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창세기 9:23, “노아 술취함으로 하체를 드러냄”이 동성애로 해석될 수 있는가?

A. 해석은 자유이지만 해석의 전제와 목표 그리고 수준을 말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성경은 기독교의 경전입니다. 개신교는 성경 66권을 정경으로 삼고 있습니다. 유대교나 기독교(개신교, 로마카톨릭, 동방정교) 모두 “오경”은 같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오경에 대한 해석이 달라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으로 나뉘었고, 열심당원, 에센네파로 형성되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오경에 대한 이해는 다양합니다. 그런데 기독교 경전인 성경을 해석하여 의미를 도출했기 때문에 기독교적 가치를 가진 의미라고 볼 수 없습니다.

창세기 9:18-27절까지 구문은 난해 구문 중 하나입니다. 비평주의를 신봉한다면 큰 문제가 없습니다. 포로 귀환 후에 편집한 문서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자를 BC 15세기(혹은 13세기) 모세라고 생각한다면 여러 난해한 문제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모세오경의 저자를 모세라고 전제합니다. 큰 난제 중 하나는 아버지의 하체를 본 것은 함인데(22절), 저주는 가나안이 받은 것입니다(25절). 그래서 가나안이 자기 아버지에게 고자질해서, 함이 인지했을 것이라고 추론하기도 합니다. 노아가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벌거벗은 것도 쉽게 해소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닙니다(21절).

그런데 “노아의 하체”를 동성애 관련 의미로 연결하는 것은 좀 더 황당한 제시라고 생각합니다. 하체 노출은 단순한 하체 노출이 아니라 “변태적 성행위”와 관련되었다는 해석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변태적 성행위도 문제가 없지 않지만, 동성애까지 확장시킨 것은 더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동성애라고 할 때에는 근친상간까지 추가되기 때문입니다.

(창 9:22) 가나안의 아버지 함이 그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그의 두 형제에게 알리매

(창 9:23) 셈과 야벳이 옷을 가져다가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히브리어 ‘보다(רְא, 22, 23절)’를 영어에서는 see(saw and not see)로 번역했습니다. 함이 한 행동(see)과 셈과 야벳이 한 행동(not see)은 반대되는 행동입니다.

첫째, 구약성경에서 ‘보다(raah)’는 약 1300회 정도 등장하는데, 단순하게 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에서 ‘알다(yadah)’가 성 관계(동침하여)로 표현할 때가 있습니다(창 4:1). ‘야다’가 ‘보다’는 의미도 있지만, “경험하여 체득한 지식”을 의미합니다. raah와 yadah는 전혀 연관성이 없는 어휘입니다.

둘째, 근친상간의 의미로 해석하려는 경향입니다. 아들이 아버지의 하체를 범한 것으로 해석하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약성경(레위기)에서 ‘범한다(lie with)’는 어휘가 명확하게 등장합니다. ‘보는 것’과 ‘범하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차이입니다.

“단순하게 본 것”으로 저주를 선언한 것이 과하지 않느냐?는 반론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이 본문은 난해한 본문입니다. 명확한 것은 노아가 가나안을 저주했다(25절)는 것과 야벳이 창대하여 셈의 장막에 거하는 것(27절),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해야 하는 것(26절)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은 스토리의 개연성을 정확하게 연결시킬 수 없습니다.

성경이 해석되지 않을 때에, 부당하게 축약하거나 과대한 기재를 첨가하여 연결하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 명료한 의미를 붙들고 꾸준하게 성경을 읽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이 구문을 술취하여 실수하면 안 된다는 등의 해석은 윤리적 해석입니다. 성경해석은 기독론적 해석이 필요한데, 그리스도의 오심이 역사에서 진행될 때에 누구도 모르는 방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선지자들은 계시에 의존해서 가르치며 기록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아담의 아들 셋, 그리고 노아의 아들 셈의 후손으로 오시는 길은 신비입니다. 셈의 후손 중 아브람을 부르셔서, 아브라함의 후손, 다윗의 후손으로 오시는 다윗의 주님이 그리스도 예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한 신비를 알 수 없듯이, 하나님께서 구주로 오시는 것도 신비입니다. 그 신비를 기록하여 구원받은 자에게 기쁨과 지식을 주는 말씀이 성경입니다. 성경을 자기 목적의 해결책(solution)으로 활용하는 것은 악한 일입니다. 자기목적 성취가 타인을 파괴할 수 있는 용도로 사용되는 것을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악인이 힘써 선한 일을 하면, 그 선한 일의 결국은 지옥으로 인도하는 결과를 낳게 될 것입니다. 훌륭한 스님들은 지옥에 가서 중생들을 위해서 헌신하겠다고 합니다. 우리는 말로는 “하나님의 아버지, 어머니”도 만들 수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말이 아닌 능력, 하나님을 사랑할 능력과 사람을 유익하게 할 능력이 필요한데, 이 능력은 들음에서 납니다(롬 10:17). 읽음이나 봄이 아니라 들음입니다.

성경이 동성애를 옹호하고 지지하는 고전이라는 수준으로 해석하는 것은 부당합니다. 성경은 죄인을 구원할 구주의 오심과 구주의 은혜 그리고 주의 능력을 계시하는 생명의 말씀입니다.

고경태 목사(형람서원, 한영대 겸임교수)
고경태 목사(형람서원, 한영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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