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은 우리의 실수보다 우리가 행한 사랑에 관심 두셔

방석운 목사 / 용인 하베스트교회 목사, 명지대학교 & 서울신학대학원 졸
방석운 목사 / 용인 하베스트교회 목사, 명지대학교 & 서울신학대학원 졸

우리가 많은 실수를 하고 죄를 범하는 대상은 오히려 같은 그리스도인들끼리일 가능성이 크다. 오늘 아침 나는 어떤 기독언론에 포스팅 된 글을 보고 발끈해서 댓글로 그 사람을 쏘아 주었다. 코로나 때문에 예배제한을 받는 교회들의 어려운 호소에 대해서 그 사람은 그들을 향해서 놀렸기 때문이다. 우주적 교회로서 같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들인데 이해해주지는 못할지언정 그 사람은 그들을 향해서 조롱을 했다. 또 나는 그 조롱을 보고 그냥 넘어가지 못하고 댓글로나마 그를 야단치고 싶었던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서로 잘 안다고 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서로를 향해서 비난과 정죄를 일삼기가 쉽다. 이것만으로 오늘 나의 영성의 척도는 명백하다. 사도 요한의 편지를 읽기가 민망하다.

“여러분이 처음부터 들은 소식은 이것이니, 곧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인과 같은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한 사람이어서 자기 동생을 쳐 죽였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는 동생을 쳐 죽였습니까? 그가 한 일은 악했는데, 동생이 한 일은 의로웠기 때문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세상이 여러분을 미워해도 이상히 여기지 마십시오. 우리가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갔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이것을 아는 것은 우리가 형제자매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죽음에 머물러 있습니다. 자기 형제자매를 미워하는 사람은 누구나 살인하는 사람입니다. 살인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 속에 영원한 생명이 머물러 있지 않다는 것을 여러분은 압니다.”(요일3:11-15)

사도는 세상이 우리를 미워할 수는 있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는 서로를 미워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형제가 형제를 미워한다면 그것은 세상 사람에 속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인 것이나 같은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 오늘 아침 나의 언행은 부끄러운 일이 틀림없다. 순간적으로 가볍게 반응한 것이라고 변명할 것이 아니다. 나나 그나 오십 걸음을 도망친 사람이 백 걸음 도망친 사람을 비웃는 ‘오십보백보(五十步百步)’일뿐이다. 일단 회개할 일이다.

그러나 형제간에 미움과 다툼보다 더 못난 일이 있다. 그것은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는 일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서로 마음과 생각이 달라 실수를 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잘못보다는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에 초점을 둔다. 그리스도인은 서로 사랑해야 한다. 이유는 우리 그리스도이신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행하신 일 때문이요, 또한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을 위해서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처음에 서로 누가 더 큰가를 놓고 시기하고 경쟁했다. 그러나 주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성령의 강림이 그들의 삶을 바꾸어 놓았다. 이후 예수님께서 부탁하신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은 초대교회의 삶의 특징이 되었다. 물론 1세기 교회 모두가, 그리고 계속해서 그 삶을 지켜나간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니까 사도 요한이 이 교훈을 다시 교회와 형제자매들에게 부탁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자매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누구든지 세상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 자기 형제자매의 궁핍함을 보고도, 마음 문을 닫고 도와주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이 그 사람 속에 머물겠습니까? 자녀 된 이 여러분, 우리는 말이나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과 진실함으로 사랑합시다.”(요일3:16-18)

세상이 교회를 힘들게 하고 미워하며 심지어 박해를 하는 등 환란이 크면 클수록 가장 소중한 것은 바로 우리 서로간의 사랑이다. 오직 그리스도께서 주신 그 사랑으로 우리가 서로에게 대할 때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다. 특히 교회 내에 어떤 형제, 자매의 궁핍함과 곤란을 보고도 넘겨버릴 수는 없다. 만일 우리가 입으로만 사랑이라고 말하고, 실제로 몸으로 서로 사랑에 헌신하지 않는다면 주님께서 나를 위해서 죽으신 그 사랑의 가치와 진리는 내게 어떻게 되는 것인가? 사도 요한은 엄중히 경고한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진리에서 나지 않았음이고,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경우에만 진리 가운데 있는 사람임을 확신할 수 있다고 선언한다(요일3:19-22).

오늘 내 삶의 척도는 다른 것이 아니라 형제사랑에 있다. 이것만큼 분명한 것은 없다. 실수는 회개하고 고치면 된다. 그러나 사랑할 일, 사랑할 사람을 눈앞에 두고 있다면 오늘 마땅히 그 일을 행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눈에 보이는 형제에게 사랑할 것을 말씀하신다. 그것이 곧 그분을 사랑하는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우리의 잘못과 실수는 서로 ‘오십보백보’다. 그러나 형제 사랑에서는 결코 오십보백보가 되어서는 안 된다. 주님은 당신의 사랑을 우리에게 모두 쏟아 주셨다. 주님은 온 마음과 온 뜻과 온 힘을 다해서 그 사랑을 부어주셨다. 우리 또한 주님의 사랑을 행함에 있어서 전심으로 행하는 삶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그 척도는 서로 다르다. 우리는 더하고 더해도 된다. 우리 안에서 행하는 사랑의 척도는 높을수록, 많을수록 기뻐할 일이다.

“하나님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대로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리스도께서도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시다는 것을, 그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우리는 압니다.”(요일3: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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