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뉴스를 보기가 겁난다. 지난밤 일어난 무슨 흉측한 사건, 사고 때문이 아니다. 거짓 때문이다. 공신력을 가져야 할 언론 매체는 자의적 해석이 지나칠뿐더러, 이제는 아예 팩트 자체가 거짓투성이다. 더 놀라운 것은 너무나 의도적이고 악의적이며, 집단적으로 함께 묶여 있다. 소위 ‘딥 스테이트’는 낭설이 아니었다. 음모자들이 활개 치는 것은 전 세계적인 현상이다. 우리는 보통 빛과 어두움의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전쟁이라고만 생각해왔는데, 이제는 눈에 확실히 보일만큼 거짓세력들이 광범위하게 펼쳐있다. 온 세상은 자기 왕국을 세우고자 하는 우상숭배가 춤추고 있다. 이제는 나만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 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과 관련하여 사람들이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이것은 영적 진리에 대해서만이 아니다. 이제는 육신의 눈과 귀와 입이 망가진 사람들이 수없이 많다. 자기가 믿고 싶은 것만 믿고, 듣고 싶은 것만 들으며, 말하고 싶은 것만 말하는 세상이다. 요즘만큼 죄악이 관영한 때가 있었는가! 예수님께서 말세에 깨어 있으라고 하신 말씀을 꽉 부여잡아야 한다. 역시 세상이 악할수록 분별이 중요하다. 불안한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오늘 다니엘서는 그 하나를 알려준다.
바벨론을 제압한 나라는 메대/바사 왕국이었다. 다니엘은 이때도 높은 위치를 유지하며 그 나라를 위하여 쓰임을 받는다. 다리오 왕은 제국을 통치하기 위해서 전국에 고관 120명을 세우고, 또 그들을 다스리기 위해서 총리 세 명을 세웠는데, 다니엘은 그중에 한 명의 총리로서 가장 탁월한 위치에 세워졌다(단 6:1,3)
이야기는 다시 흥미진진해진다. 뭔가 일어날 것 같다. 다니엘의 인생은 결코 평탄하지 않았다. 죽음의 위기를 몇 번씩이나 겪어왔다. 이번에도 또 다른 위기가 감지된다. 메대-바사국의 총리 두 명과 고관들의 시기로 인한 음모가 시작된 것이다. 그들은 다니엘에게서 약점을 찾기 시작했다. 그의 업무나, 도덕적 결함 등에서 그 허물을 발견하지 못하자, 그들은 다니엘의 가장 큰 장점이자 특징인 그가 경외하는 하나님과 그 법에 걸림돌을 만드는 법안을 다리오 왕에게 제시한다(단 6:4-8).
다리오 왕을 만족시키는 이 법안은, 누구든지 왕 외에 다른 대상을 경배하는 자들에 대한 처벌로서 그것을 어길 시의 형벌은 사자 굴에 던져 사형시키는 것이다. 음모자들은 나중에 이 법안이 철회되지 못하게 그 조서에 왕이 직접 도장까지 찍게 하였다. 참으로 교활한 자들이다. 인간들의 사악함은 매우 비상하다. 바울은 로마서 1장에서,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를 싫어하는 사람들에 대한 특징으로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고 말한다.
메대-바사국의 사악한 이 무리들은 다니엘이 모든 상황에서 빠져나가지 못할 정도로 함정을 만들어 놓았다. 오늘도 세상은 악함으로 우리를 노리고 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경외하는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이 타락한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우리는 이 질문을 순간순간 물어야 하고, 되새겨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다니엘이 반응한 것처럼 따를 수 있다.
“이에 다리오 왕이 조서에 왕의 도장을 찍어 금령을 내니라.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단6:9-10)
다니엘의 라이프스타일은 변함이 없다. 누가 보든지 아니든지 상관없다. 내가 이 삶을 실행하면 악인들이 얼마나 싫어하고 대적할지를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는 삶을 살아왔고, 지금도 그 삶을 멈출 수 없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한 삶이다. 중도에 큰 방해나 어려움과 위협을 받을지라도 주님을 마음에 두고 따르는 것을 포기할 수 없다. 세상이 매일같이 벌이는 음모와 수작이 어떤 것인지 뻔히 알지만, 우리는 매일 하나님께 나아가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감사의 예배를 드려야 한다. 사실 이것은 특별한 일이 아니다. 우리의 일상이다.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이 아닌가?
많은 신자들이 ‘알기는 하지만 솔직히 실제로 그렇게 살기는 어렵지 않은가?’라고 물을지 모른다. 어느 신실한 Y목사님이 ‘24시간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자’고 권면하자, 목회자라고 하는 사람들조차 오히려 ‘사람이 어떻게 24시간을 주님과 동행할 수 있나?’라고 힐난한다. 그러나 주님은 다른 길을 제시하지 않으신다. 매 순간 주님을 의뢰하라고 말씀하신다.
정말 누가 갈등하는가? 세상이 다 그런데 나만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야 하는가?라는 생각이 드는가? 누가 불안한가? 누가 정말 힘든 삶을 사는가? 하나님을 마음에 두고 지키는 것이 힘든가? 아니면 그 마음에 하나님을 상실한 채로 사는 것이 힘들고 불안한가?
누가 더 불안할까? 음모를 꾸미는 자들일까? 함정에 빠진 사람일까? 자신들의 계획대로 되어간다고 시시덕거리는 음모자들은 그 속이 괜찮을까? 잘 나가는 듯하지만 나중에 자신들의 계획이 틀어지는 한 건이 들통이 나면서 그 흔들리며 어두워지고 바빠지는 그 눈빛은 누구의 것일까? 인생은 어둠이 빛 가운데 드러나는 길을 가기 마련이다. 누가 더 불안할까?
우리는 인생길에 대해서 확신을 가져야 한다. 어둠의 삶과 빛의 삶은 극명하게 갈린다.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확신을 가진 삶이다. 세상이 악하면 악할수록, 그 범죄가 더 넓혀지고, 더 깊어질수록 우리는 주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과 소망이 더 커진다.
주님의 약속을 가진 우리는 불안할 필요가 없다. 주님을 마음 중심에 두는 사람, 소망의 약속 말씀을 날마다 기억하는 사람은 결코 불안할 필요가 없다. 더구나 이 악한 세상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명령하신 주님의 사명과 비전을 가진 우리는 든든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 목적 있는 삶을 가진 우리는 불안할 이유가 없다. 우리에게는 충분한 증거들이 있다. 에스더가 ‘죽으면 죽으리다’고 고백한 것처럼, 다니엘이 그러하는 것처럼, 사도 바울이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고 한 것처럼, 이천 년 교회사에서 수많은 경건한 이들이 그러해왔던 것처럼 우리는 불안하지 않는다. 누가 더 불안할까? 하나님을 마음 중심에 두지 않는 이들이야 말로 이 어둠의 세상에서 도대체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