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다 놀라며 당황하여 서로 이르되 이 어찌 된 일이냐 하며”(행 2:8. 12).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인해 아주 특이한 현상이 일어났다. 각 나라에서 온 경건한 유대인들이 자기 나라 언어로 복음을 들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예수의 제자들은 대부분 갈릴리 사람들이었고, 학식이 뛰어난 집단도 아니었다. 평생 외국에서 살아본 적도 없었다. 그런데 그들이 성령을 받고 방언을 말하기 시작했으며, 그 방언이 당시 각 나라에서 사용되는 실제 언어였다.
오늘날 AI(인공지능)의 발전으로 인해 언어의 장벽이 급격히 무너지고 있다. 핸드폰에 앱만 설치하면 각 나라 사람들과 소통하고 글을 읽을 수 있다. 인공지능이 마치 현대판 방언과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기술이 혁신적으로 발전하고 있다.
1세기에는 과학기술이 미미한 수준이었지만, 오순절날 성령이 임하면서 예루살렘이 진동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120명의 제자들이 모국을 벗어나지 않았음에도 그들의 입에서 세계 각국의 언어가 튀어나왔다. 기적이었다. 이 사건이 중요한 이유는 두 가지다.
1. 바벨탑 사건의 회복
첫째, 오순절 사건은 인간의 교만과 불신앙을 상징하는 바벨탑 사건(창세기 11장)으로부터의 회복을 의미한다. 바벨탑 사건은 인간이 자신의 재능과 능력을 사용하여 높은 탑을 쌓고 흩어짐을 막으려 했던 일이다. 핵심은 인간이 스스로 주인이 되려 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다. 언어가 혼잡해지자 의사소통이 불가능해졌고, 결국 사람들은 흩어졌다. 바벨탑 사건 이후 인류는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끼리 모여 역사와 문화를 이어왔다. 그런데 오순절 사건을 통해 처음으로 언어가 회복되었다.
성령이 임하자 문화적, 언어적 장벽이 사라졌다. 초자연적인 기적이 마가의 다락방에서 일어난 것이다.
2. 복음의 세계적 확산
둘째, 각 사람이 자기 나라 언어로 복음을 들었다는 것은 성령의 역사가 전 세계로 퍼질 것이라는 의미다. 복음은 예루살렘을 떠나 유대, 사마리아를 거쳐 땅끝까지 전파될 것이었다.
사도행전 2장 9-11절을 보면 여러 민족이 등장한다.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갑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행 2:9-11).
왜 사도행전 저자는 이렇게 세밀하게 기록했을까? 15개 민족이 언급되는데, 이는 당시 세계의 모든 민족과 언어를 대표하는 것이었다. 즉, 성령의 역사는 특정 개인이나 민족에 국한되지 않고 전 세계를 포괄하는 것이다. 성령의 공동체는 지역, 민족, 언어, 국가를 초월한다. 이것이 성경의 관점이다.
그리스도인은 개인주의, 지역주의, 학맥주의, 민족주의를 벗어나 세계 모든 사람들을 가슴에 품고 기도해야 한다. 많은 선교 단체들은 전 세계 지도를 놓고 각 나라와 선교사들을 위해 기도한다. 기독교는 보편적이고 우주적인 종교이며, 모든 인류를 위한 구원을 선포한다. 인종, 종교, 계층, 국경을 초월해 복음을 전하는 종교다. 따라서 기독교는 나라를 사랑하되 국소주의(localism)를 뛰어넘어야 한다. 국소주의는 신앙의 보편적 진리나 구원의 보편성을 가로막는 장벽이다.
예루살렘 교회는 성령이 오직 유대인들에게만 주어진 선물이라고 착각했지만, 성령은 이방인들과도 함께 나누어야 할 보편적 구원의 선물이었다. 예수님은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 라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당시 유대인들은 이 말씀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성령의 선물은 특정 개인이나 그룹의 전유물이 아니다. 인류 모두가 누려야 할 하나님의 은혜다. 성령의 능력으로 복음이 전해질 때 사람들은 어둠에서 빛으로, 절망에서 희망으로, 죽음에서 영생으로 나아간다. 이것이 복음이다. 복음은 가두어서는 안 된다. 우리의 편협한 사고로 복음을 제한하지 말아야 한다. 함께 나누고 확장할수록 복음의 능력은 더욱 배가된다.
복음을 나누는 삶
바울은 로마서를 통해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한 번도 만나 본 적 없는 사람들이었지만, 바울은 그들을 위해 마음 깊이 기도했다.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롬 1:9)
복음 안에서 형제자매를 품고 기도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우리는 폐쇄적이고 이기적인 자국 중심주의를 벗어나야 한다. 모든 민족을 가슴에 품고 기도하며 복음을 전해야 한다. 이것이 선교의 당위성이다.
경건한 유대인들이 각국에서 유월절을 지내기 위해 예루살렘에 모였다. 그들은 헬라어와 자신이 이주한 나라의 언어를 사용했는데, 모두 놀랐다.
“다 놀라 기이히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행 2:7).
"다 놀라며 당황하여 서로 이르되 이 어찌 된 일이냐 하며"(행2:12).
갈릴리 촌사람들이 각 지방의 언어를 어떻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일까?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성령의 역사가 인간의 지식이나 조건에 좌우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성령은 부자와 가난한 자를 차별하지 않고, 남녀노소를 구별하지 않는다. 배운 사람이나 배우지 못한 사람이나 동일하게 역사하신다.
오늘날 성령의 역사는 아프리카, 인도, 남미 등지에서 강력하게 나타나고 있다. 성령은 인간의 조건을 초월한다. 두려워하지 말라. 무식하든, 가난하든, 죄가 많든 상관없다. 성령은 은혜받을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 갈릴리 사람들이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을 체험한 것처럼, 오늘날에도 성령께서 역사하신다. 믿음으로 화답하자.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