 갔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빈들에서 ‘물고기’ 두 마리를 들고 예수님께서 축사하셨고, 5,000명이 넘는 군중이 ‘물고기’를 배불리 먹었다? 세상에 “오늘 아침에 내가 좋아하는 ‘물고기’ 반찬이 올라와서 ‘물고기’ 반찬으로 밥 한 그릇 비웠어”라고 하는 사람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생선 잡는 어부’란 표현이 어색하지만 ‘물고기 반찬’이란 표현도 어색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물에 있는 건 ‘물고기’, 밥상에 올리는 건 ‘생선’이 바른 표현입니다.
“아 해 다르고 어 해 다르다”라는 속담, 번역 성경에서도 꼭 필요한 게 아닐는지요?
박재역 원장∥중학교 교사를 접고 동아일보 교열기자로 입사했다. 동아일보에서 정년퇴직 후 중국해양대학교 한국학과 초빙교수로 재직하며 중국 대학생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쳤다. 현재는 한국어문교열연구원을 운영하면서 문서 교열과 등록민간자격 '어문교열사' 양성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저서로는 《성경고유명사사전》 (2008, 생명의말씀사), 《교열기자의 오답노트》(2017, 글로벌 콘텐츠), 《다 쓴 글도 다시 보자》(2021, 글로벌콘텐츠), 《맛있는 우리말 200》(2023, 글로벌콘텐츠) 등이 있으며 현재 다산은혜교회(대한예수교장로회)에 장로로 섬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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