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것이 내게 한 것"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있을 심판에 관한 모습이다. 주님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25:31). 심판 날 재판장이신 주님은 자기 보좌에 앉아 모든 사람을 양과 염소로 구분한다. 양은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으로 나눈다. 양은 성도를 지칭하고, 염소는 불신자를 가리킨다. 양은 성도들 중에서 진실한 그리스도인이고, 염소는 주님을 영접했으나 진실한 믿음이 없는 거짓 그리스도인을 상징한다.


"양=참된 그리스도인=의인"


은 참된 그리스도인이다. 본문에서는 의인이라고 표현한다. 인자는 양 무리, 즉 의인을 향해서 축복한다. “내 아버지께 복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34). 양무리에 속한 사람들은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다. 또한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을 자들이다.

양 무리에 속한 분들이 이런 큰 복을 받은 비결이 있다. “내가 주릴 때에 먹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되었을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35,36).

의인들은 말하기를 우리는 그렇게 한 적 없다고 한다. 임금이 의인들에게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40).


"의인 평가 기준: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


의인의 평가 기준은 아주 사소한 것이다.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 했다. 양무리에 속한 의인들은 사랑의 동기가 순수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로 굶주린자. 병든 자, 헐벗은 자, 가난한 자 등 사회적 약자이며 관심의 대상에서 벗어난 분들을 도와주었다. 이런 분들은 도와줘도 나에게 다시 돌아올 것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섬겼다. 양무리에 속한 의인들은 성경 말씀을 실천하는 분들이었다. 동기가 참으로 순수했다.

나에게 돌아올 것이 있든 없든 관계하지 않고 오직 율법의 말씀 지켰던 분들이다. 레위기 199절에서 18절 말씀을 보면,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고, 가난한 자를 돌봐주라는 율법의 명령을 지켰다.

주님도 동일한 말씀을 하셨다.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노라. 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14:12-14).


"참 믿음의 증거: 동기의 순수성"


참 믿음의 증거는 동기가 순수해야 한다. 내게 돌아올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명령대로 말씀을 실천하는 행위이다. 야고보 사도의 표현대로 하자면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되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을 빌리자면, 의인들은 굶주리고, 목마르고, 병들고, 헐벗은 자들을 만날 때마다 외면하지 않고 도와주었다. 내 기분에 상관하지 않고, 내 형편에 상관하지 않고 변함없이 말씀을 실천하였다.

또한 의인들은 자신의 선행을 잊어버렸다. 주님께 칭찬을 받았는데도 불구하고 자신들은 그런 선행을 한 적이 없다고 한다. 자신의 선행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해야 할 의무와 사명을 다한 후에 자랑하지 말고 오히려 나는 무익한 종입니다(17:10). 자신을 낮추고 겸손한 자세를 갖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우리의 작은 선행도 다 기억하고 계신다. 또한 천국에서 반드시 보상을 하신다. 사람에게 보상을 받으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께 보상을 받으려는 삶의 자세를 갖는 것은 바람직한 신앙의 모습이다.

교회를 개척하고 섬기는 모든 목사님들과 성도들은 비슷한 마음으로 교회를 섬긴다. 교회를 향해서 오직 섬기는 것만 좋아한다. 섬김을 통해서 칭찬받고자 하는 분들은 거의 없다. 오직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 그 자체가 좋아서 기쁨으로 봉사하고 섬긴다. 모든 봉사를 할 때 하나님만 아시면 된다. 사람과 계산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기쁨이 더욱 충만하고 은혜가 흐른다.

이것이 교회이다. 이것이 천국 같은 교회의 모습이다. 이것이 양무리의 모습이다.


"왼쪽 염소=불신자=저주받은자들"


왼쪽으로 구분된 염소 무리들에게 임금이 그들에게 저주를 퍼붓고 있다. “저주를 받을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41)고 했다.

염소 무리들은 어리둥절한 모습이다. 자신들에게 떨어진 저주와 지옥의 형벌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임금의 처사가 아주 가혹하다고 느낀다.

우리도 양무리에 속한 사람들과 같이 약자들을 다 돌보았다고 한다. 그런데 임금의 평가는 아주 냉혹하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45).

염소 무리에 속한 사람들도 약자들을 돌봤다. 그러나 사랑의 잣대가 항상 일정하지 않았다. 사랑의 잣대가 성경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이었다. 자신의 기분에 따라 사랑의 실천이 달라졌다. 자신의 기분이 좋으면 돌보고, 자신의 기분이 상하면 돌보지 않았다. 또한 동기가 순수하지 않았다. 나에게 이익이 되는 사람은 돌보고, 나에게 이익이 없는 사람은 돌보지 않았다.

그 결과, 염소 무리들은 영벌에 처해지는 불쌍한 무리로 전락해버렸다.

마지막 날, 주님은 성도들을 양과 염소로 구분한다. 그 기준은 아주 작은 차이이다. 지극히 작은 자에게 복음을 실천했는가? 나에게 이익이 되고, 사업에 도움이 되고, 어떤 목적을 가지고 했다면 주님으로부터 인정받기는 어렵다. 이것이 성경의 기준이다.


"교회는 은혜로 봉사하는 곳"


교회는 구원의 은혜를 공짜로 받았다. 공짜로 받았기에 공짜로 나누는 것이다. 그 결과 초대교회처럼 서로 나누며, 서로 공생하며 공유하는 그런 공동체 시스템을 유지하는 것이다.

교회는 드리는 곳이다. 이것이 예배이다. 하나님께 자신의 최고의 가치를 다 드리는 곳이다. 드리면서 생색내지 않고 묵묵히 드리는 것이다. 그 드린 것을 세상을 향해 드러내지 않고, 함께 나누는 것이다. 이것이 교회이다.

의인은 영생에 들어가고 악인은 영벌에 들어가는 것이다. 신앙은 반드시 결말이 있다. 그 아름다운 복된 결말이 있기에, 사도바울도 그 나라를 사모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아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4:7,8). 마라나타.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2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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