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천회 교수](2)차영지 신학적 근거

  • 입력 2025.04.12 23:03
  • 수정 2025.04.12 2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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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영지-차세대영적지도자 준말.
유대교외 기독교와의 관계
다른 민족, 다른 종교와의 관계
세대와 세대 간의 문제

기독교 신학이 필연적으로 해결해야 할 세가지 내용이 있다. 이 세가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기독교는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역사 속에서 지탄의 대상이 되거나 도태되고 말 것이다.

 

첫째, 유대교와 기독교와의 관계이다.

유대교와 기독교의 관계를 이해하는 것이 기독교의 정체성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기독교는 유대교로부터 태동한 것이 사실이지만 유대교가 아니다. 그렇다면 기독교가 어떤 면에서 유대교와 공통점을 가졌는지, 어떤 면에서 다른 점을 가지고 있는지 아는 것이 곧 기독교의 정체성을 아는 길이 될 것이다. 기독교의 정체성을 아는 것은 곧 복음을 분명하게 선포하는 것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에 중요한 내용이다.

 

둘째, 다른 민족, 다른 종교와의 관계이다.

기독교가 다른 민족 혹은 다른 종교와의 관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면 매우 부정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즉, 예수님의 사랑과 용서와 구원을 선포해야 하는 종교가 다른 민족이나 종교를 억압하는 종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유일하신 하나님이고, 예수님이 유일하신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사실이 다른 종교를 억압하라는 뜻은 아니다. 서로 다른 종교가 공존하자는 것이 복음증거를 멈추라는 뜻도 아니고, 서로 다른 종교가 대화하자는 것이 혼합종교가 되자는 것도 아니다. 함께 공존하면서도 얼마든지 기독교는 생명과 구원을 전하는 종교가 될 수 있다.

 

셋째, 세대와 세대 간의 문제이다.

즉, 한 세대에게 복음이었지만 다른 세대에게는 걸림돌이 되거나 죄가 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은혜와 축복을 받은 세대가 오히려 다른 세대에게 복음이 전해지는 것을 방해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다. 현 세대와 다음 세대에 대한 이해와 반성과 통찰이 없으면 복음은 한 세대 안에 갇혀서 모든 능력을 상실하고, 결국 썩어버리고 말 것이다. 결과적으로 종교는 한 세대만에 정체 혹은 퇴보하는 종교로 전락할 것이다.

차영지 신학은 상기한 세가지 문제들 중 하나인 세대와 세대 간의 문제에 집중하며 그 안에서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발견하고, 역사의 도전에 무지하거나 회피하지 않고 응전하는 신학이며 목회학이다. 차영지 운동의 신학적 근거를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논하려고 하는데, 첫째는 선교학적인 관점에서 보는 근거와 두 번째는 기독교의 기원의 관점에서 보는 신학적 근거이다.


관점에서 보는 차영지 운동: 공간적 선교와 시간적 선교

차영지 운동을 다음과 같이 도표로 한 눈에 표현할 수 있다.


지난 2000년 이상 진행된 기독교 선교의 역사를 되돌아볼 때 기독교는 주로 공간적 개념의 선교에 치중해 왔다. 즉 어느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 이동하며 선교를 해 왔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소아시아로, 다시 로마 등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한 것이 모델이 되어 오늘날도 세상 끝까지 모든 지역에 복음을 전하는 것을 선교라고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선교는 공간적 개념의 선교 (a mission from one space to another space)가 있는가 하면 시간적 개념의 선교 (a mission from the present to the future)가 있다. 성경은 공간적 선교와 시간적 선교에 대해 분명하게 증언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선교는 오직 공간적 개념의 선교에 치중하며 시간적 선교에 대해 잊어버렸거나 도외시되었기 때문에 기독교는 한 지역에서 100년 혹은 200여년의 성장기와 부흥기를 지나 곧 정체기와 쇠퇴기를 겪는 패턴을 반복하고 있다.

예를 들어서 예루살렘에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나면서 선교가 활발하게 이루어졌지만 곧 핍박을 받으면서 세계로 흩어지면서 예루살렘은 복음이 태동한 지역이지만 복음적으로 가장 황폐한 지역이 되었다. 그리고 기독교 복음은 소 아시아 여러 지역과 로마에 전해졌는데, 2세기 만에 콘스탄티누스 (Aurelius Constantinus, 272-337) 황제가 313년에 밀라노 칙령 (Edict of Milan)을 발표함으로써 기독교는 더 이상 로마에서 핍박을 받는 이교 (異敎)가 아니라 국가의 인증을 받은 종교가 되었고 더 나아가 정치적 권력의 도움을 받아 세계에 복음을 전하는 종교가 되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325년에 최초의 범세계적인 회의라 할 수 있는 니케아 공의회 (the First Council of Nicaea)를 소집하여 예수는 하나님에 의해 피조된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동일시될 수 있는 신이 아니라고 주장한 아리우스 (Arius, 256-336)를 따르던 아리우스파 (Arianism)를 이단으로 정죄하고 오늘날과 같은 삼위일체 교리를 정립하는데 기여했다. 그리고 330년에 로마의 수도를 비잔티움 (Byzantium)으로 정했는데, 그가 죽은 후 비잔티움은 콘스탄티노폴리스 (Constantinopolis. “콘스탄티누스의 도시”라는 뜻. 영어 명: Constannople)로 개명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수도를 옮긴 후 로마는 395년에 동 로마와 서 로마로 분열되었고, 100년이 못 되어 서 로마가 476년에 멸망했다. 서 로마가 고트족의 침략을 받으면서 무너져 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어거스틴 (Augustine, 354-430)이 『하나님의 도성』 (De civitate Dei)을 집필한 것이다. 한편 동로마는 명실공히 옛 로마의 전통과 명성을 회복할 수 있는 국가로 남게 되었지만 실제로는 다양한 이민족들과 연합하여 로마제국을 건설한 것이 되었기 때문에 극심한 혼란을 갖게 된 것도 사실이고 그 여파가 지속되어 로마 제국의 교회도 분열되어 1054년에 동 로마 교회와 서로마 교회로 분열된 것이다. 그 후 동로마 교회는 서로마 교회와 완전히 단절하고 자신들만의 동방정교회 (Eastern Orthodox Church)로 발전했다.

서로마 중심의 기독교는 외형적으로 안정된 듯 보였지만 내부적으로 타락하여 16세기 들어서 마틴 루터 (Mertin Luther)에 의해 촉발된 종교개혁을 맞이하게 되었다. 종교개혁 이후 독일과 프랑스와 영국으로 대변될 수 있는 유럽의 기독교도 각 나라에서 200년 이상의 부흥을 이루지 못하고 쇠퇴하기 시작해서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영국의 청교도들이 신 대륙에 정착하기 시작하여 100여년이 지난 후에 1776년에 미국이라는 독립국가를 이루면서 소위 “대 각성운동” (Great Awakening Movement)이라는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지만 그 역시 200여년의 고비를 넘지 못하고 다시 정체기를 지나 쇠퇴기에 들어섰다.

한국 선교는 언더우드 (Horace Grant Underwood, 1859-1916)와 아펜젤러 (Henry Appenzeller, 1858-1902)가 1885년에 인천 제물포 항에 첫 발을 디딘 후 공식적으로 선교가 시작되었다. 물론 그 이전에도 개인 자격으로 조선에 선교를 시작한 선교사들이 다수 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고 해도 한국에 기독교 선교가 시작된 지 20-30년 안에 1907년 대 부흥이 일어났다. 그 이후 100년 안에 세계에서 유래 없는 급속한 성장,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 세계에서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선교사를 많이 파송한 나라가 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급속하게 기독교가 쇠퇴하며 가장 많은 교회들이 문을 닫는 나라가 되었다.


성경에 나타나는 시간적 개념의 선교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두 가지 예, 즉 구약과 신약에서 각각 하나씩 예를 통해 생각해보자.


첫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창 28:10-22)

구약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은 곧 조상의 하나님, 즉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할 조상의 하나님, 즉 과거의 하나님을 말한다. 그런데 그 과거의 하나님이 과거에 머물러 있지 않고 현재의 모세에게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과거의 하나님이 곧 현재의 하나님이 되는 것이다 (출 3:15). 이스라엘 민족은 400년 이상을 애굽에서 노예로 살면서 하나님에 대해 완전히 잊어버렸지만 모세를 통해 전해들은 조장들의 하나님, 즉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을 기억할 수 있었고, 자신들에게 닥친 모든 위기를 극복하며 민족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은 과거의 하나님이 아니라 현재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셨다. 즉, 야훼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막 12:26-27). 그런데 어찌하여 당시의 유대인들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을 죽은 자의 하나님이라고 오해하고 있었을까? 그들에게는 과거의 율법과 사람들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현재는 과거의 연속이기 때문에 과거를 중요시하는 것은 현재의 기득권 주의자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 된다. 그런 가운데 예수님은 하나님은 산자들의 하나님이라고 하심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현재와 미래로 향하도록 만드셨다.

기득권주의자들은 언제나 과거의 방법대로 현재를 유지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렇게 되면 현재는 언제나 과거에 붙들려 한 발짝도 미래로 갈 수 없는 사회가 되어 버린다. 결과적으로 한 세기가 지나기 전에 현존하는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사회로 전락하며 현재의 사람들에게 외면 받는 하나님이 된다. 과거와 전통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바로 종교이다. 종교는 창시자가 있기 때문에 그 창시자를 벗어나지 못하고 그 안에 머물러 있게 마련이다. 물론 기독교도 하나의 종교로서 그러한 패턴을 벗어나기 어렵다.

그런데 기독교는 유대교가 아니다. 기독교의 출발점은 예수님이다. 예수님은 종교의 그러한 패턴을 깨고 현재 살아 있는 사람들의 종교로 만든 분이다. 더 나아가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계시하신 하나님은 현재와 미래를 창조하시는 창조자 하나님이며 동시에 현존하는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구원자 하나님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정확하게 믿고, 알게 되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임을 깨닫게 될 것이고 그 하나님은 오늘도 여전히 창조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 (요 5:17)임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복음은 후손들에게, 후손의 후손들에게 전해져야 한다. 이사야 예언자는 그 사실을 다음과 같이 전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과 세운 나의 언약이 이러하니 곧 네 위에 있는 나의 영과 네 입에 둔 나의 말이 이제부터 영원하도록 네 입에서와 네 후손의 입에서와 네 후손의 후손의 입에서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사 ).

하나님은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미래로 대를 이어 전해져야 한다. 이 명백한 사실이 현재의 사람들에 의해 방해를 받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둘째, 예수님의 마지막 지상명령 (눅 23:28; 마 28:18-20)

“예수님의 지상명령” 이라 함은 세상에 계실 때 모든 제자들에게 “이렇게 하라”라고 명령한 것을 말하는데 많은 명령들 가운데 특히 “복음을 전하라”는 말씀을 강조하고 있다. 마태복음 28:18-20을 보자.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18-20).

(Then Jesus came to them and said, "All authority in heaven and on earth has been given to me. [19] Therefore go and make disciples of all nations, baptizing them in the name of the Father and of the Son and of the Holy Spirit, [20] and teaching them to obey everything I have commanded you. And surely I am with you always, to the very end of the age").

모든 명령을 마치신 후 예수님께서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surely I am with you always, to the very end of the age)고 약속하셨다. 많은 경우 사람들은 이 말씀을 공간적 선교의 개념으로 읽으며 마치 세상 어느 곳을 가도 예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뜻으로 읽는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그 내용은 장소가 아닌 시간의 개념이다. 앞으로 모든 세대에 이르기까지 함께하신다는 말씀이다. 그렇다면 그 명령은 장소의 개념도 있지만 동시에 시간의 개념, 즉 “세대에서 세대로” (from generation to generation) 복음을 전하라고 하는 말씀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차영지 신학의 관점에서 보면 누가복음 23:28도 “예수님의 마지막 지상명령”중 하나이다.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눅 23:28).

(Jesus turned and said to them, "Daughters of Jerusalem, do not weep for me; weep for yourselves and for your children).

잡히신 후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현장에서 자신을 따라오며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는 제자들, 특히 여인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의 뜻을 정확하게 알지 못하고 환영하거나 슬퍼하는 경우가 많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는 뜻도 모르고 환영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떠나시는 순간에는 그 뜻을 알지 못한 채 슬퍼하고 있다. 사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사람들의 환영 또는 동정을 받기 위함이 아니다.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하고, 자녀 삼으시고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분이다. 그리고 그 일을 이루시는 과정에서 죽임을 당하신 것이다.

이제 예수님이 지상에서의 모든 사역을 마치시고 마지막 길을 가시는 중에 다시 한번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do not weep for me; weep for yourselves and for your children)이다. “너희 자신”은 현재이고 “너희 자녀”는 미래이다. 예수님이 오신 목적과 하시는 일과 그 분의 말씀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 채 예수님을 따르고, 환영하고, 그 분 때문에 슬퍼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아마도 예수님이 그런 무리를 보시면 더욱 슬퍼하실 것이다.

누가복음에서 또 하나의 눈에 띄는 장면이 나온다. 누가복음 18:15-17을 보면, 어린이들이 예수님께 오는 것을 어른들이 꾸짖고 있다. 사실 이러한 장면은 당시의 분위기를 그대로 반영해주고 있다. 즉 당시의 유대 사회는 성인 남자를 집중적으로 교육하고 그 들에 의해 통치되는 사회였기 때문에 어린 아이들이 와서 그러한 교육을 방해하는 것을 꺼렸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린이들이 자신에게 오는 것을 막는 제자들을 꾸짖으신 후 모든 어른들도 어린이처럼 믿을 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신 장면이다.

한국 교회는 분명 어린 아이들을 환영하고 그 들에 대한 관심도 매우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이들이 은혜 받는 것보다 어른들이 먼저 은혜 받는 일에 집중하며 어린이들이 외면당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결과적으로 한국 교회는 날이 갈수록 정체와 쇠퇴를 면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물론 그런 현상이 이미 오래 전에 발생하고 있는 현실이 되었다).

그러한 현실 앞에서 다시 한번 묻지 않을 수 없는 질문이 있다.

어찌하여 기독교는 한 나라 혹은 한 지 역에서 200여년을 견디지 못하고 정체 및 쇠퇴하는 고리를 끊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기독교 복음의 유통기한은 200년이란 말인가?

즉, 기독교가 전해지는 태동기, 부흥기, 그리고 정체기를 지나 쇠퇴기로 접어드는 것이 기독교가 피할 수 없는 패턴이란 말인가?

그러한 문제를 해결할 만한 내용이 기독교 신학 안에 없다는 말인가?

차영지 신학과 운동은 바로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을 찾는 노력이다. 신학적으로 답을 찾으면 바로 목회 현장에서, 즉 교회에서 그 내용을 적용하고 실천하면서 많은 시행 착오를 거쳐 답을 찾아내려는 몸부림이다. 찾아낸 답 중 하나가 성경에 나타나고 있는 명백한 선교, 즉 시간적 개념의 선교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공간적 개념의 선교와 시간적 개념의 선교를 함께 진행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교회를 떠나 다른 장소에서 선교하는 것이 중요한 만큼 교회 내에서 “현재 세대에서 다음 세대” (from this generation to the next generation)로 선교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미래는 자녀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현재의 세상으로 파송하셨다는 것은 곧 우리의 가까운 미래인 자녀들에게 파송하셨다는 뜻이 된다. 예수님께서 죽으시는 순간에, 그리고 부활하셔서 우리에게 하신 지상 명령이 놀랍게도 공간적 개념의 선교뿐만 아니라 시간적 개념의 선교라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선교지는 어디일까?

우리의 선교지는 바로 자녀들이고 우리와 함께 예배 드리고 있는 청소년들이다. 그들의 마음 속으로 들어가야 하고 그들의 언어를 배워 그들과 소통해야 한다. 가장 가깝게 있지만 가장 어려운 선교 지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감당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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