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영지운동_허천회 교수] (6), 제4장 철학자들로부터 배우는 차영지 운동

  • 입력 2025.05.19 15:48
  • 수정 2025.05.28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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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들에게 배우는 차영지 운동””을 통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가?

역사적으로 기독교 신학은 철학과 밀접한 관계 안에서 상호 협력관계 혹은 경쟁관계 혹은 적대관계를 유지하며 발전했다. 그 과정에서 철학은 신학의 시녀라고 주장했는가 하면 그 반대를 주장하기도 했다. 오늘날에는 서로의 영역이 다르다는 뜻에서 각자의 길을 가거나 도외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철학자들보다 사고의 기능이 떨어지고, 삶과 사물의 문제를 냉철하게 인지하고 그에 대한 답을 제시하는 일에 진지하지 못하다면 부끄러운 일일 아닐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철학자들에게 배우는 차영지 운동””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철학자들도 이렇게 하는데 우리 믿는 사람들이 못하는 것이 과연 말이 되는가””란 항의의 뜻이 포함되어 있는 내용이다.

철학사 속에서 소크라테스(Socrates, B.C. 470-399)와 플라톤(Platon, B.C. 427/8-348)과 아리스토텔레스 (Aristoteles, B.C. 384-322)의 관계는 가장 유명한 스승과 제자의 관계이다.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 (know yourself)라는 가르침을 통해 서양철학사의 기원이 되고 있고, 예수님과 가장 가까운 역사적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런데 그는 책을 쓰거나 자신에 대해 남긴 기록이 없기 때문에 역사 속에 묻힐 뻔했지만 그의 훌륭한 제자 플라톤에 의해 알려지면서 오늘날 철학의 아버지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플라톤은 아리스토텔레스를 제자로 두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서양의 철학 뿐만 아니라 모든 학문의 발전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광범위하게 연구하여 인간의 삶과 사회에 기여한 인물이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로 이어지는 철학적-학문적 계보가 오늘날 서양철학의 뿌리와 기둥이 되었다는 사실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들은 시대를 달리하며 동시대인들의 삶 속 가운데 발생할 수 있는 각종 악과 비극을 최소화하면서 타인의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일에 기여한 사람들이다. 비록 그들이 스승의 가르침만을 계승한 것이 아니라 전 시대이 문제를 극복하고 새로운 시대에 적합한 이론을 만드는 과정에서 서로에게 힘이 되거나 짐이 된 것도 사실이지만 결과적으로 서로로부터 배우고 발전했기 때문에 이 천년이 훨씬 지난 오늘날까지도 그들은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것이다.

신학은 철학과 분리될 수 없고, 특히 인간의 삶과 불가분리의 관계이기 때문에 신학과 목회는 철학자들로부터 배울 필요가 있다. 만약, 신학자들이, 혹은 믿음을 가지 그리스도인들이 철학을 비웃으면서 철학자들보다 못한 사고와 행동을 한다면 어찌 사회에서 영향력을 끼질 수 있을까? 간단하게 그들의 삶과 철학을 살펴보면서 차영지 신학의 관점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Socrates, B.C. 470-399)의 경우


소크라테스는 글을 남기지 않았다. 특히 법정에서 소크라테스에게 유죄를 선고하고 사형을 실시한 기록이 남아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는 것은 그 재판이 불법 재판이었다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소크라테스에 대한 재판과 그의 죽음에 대한 기록은 그의 제자 플라톤의 글 모음집 <대화편>에 남아 있는 기록이 현재까지 알려져 있는 가장 공신력 있는 자료이다. 어느 것이 스승 소크라테스의 말인지, 어느 것이 플라톤 자신의 말인지 구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지만 스승의 삶과 철학과 밀접하게 관계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

플라톤에 의하면,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도시국가, 무역중심, 즉 사상적으로 외부에 열려 있고, 혼돈스러운 곳)에서 조각가 (a stone worker, 석공)인 아버지 소프로니스코스 (Sophroniscus)와 산파 (a midwife)였던 어머니 파이나레테 (Phaenaarete) 사이에서 태어났다. 처음에는 아버지를 따라 조각을 하면서 다른 청년들처럼 체조(Gymnastics), 음악 (Music), 수학 (Mathematics) 등을 배웠고, 산파였던 어머니를 통해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잘 유도하여 가능하게 만드는 기술을 논리에 적용하는 법을 배웠고, 학자들은 그러한 논리적 기술을 산파술 (maieutics, 아기를 잘 낳도록 유도하는 기술) 이라고 칭했다.

그는 키가 작고 안짱다리이며, 두 눈이 튀어나왔으며, 코는 짜부러진 사자코 (납작코 – 철학이야기 21) 였다고 한다. 그는 당장 죽음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듯이 살았는데, 특히 여름이든 겨울이든 그의 옷은 항상 같았으며 신도 신지 않았고 웃옷도 걸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한편 체조도 하고 열정적으로 춤을 추기도 했다 (뒤안길 44).

그는 50세쯤에 크산티페(Xanthippe)와 결혼하여 세 아들을 두었다. 그 후 소크라테스는 한번 더 결혼한 것으로 전해진다. 소크라테스의 전기를 쓴 크세노폰 (Xenophon)은 크산티페는 성격이 불 같았다고 전했다. 크산티페는 지나가는 남편의 머리에 더러운 물을 붇기도 하고, 시장 한 복판에서 옷을 잡아 찢기도 했다고 한다. 아무리 잔소리를 하고 소리를 질러도 무심한 남편이 집을 나서자 창문을 내다보며 물벼락을 내렸는데, 그 때 소크라테스가 친구에게 ““내가 말했지! 천둥이 치면 곧 소나기가 오는 법이라고!””라고 말했다는 유명한 일화도 있다.

아마도 그의 가장 큰 특징은 외모나 결혼이 아니고 그의 생각하는 힘이었을 것이다. 그는 군에 있을 때 어느 여름날 아침 일찍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한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않고 사색에 잠겨 있다가 해가 떠오르자 태양을 향해 잠시 기도한 후 자리를 떠났다고 한다. 한 때 정치에 참여한 적이 있지만 1년 만에 그만두고, 40세 때부터 죽을 때까지 30여년간 거리에서 청년들을 가르쳤다.

당시의 철학자들을 ““지혜자들”” 즉, 소피스트들 (Sophists)이라고 불렀는데 그들은 철학을 배울 자격이 있는 사람들, 즉 부유층이나 지식인층 성인들에게 돈을 받고 가르쳤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거리에서, 시장에서 주로 청년들을 가르쳤고 돈을 받지도 않았다. 소피스트들이 우주의 원리에 대해 묻고 답하는 방법으로 가르친 반면에 소크라테스는 인간의 삶에 있어서 근본적이고 실제적인 문제들이다.


선 (혹은 덕)을 어떻게 고양시킬 수 있는가?

지혜란 무엇인가?

혹은 행복이란 무엇인가?


등을 묻고 각자가 결론에 도달하도록 가르쳤다.

그의 모든 가르침은 당시 델피 (Delphi)에 있는 아폴로 신전 (Temple of Apollo)에 쓰여 있던 ““너 자신을 알라 (γγννῶθ¥èι¥é σσεεααυυττόν¥ν)는 말로 요약된다. 아마도 그 뜻은 ““인간들이 신 앞에서 아는 척하지 말고, 인간은 신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는 뜻일 것이다. 인간이 자기의 한계를 모르는 것이 무지이고, 자신의 한계를 아는 것이 지혜라는 가르침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소크라테스는 인간의 무지를 깨우고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도록 했다는 차원에서 최초의 철학자라고 평가받고 있는 것이다.

그는 대화 중에 학자나 청년들에게 ““자신들이 사용하는 용어를 정의하라”” (asked them to define their terms)고 다그치면서 그들이 정작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우쳐주었기 때문에 상대방들을 불쾌하게 느끼거나 화나게 만드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철학이야기, 22). 그는 지혜의 출발은 곧 무지의 지 (無知의 知), 즉 모르는 것을 아는 것이라 함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현재 알고 있는 것이 얼마나 제한적이고 잘못된 것인지 깨우치는가 하면, 근거와 정확성이 없이 전개되는 모든 논리의 한계와 잘못을 아는 것을 지혜의 출발이라 했다.

 

플라톤은 대화편의 Symposium (향연)에서 젊은 알키비아데스(Alcibiades)의 입을 통해 소크라테스에 대해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나는 이 분의 말을 들을 때 내 심장은 미친 듯 춤을 추고…… 눈에서 눈물이 마구 쏟아져 흐른다…… 그래서 나는 일부러 귀를 막고 이 분으로부터 도망치려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늙어 죽을 때까지 이 분을 따라다니게 될 터이니.. 때때로 나는 이 분이 인간 세상에서 없어져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물론 그렇게 되면 더욱 슬퍼 지리 라는 것도 알고 있으면서. 출처

 

소크라테스가 당시 젊은 지성인들, 청년들에게 얼마나 영향력이 있었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이다.

소크라테스는 두 가지 죄목으로 기소되었는데,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는 것"과 "도시가 숭배하는 신들을 무시하고 새로운 종교를 끌어들였다"는 불경죄였다. 당시의 정치가들은 소크라테스가 젊은이들을 깨우쳐 반정부주의자들을 만든다고 보고 그를 제거하기로 했다고 학자들은 추측한다. 그는 배심원 투표에서 약 280 대 220의 비율로 유죄판결을 받았고, 기소자는 사형을 요구했다. 결과적으로 소크라테스는 그의 나이 70세에 독배를 마시고 죽임을 당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역사 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바로 그의 제자 플라톤이 그에 관한 내용과 그의 가르침을 후세대들에게 정리하여 전해주었기 때문이다. 플라톤이 청년시절인 20-21세쯤에 소크라테스의 문하생이 되었는데, 소크라테스가 B.C. 399년에 죽은 것으로 계산하면 소크라테스가 60세가 넘었을 때 청년 플라톤은 그의 제자가 되었고, 그의 나이 28세쯤에 스승이 불합리한 정치인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결과적으로 보면 플라톤은 약 7년이라는 짧은 기간 안에 스승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고 평생 연구하며 씨름해야 할 주제를 물려받게 되었던 것이다.

스승이 정치 권력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장면을 목격했고 그것이 인간의 삶에 있어서 얼마나 불합리한 일인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던 플라톤은 인간의 삶 가운데 그와 같이 억울한 일, 불합리한 일이 더 이상 발생하지 않도록 그의 정치 철학을 발전시켰던 것이다. 더 나아가 그러한 불합리를 방지하기 위해 개인과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교육학을 발전시켰고 자신이 직접 교육을 실시했다. 스승의 아픔과 고뇌와 통찰이 제자 플라톤에게 전해졌고, 제자는 스승으로부터 물려받은 문제들을 풀기 위해 평생동안 연구한 것이 오늘날 플라톤 철학이라는 열매를 맺게 된 것이 분명하다.


(Platon, B.C. 427/8-348)의 경우


플라톤은 스승이 정치권력의 악과 대중들의 무지에 의해 불합리하게 죽임을 당한 후 방황을 하며 한 때 피타고라스(Pythagoras of Samos, Ionian Greekc.570 –c. 495 BC) 학파에 가담한 적이 있다. 그리고 12년 동안 여러 지역을 순회하며 지혜를 추구하다가 40세가 되어 다시 아테네로 돌아왔다. 아테네에서 1년정도 정치에 가담한 적이 있지만, 곧 그만두고 41-2세때 아카데미아 (Academia)를 설립하여 그 역시 젊은이들을 가르치는데 남은 여생을 바쳤다. 35년 정도 가르치고 죽었는데, 그 학교는 동로마 제국이 529년 칙령을 통해 ““철학 강의와 토론””을 금지하여 해체될 때까지 9백년이나 유지되었다. 그리스 정부는 1926년에 아테네 중심지에 아카데미아를 설립하여 과학이나 예술 등 종합 연구기관으로 만들어서 플라톤의 철학과 정신을 계승하려고 한다.

아마데미아의 문에는 ““기하학을 모르는 자는 들어오지 말라”” (Let no man ignorant of geometry enter here)고 했는데, 기하학은 점, 선, 공간이 있는 입방체, 즉 3차원에 대한 생각이며 그러한 생각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은 철학을 할 자격이 없다고 한 것은 오늘날까지 많은 가르침을 주고 있다. 플라톤에게 수학은 곧 철학이고 논리학이었기 때문에 높은 수준의 철학을 하기 위해서는 기하학적 지식이 필연적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플라톤의 다섯가지 정 다면체, 즉 정사면체, 정육면체, 정팔면체, 정십면체, 정이십면체는 플라톤이 기하학을 통해 천문학을 설명하려 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삼단논법을 발전시킨 아리스토텔레스나 기하학을 집대성한 유클리드 (Euclid of Alexandria, B.C. 300-?)등이 아카데미아 출신이다. 플라톤은 80세에 죽었는데 죽는 순간까지 무언가 쓰고 있었기 때문에 ““쓰면서 죽은 철학자””로 전해지고 있다.

플라톤은 평생 영혼이 잘못되는 것은 감각을 통해 세계를 바라보기 때문이라고 가르치면서 그러한 문제를 극복하고 인간의 영혼을 가장 높은 경지까지 끌어 올리기 위해 노력했다. 사실 모든 철학자나 신학자들은 인간이 감각의 영향을 지나치게 받고 있기 때문에 많은 문제가 야기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많은 이견을 보이고 있다.

플라톤은 감각을 통해 알려지는 것은 실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즉 플라톤에게는 현실 (reality)은 비실재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는 모든 비 실재 너머에 있는 (혹은 가려져 있는) 진정한 형상, 즉 원형을 찾으려고 했다. 그 원형이 곧 영원한 진리요 참된 선이고, 그러한 참된 진리와 선을 회복하는 것이 곧 철학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 역시 이 세상에서 진리와 선을 완전히 회복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했다.

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방법대로 교육을 하여 더 이상 오류가 없는 철인정치, 즉 잘 배워서 진리에 적합한, 영혼을 고양시키는 정치가, 교육가,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해 다양한 교육이론을 제시했는데 그중 몇 가지 내용을 정리해보자.

 

부모로부터 격리시켜서 어버이의 버릇에 물들지 않도록 해야 한다 (ideal).

첫 10년 동안의 교육은 거의 체육이 전부가 되어야 한다

다음 10년간은 체육과 함께 음악, 시, 기초수학, 역사, 종교 등을 가르치며 도덕적 기초를 세운다

두 과정을 성공적으로 마치면 (이 때가 20세가 될 때인데, 이때 시험을 통과한 사람과 통과하지 못한 사람들 구분해야 한다), 다음 10년간은 과학 (mathematical science) 공부한다 과학은? 없는 것에 대한 탐구, 아직 잘 모르는 것에 대한 탐구 등. 수준이 높다.

과정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30세가 된 사람에 한해서 다음 5년간 철학 (dialectic)을 가르친다 (30세 이전에 철학을 배우면 장난삼아 논쟁을 하며 하루 강아지처럼 사람들을 물어뜯기 때문이다);

과정을 잘 마치면, 다음 15년간은 실제적인 정치학을 실습하면서 공부 (practical political training)하도록 한다 정치학- ““남”” (other)이라고 하는 문제. 남을 이롭게 하고 인도하는 일.

15년간의 실제적인 정치학을 잘 마친 사람은 이제 자신의 영혼을 ““선 그 자체”” (the good itself)까지 고양시키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나면 비로서 철인군주가 될 수 있는 모든 것을 갖추게 되는 때는 50세쯤에나 가능한 일이다. 결국 자기 자신의 완성. 이 부분 실패하면 결국 정치도 실패한다는 뜻이 될 수 있다.

이러한 교육을 완성하기 위해 플라톤은 먼저 10세 이상의 도시 주민들을 모두 시골로 보내, 어린이들을 격리시킴으로써 어린이들이 부모들의 버릇에 물들지 않도록 보호하는 일을 먼저 시행한 후에 교육을 시작할 것을 말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방법은 공교육을 활성화시켰지만 인간의 정서 등 많은 것을 고려하지 못한 이상적인 방법이기 때문에 오늘날에는 시행할 수 없는 내용이다.

현실에 맞지 않는 것이 또 한가지 있는데 기간이다. 5살 때부터 조기교육을 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모두 계산해 보면 첫 10년 + 다음 10년 + 5년 + 15년 = 40년인데 특히 정치학을 15년간 공부하도록 하는 것이 눈에 띈다. 결과적으로 보면 플라톤 은 5살때부터 40-45년간의 교육을 받아 50세쯤 되면 마침내 철인군주가 될 자격이 있다고 본 것이다. 당시 수명의 관점으로 보면 죽기 직전에 원로 들이나 가능한 일정이다.

플라톤이 스승 소크라테스의 지도를 받고 훌륭한 제자가 된 것처럼 그 자신도 아리스토텔레스라고 하는 훌륭한 제자를 남겼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나이 17 또는 18세 때 플라톤의 아카데미아에 들어가서 (당시 플라톤은 60세쯤) 20여년간 공부한 후 대 철학자가 되어 역시 청년들을 가르치다가 62세에 죽었다.


(Aristoteles, B.C. 384-322)의 경우


스승 플라톤의 가르침을 떠나서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상상할 수 없다. 아버지 니코마쿠스 (Nicomachus)는 알렉산더 대왕 (Alexander the Great)의 아버지 필리포스 2세 (Philip II of Macedon) 의 의료책임자로서 어렸을 때부터 이미 정치에 노출되어 있었고, 대단한 상류층에서 학문을 배웠다. 특히 알렉산더 대왕이 13-14세 일 때 약 2년 동안 가정교사를 했고, 그 이후로 각종 특권을 최대한 누리며 가장 광범위하게 철학 외에 기타 학문까지 섭렵할 수 있었다.

그가 37세가 되었을 때 스승 플라톤이 죽자 독립하여 활동하다가 53세때 류케이옴 (TheLyceum)이라는 학교를 세우고 젊은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산책로를 따라 걸으면서 가르쳤기 때문에 "소요학파" (Peripatos, "逍遙學派)라 불린다. 플라톤의 아카데미아는 수학, 논리학, 정치철학을 중점적으로 가르친 반면에 류케이옴에서는 생물학과 자연과학을 중점적으로 가르쳤다. 그가 남긴 저서는 수백권에 이르고, 오늘날 그가 창작한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는 과학이나 철학을 할 수 없다고 할 정도로 근대 과학과 학문의 기초를 놓았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실체(實體, ousia)는 현상 세계에 실재하며, 감각기관에 지각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실세계, 즉 존재하는 모든 것 (눈에 보이는 것)이 질료 (matter, hyle)이고, 이상 (idea)은 질료 (실체)의 한 형상 (form, eidos)일 뿐 이라고 했다. 플라톤이 실재하는 것은 실체가 아니고 그 너머에 원형인 실체가 있다고 한 것과는 정 반대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오히려 실재하는 것이 실체이고, 형상을 가정하고 실체를 찾는 것은 잘못이라고 했다.

여기에서 한가지 주목해야 할 사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형상”” (form)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 모든 형상이 모든 사물과 연결되어 있다고 본 것이다. 즉 어떤 실체가 완전히 독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형상과 연결되어 있는데, 다만 형상과 질료로 나누는 것은 설명하고 이해하기 위해 개념적으로만 나누는 것(Most things are composed of matter and form. However, matter and form are a unity and can only be separated conceptually)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 플라톤이 제시한 문제를 받아들이면서도 그 안에서 가장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와 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현실적인 철학은 그의 대표적인 저작 『니코마코스 윤리학』 (Nichomachean Ethics)에 집약되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의 관심사는 인간의 행복(eudaimonia)이었는데, 1권부터 10권까지 일관되게 ““행복한 삶””을 추구하고 있다. 1권 7장에 따르면, 인간의 고유 기능은 ‘탁월함에 따르는 이성적 영혼의 활동’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인간의 최고 선이며 행복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추구한 두가지 탁월함이 있는데, 지적인 탁월함과 도덕적 탁월함이다. 지적인 탁월함은 유전과 교육의 결합을 통해 생겨나고 도덕적인 탁월함은 모방, 실천, 습관 등을 통해 얻어진다고 했다.

이 모든 이론과 교육학의 종합은 플라톤의 지나치게 이상적인 교육의 문제를 극복하고 매우 실제적인 삶의 문제에 집중해서 가장 실천적인 대안을 제시한 것이다. 인간이 행복하기 위해 지적으로, 도덕적으로 높은 경지에 도달하도록 고양시키는 것은 탁월한 선택이며 방법이라 할 수 있겠다.

이제 소크라테스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로 이어지는 차영지 운동을 정리해 보자. 플라톤이 청년시절인 20-21세쯤에 소크라테스의 문하생이 되었는데, 소크라테스가 B.C. 399년에 죽은 것으로 계산하면 그 때 플라톤의 나이는 28세쯤이었다. 그렇다면 약 7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그토록 많은 내용을 배웠다는 뜻이 되는데 그는 정말 스승 못 지 않게 훌륭한 제자였음이 틀림없다.

플라톤이 스승 소크라테스의 지도를 받고 훌륭한 제자가 되었는데 소크라테스가 플라톤을 제자로 받아들였을 때가 스승은 60세가 넘었고 제자는 20세가량의 청년이었다. 스승이 노년에 젊은 제자를 받아들였고 비교적 7년이라는 짧은 기간에도 불구하고 그 영향력은 엄청나서 2500여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미치고 있는 것은 훌륭한 제자를 키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깨닫게 만든다.

이제는 플라톤이 60세쯤 되었을 때 그의 아카데미아에 20세가 안된 청년이 들어왔다. 그는 공부를 지나치게 열심히 해서 스승에게 꾸중을 들었다고 전해지는데 15년 정도 공부한 후에 그는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요 철학자가 될 수 있었다. 그 역시 학교를 설립하여 가르치다가 62세에 죽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 내용을 종합해보면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좋은 스승을 만나라.

둘째, 공부하는 기간보다 중요한 것이 내용이다. 즉 무엇을 배우는가 가 더 중요하다.

셋째, 스승에게 배워서 스승을 넘어선다. 분명 스승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웠지만 훌륭한 제자는 스승 안에 갇히는 것이 아니라 스승을 극복하고 넘어서야 한다는 것을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잘 보여주고 있다.

넷째, 제자들을 통해 대를 이어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

상기한 내용들을 모두 담고 있는 것이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시고 비교적 짧은 3-4년 간의 기간 안에 삶을 변화시키고, 이 땅에 있는 어떤 것보다 소중한 내용, 즉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구원,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가르쳐 주신 내용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통해 복음은 오늘날까지 우리에게 전해졌고 앞으로도 계속 전해져야 할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떠나실 때가 되었다고 언급하시자 제자들이 불안해하며 물었다.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

그 때 예수님은 제자들을 달래시며 다음과 같이 상상하기 어려운 말씀을 주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요 14:12).

우리는 철학자들의 예를 통해 좋은 영향을 받을 수 있다. 오늘날도 사회 속에는 이와 같은 차영지 운동들이 지속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과학계나 체육계나, 연예계 등 다양한 분야에서 차영지 운동들이 왕성하게 일어나고 있다. 축구를 볼 때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물론 골을 넣는 장면일 것이다. 하지만 그와 다른 감동을 주는 인상적인 장면은 선수들이 입장할 때 반드시 어린이들과 손을 잡고 입장하는 장면이다. 바로 그것이 축구가 세계에서 가장 인기있는 스포츠로 자리잡게 하는 장기적인 계획임을 보여주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국제 축구연맹 (FIFA)은 이미 축구가 전 세계에게 가장 인기있는 스포츠 종목으로 다음세대까지 이어지도록 어린이들과 전 세계 인구를 흡수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도, 기독교도 바로 그와 같이 장기적인 계획을 가지고 다음 세대를 개척하는 것이 차영지 운동이다. 사실 차영지 운동은 예수님이 하신 것을 배우고, 그대로 순종하는 것이다. 또한 철학자들로부터 배우듯이, 축구 대회를 보면서 배우듯이 그렇게 세상으로부터 끊임없이 배우면서 실천해야 할 것이다. 자기가 이길 수 없는 상대를 만났을 때는 미워하거나 두려워서 도망치지 말고 그 적의 주위를 서성거리면서 배우면 마침내 상대를 이길 수 있게 될 것이다.

허천회 목사, 토론토 멀씀의 교회
허천회 목사, 토론토 멀씀의 교회

 


요약


 

●소크라테스처럼 질문하고, 배우고, 헌신하라

 

“차영지 운동”은 단순한 교육운동이 아니라, 다음 세대를 살리고 교회를 깨우는 신앙 운동이다. 이를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철학자 소크라테스를 떠올려 본다.

소크라테스는 지식을 전달하기보다, 대화를 통해 영혼을 깨우는 교사였다. 그는 “너 자신을 알라”는 말로 사람들에게 스스로를 돌아보게 했고, 진리를 향한 질문을 통해 겸손히 배워갔다. 그는 정치적 권력보다 ‘올바른 영혼’을 추구했고, 결국 독배를 마시며 진리 앞에 순종하는 삶을 마감했다.

차영지 운동도 마찬가지다. 가르치는 자가 먼저 질문하고 배우며, 다음 세대와 함께 진리를 찾아가는 여정이다. 우리는 소크라테스처럼 질문하고, 동행하며, 마지막까지 진정한 가치에 헌신해야 한다.

이 운동은 교회를 살리고, 다음 세대의 영혼을 깨우는 생명력 있는 사역이 될 것이다.

 

 

●플라톤

 

플라톤은 스승 소크라테스의 죽음 이후 방황하다가 피타고라스 학파에 참여하고, 12년간 지혜를 탐구한 뒤 40세에 아테네로 돌아와 아카데미아를 설립했다.

아카데미아는 약 900년간 지속된 최초의 고등교육기관으로, “기하학을 모르는 자는 들어오지 말라”는 문구로 철학과 수학의 통합을 상징했다.

플라톤에게 수학은 철학과 논리의 기초였으며, 그의 정다면체는 천문학적 질서를 설명하려는 시도의 일환이었다.

그는 감각의 세계를 실재로 보지 않았고, 보이는 현실 너머에 있는 진정한 형상(이데아)을 추구했다.

참된 진리와 선은 현실을 넘어 있으며, 철학은 이를 회복하는 과정이라고 보았다.

플라톤은 철인정치를 꿈꾸며, 영혼을 고양시키는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한 이상적 교육과정을 제시했다.

교육은 체육부터 시작해 수학, 과학, 철학, 정치학으로 이어지며 총 40~45년에 걸쳐 이루어진다.

이상적 교육은 부모로부터의 분리와 공동체 중심 교육을 강조했으나, 오늘날에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그는 생애 마지막까지 글을 쓰며 죽었고, ‘쓰면서 죽은 철학자’로 불린다.

플라톤은 아리스토텔레스를 제자로 길렀고, 그의 사상은 서양 철학과 교육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철학자들의 제자 교육

 

소크라테스 → 플라톤 → 아리스토텔레스: 사제(師弟) 관계를 통한 사상의 계승과 발전

플라톤: 이상적 철학, 아카데미아 설립

아리스토텔레스: 현실 중심 철학, 류케이옴 설립, 형상과 질료, 행복(eudaimonia) 추구

 

제자됨과 배움의 원칙

좋은 스승을 만나라

기간보다 ‘무엇을’ 배우는지가 중요

스승을 넘어서는 제자가 되어야 함

제자를 통해 영향력을 계승한다

 

✝️ 예수님의 제자 교육과 차영지 운동

짧은 3-4년 교육, 본질(하나님의 나라) 전달

제자들이 스승을 넘어 ‘더 큰 일’ 수행 (요 14:12)

복음의 세대 계승, 장기적인 시야

 

세상 속 차영지 운동의 예

FIFA의 어린이 입장 동반 장면: 다음 세대 계승 전략

교회도 다음 세대를 준비해야 함

배움을 통해 세상에서 실천하며 영향력 확장

 

핵심 메시지:

“진짜 스승은 제자를 통해 역사를 만든다. 차영지 운동은 예수님처럼 가르치고, 세상처럼 배우며, 다음 세대를 준비하는 장기 전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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