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보름 전에 나는 서산에 있는 제법 규모 있는 S교회에 가서 말씀을 전했다. 코로나에도 불구하고 이날 저녁예배 시간을 위해 꽤 많은 성도들이 마스크를 쓰고 자리에 앉아 있었다. 처음부터 뭉클한 마음이 든다. 준비한 말씀을 전하면서 나와 회중들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주님의 사랑과 아직 주님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잃어버린 영혼들에 대한 간절한 아버지의 사랑을 느꼈다. 결국 나는 설교 중에 속에서 터져 나오는 울음을 참지 못했다. 나 역시 주님의 그 애틋한 사랑을 다시 확인하였기 때문이다.
오늘 다니엘서의 이야기는 한 사람의 애절한 마음을 보여준다. 메대/바사국 다리오 왕은 신하들의 시기와 음모에 걸려들어 스스로 허락한 자신의 법률 때문에 그렇게 총애하던 다니엘을 죽이게 만들었다는 사실에 괴로워한다. 그는 어떡하든지 이 상황을 되돌려보려 하지만 신하들 앞에서 자신의 권위를 망칠 수는 없다. 다리오 왕은 그날 하루 종일 저녁 늦게까지 다니엘을 구원할 온갖 방도를 찾으며 고민하고 번민했다(단6:14).
이 신하들은 왕을 위해 있는 자들이 아니었다. 그들의 마음은 차갑고 무서울 정도다. 왕이 다니엘을 구하고자 하는 마음을 알면서도 그들은 자신들의 궤계에 박차를 가한다. 이들은 왕이 명한 권위를 그 누구도 고칠 수 없다고 재차 강조하며(단6:15) 왕이 다른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하게 쇄기를 박는다. 그들은 결코 충성된 신하가 아니다. 정말 악인들이다. 악인은 달리 악인이 아니다. 그들의 마음에 사랑은 전혀 찾을 수 없다.
반면에 다리오 왕의 마음은 너무나 다르다. 어쩔 수 없이 형 집행 명령을 내리지만 사자굴에 던져질 다니엘을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질 듯 아프다. 왕의 자리에 앉아 큰 나라를 통치한다는 것은 혼자의 힘으로는 어림도 없다. 주변에 지혜롭고 총명하며 신실한 동역자들이 뒷받침해주어야 한다. 그러나 그만큼 적절한 사람들을 찾기가 쉽지 않고, 설사 능력 있는 사람을 찾았을지라도 그 사람이 자신의 마음과 연합하기란 정말 어렵다. 그러나 다니엘은 다리오에게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어디서 이런 사람을 다시 구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나 이것은 결코 나의 손해 때문만이 아니다. 다리오가 다니엘을 아끼는 마음은 단지 자신의 유익만을 위한 것은 아닐 것이다. 자기 통치의 사역만을 위한 것이라면 이렇게까지 다니엘을 향한 마음을 불사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사랑하는 다니엘을 위해서 그가 해줄 수 있는 마지막 말이 있다. “네가 항상 섬기는 너의 하나님이 너를 구원하시리라.”(단6:16). 이 말만큼 진정하며 옳은 말은 없다. 자신으로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자신에게 온 충성을 다했던 신하 다니엘을 아끼는 간절한 마음이 여기에 담겨 있다. 왕은 다니엘이 그토록 소중히 여기는 그 하나님께 간절히 그를 맡긴다.
다리오 왕이 자기 사람을 아끼는 마음이 충분히 전해진다.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갔다. 다니엘이 사자 굴에 던져진 시각 이후 금식과 모든 사적인 행위를 그만두었다. 뿐만 아니라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날이 밝자마자 새벽에 급히 사자 굴로 달려갔다. 굴 가까이에 이를 때에 슬피 울며 ‘다니엘아, 살아 있느냐?! 하나님이 너를 구원하였느냐?!’라고 소리 질렀다. 이 얼마나 애절한 마음인가! 한 사람을 살리고 싶은 그의 마음은 정말 남다르지 않은가!
이 이야기는 그 어떤 드라마보다 흥미진진하다. 그러나 이것은 연극이 아니다. 여기에는 절절하고 애절한 가슴 아픈 한 사람의 진정성이 돋보인다. 자기 실수로 인해 가장 좋아하는 것을 잃어버리게 된 한 사람의 통렬한 사랑의 이야기다. 하늘을 감동시키는 이야기다.
이 스토리에서 나는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로 연결 지을 수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당신이 사랑하시는 자녀들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애절하고 안타까운 마음을 엿볼 수 있다. 물론 하나님은 함정에 빠지거나 스스로 실수하시는 분은 아니시다. 오히려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들을 향해 그들이 다시 회복하도록 우리를 향해 구원의 손길을 내미셨다. 죄의 구렁텅이에 빠진 인간들을 향해 하나님의 그 애절하고도 절절한 사랑의 마음이 역사 내내 이어지고 있다. 한 영혼을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은 성경 곳곳에서 나타나고, 역사 가운데 하나님의 그 간절한 부르심이 우리를 향해 울려 퍼진다. “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물음을 받았으며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에게 찾아냄이 되었으며 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나라에 내가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노라 하였노라. 내가 종일 손을 펴서 자기 생각을 따라 옳지 않은 길을 걸어가는 패역한 백성들을 불렀나니”(사65:1,2)
하나님의 이 애절하고 절절한 사랑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이는 누구인가? 만일 우리가 이 호소의 소리의 듣고, 그 손길의 따뜻함을 느낀다면 얼마나 큰 축복인가! 그런데 바로 우리가 그런 사람들이다. 우리는 주님이 불쌍히 여기시는 그 마음으로 인해 구원에 이르렀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보셨다.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마9:36). 그리고 내게 그 구원의 손길을 내주셨다. 하나님의 애절하고 절절한 사랑만이 구렁텅이에 있는 사람들을 구한다.
그날 S교회에서 영혼구원에 대한 말씀을 전할 때 나의 옛이야기를 증거 하지 않을 수 없었다. 38년 전 흉부외과 병동에서 두 번의 폐종양 절제 수술을 받고 죽음의 두려움 가운데 누워있을 때, 40대 초반의 한 중년 여인이 주님의 그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내게 다가와 하나님의 그 사랑을 나타내 주었다. 그리고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았고, 주님을 영접했다. 내 인생을 죽음에서 구원한 것은 아버지의 그 마음을 알고 내게 그 사랑을 그대로 전해준 한 사람 때문이었다. 이 마음, 이 애절하고 절절한 사랑이 한 사람을 어둠에서 구원한다. 복음이다. 전하는 자의 그 마음이 없으면 어찌 듣으리오!
다니엘은 그 새벽에 사자 굴에 이른 다리오 왕의 그 애절한 소리를 들었다.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종 다니엘아 네가 항상 섬기는 네 하나님이 사자들에게서 능히 너를 구원하셨느냐?!”(6:20). 우리는 어떠한 경우에도 이 주님의 마음에 대해서 사랑이 식거나 냉정해서는 안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