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석운의 묵상일기】 다니엘서5:24-6:2 “눈부신 그의 아름다움을 상상한다”

  • 입력 2020.12.08 07:59
  • 수정 2020.12.15 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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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주님의 아름다움을 깨닫는 삶

방석운 목사 / 용인 하베스트교회 목사, 서울신학대학원 졸
방석운 목사 / 용인 하베스트교회 목사, 서울신학대학원 졸

다니엘은 벨사살 왕이 본 신비한 글자를 해석해주었다. 왕은 “메네 메네 데겔 바르신”이란 글자는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지만 뭔가 불안하고 두려웠었다. 다니엘은 이것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왕에게 설명해주었다. ‘하나님이 이미 왕의 나라의 시대를 세어서 그것을 끝나게 하셨다’는 뜻이다(단5:26-28) 이 해석을 들은 벨사살 왕과 거기에 있던 사람들은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지금 막강한 권세를 자랑하는 그가 크게 화를 내는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 좋은 이야기를 해주어도 될까 말까한 분위기에서 자신이 통치하는 나라가 망한다는 설명은, 신비한 글자를 보고 흙빛으로 변했던 얼굴이 참을 수 없는 붉은 빛의 분노로 변하게 하는 것은 아닐까?

그런데 놀라운 반응이 일어났다. 벨사살 왕은 다니엘의 해석을 듣고 약속한 대로 그 자리에서 그에게 새 옷과 금목걸이를 하사하며 나라의 셋째 통치자의 자리에 임명했다. 벨사살은 자기 미래에 대한 불행한 이야기를 듣고도 분노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아무 것도 모르는 것보다 뜻을 알게 되니 일단 시원해진 것인가?

다니엘의 지혜와 담대함이 한몫을 했다. 그는 왕에게 글자의 뜻을 해석하기 전에 먼저 선대 왕 느부갓네살의 전례를 말해주었다. 왜 느부갓네살이 잘나가다가 그런 어려움에 빠졌는가를 짚어주었다. 벨사살 왕도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스스로 자신을 높인 교만에 동일한 원인이 있었음을 밝혀주었던 것이다(단5:22-24).

왕은 이제야 오늘의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 이해했는지도 모른다. 사실 그는 다니엘의 해석을 듣기 전에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을 느꼈다. 그렇게 자신했던 자기 권위가 연회에서 갑자기 나타난 신비한 글씨 앞에서 손과 발이 떨리고 무릎이 덜덜거리며 주저앉을 정도로 아무것도 아님을 느꼈었다. 갑자기 생전에 경험해보지 못한 두려움이 자신을 덮쳤다. 그러나 그 현상보다 그가 정말 놀라웠던 것은 다니엘이 전해준 권위 있는 말씀 때문이었다.

벨사살은 이전에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자신보다 더 위대하고 높으신 권세가 있다는 사실을 처음 깨달았다. 바로 다니엘의 하나님이다. 따라서 다니엘의 해석이 자기가 기대했던 것이 아닌 최악의 뉴스를 전했다고 해서 그를 죽일 수 없다. 그는 다니엘을 통해서 그의 하나님을 인식했다. 따라서 다니엘이 전하는 그의 하나님의 형상과 권위 앞에 순전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

『Belshazzar’s feast』 by Rembrandt(1634 until 1639)
『Belshazzar’s feast』 by Rembrandt(1634 until 1639)

그렇다! 우리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은 참으로 위대하시다. 우리 주님의 형상과 권위는 놀랍다.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의 생명이 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움과 권세는 찬양받기에 합당하다. 이것은 단지 추상적으로 생각하거나, 빈말로 쉽게 할 수 없는 일이다. 우리 주 하나님 앞에서는 어떤 사람도, 어떤 권세도 무릎을 꿇어야 하며, 그분을 찬양해야 한다. 삼위일체시며 영원히 하나이신 하나님은 그의 영광에 의해 특징지어지며, 그 영광은 그의 성품이신 사랑과 그의 권위이신 능력으로 나타난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이다.

믿는 우리는 주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하고 예배하며 그분의 뜻을 따르는 일에 기뻐해야 한다. 신앙생활의 핵심은 주님의 아름다움과 능력을 계속 경험하는 것이다. 그분의 임재와 권세를 이해하고, 믿으며, 경험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과 교회의 표지는 다른 것이 아니다. 주님의 깊고, 넓고, 높고, 긴 그 사랑과 능력에 대한 경험을 증거 하는 것이다.

많은 신자들이 이것을 이해한다는 듯이 머리를 끄덕이고 입술로 아멘이라고 동의한다. 그러나 그것으로 부족하다. 우리 각자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는 눈이 열려야 한다. 아무리 주님을 따라야 한다고 말해봤자 우리가 먼저 주님의 권능과 아름다움을 보는 눈이 열려 있지 않다면 소용이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우리 주님의 영광, 곧 그의 아름다움과 능력을 볼 수 있을까? 이미 나타났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나타났다. 빌립이 예수님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라고 했을 때, 예수님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라고 말씀해주셨다(요14:8,9) 우리에게 이미 그 영광의 아름다움이 주어졌다. 그러면 도대체 우리는 지금 어떻게 해야 할까? 프랭크 바이올라의 말은 참으로 인상적이다.

“진실로, 주님의 아름다움은 비할 데가 없다. 나는 한 번도 스쿠버 다이빙을 해 본적이 없지만 바닷속 펼쳐진 경이로운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동영상은 많이 보았다. 이것 역시 우리를 압도하는 주님의 아름다움을 다각적으로 보여주고 가리키는 역할을 한다. 하나님의 지혜 뒤에, 하나님의 창조 뒤에, 그리고 우주 저 뒤에 심장이 있다. 사랑으로 고통 치는 심장이다. 당신과 내가 있기 전에 하나님은 사랑이셨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이 타락한 우리에게 임했을 때 그것이 은혜가 되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다. 당신이 예수님을 신뢰한다면 당신은 이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의 대상인 그리스도 안에 있다. 하나님의 이 사랑은 예수님과 그분의 경이로운 나라를 향한 온전하고 완전한 충성을 당신에게서 이끌어낼 것이다. 죄의식, 수치심, 종교적 의무, 강요 또는 두려움에서 생겨난 충성이 아닌, 왕의 아름다움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안목에서 나온 충성이다.”(프랭크 바이올라, ‘인써전스’중에서)

프랭크 바이올라, ‘인써전스’
프랭크 바이올라, ‘인써전스’

우리 신앙생활은 이것을 경험하는 것이며, 여기까지 가야 한다. 오늘 믿는 자의 인생에서 주님의 아름다움이 새롭게 인식되어야 한다. 우리를 괴롭히는 영적 지루함의 해결책은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인식하는 것에서 새롭게 깨어난다. 바로 복음이다. 복음은 하나님께서 살아계셔서 나와 우리와 세계를 다스리시고 계시며, 우리를 어둠에서 구원하여 빛 가운데로 인도하셔서 우리의 주님이 되어주셨으며, 우리로 이 땅에서 당신의 영원하신 목적인 하나님나라를 확장하고 완성에 이르도록 하는 사명과 비전을 주신 주님을 알게 한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 눈부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사모하고 상상한다. 그러나 그것은 저 멀리 있지 않다.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 나의 주님이시다. 만일 내가 그분 안에 산다면, 내가 주님을 사랑한다면 나는 언제나 경험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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