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창 1:1). 의지가 아닌 말씀으로 창조하셨다. 여호와의 영이 수면 위를 운행하셨다(창 1:2). 하나님의 말씀은 실체인 로고스(Logos)이다(요 1:1). 로고스께서 모든 만물을 창조하셨다(요 1:2-3).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창조되었다(창 1:26). “형상(체렘)과 모양(데무트)”은 둘이 아닌 하나로 이해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으로 축약해서 사용한다. 인간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은 여러 형태로 설명한다. 우리는 언어 기능도 하나님의 형상의 범주에 있다고 밝힌다.

언어의 기원(origins of language)에 대한 이해는 신(神) 기원에서 인간 기원(자연 발생설)으로 전이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언어의 기원을 하나님께 있음을 견지하고 있다. 인간 기원의 근거를 합리적으로 제시하지 못 한다.

최정호 목사는 언어를 “계시언어와 타락언어”로 구분하면서, 또 다르게는 “타락 이전의 언어”와 “타락 후 유일한 언어 그리고 다(多) 언어”로 구분한다. 계시 언어에만 구원이 있고, 타락 언어에는 구원이 없다. 그런데 계시 언어가 타락 언어의 매개 없이 사람에게 전달되지 않으며, 타락 언어의 매개 없이 수용할 수도 없다. 우리는 언어 체계 외에 다른 방식으로 정보를 수용한다는 주장에 대해서 침묵해야 한다.

우리는 타락 이전의 언어에 대해서 알 수 없으며, 타락 이후의 유일한 언어 체계에 대해서도 알 수 없다. 우리는 창세기 11장의 바벨 사건 이후 분화된 언어의 세계에 살고 있다. 창세기 11장이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면 의미가 없겠지만, 사실로 본다면 언어 문제의 일차는 타락이고, 이차는 분화이다. 2020년 인류는 77억이고, 7,359개의 언어가 있다고 한다. 성서공회연합회(United Bible Societies, UBS)는 2020년 8월 기준으로 성경전서를 704개 언어로 번역했다.

언어는 증가될까? 소실될까? 인간 기원에 의한 체계라면 언어는 발달될 것이다. 그러나 자연적으로 언어는 소멸되고 생성되는데, 소멸되어가고 있는 상태이다. 언어 소멸에 가장 위협을 주는 것은 소통속도증가 그리고 AI의 등장일 것이다.

인간은 공간과 시간 그리고 언어의 범주 안에 있다. 인간은 자기 공간에서 자기 언어를 구사할 때 자기 시간을 점유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담의 타락으로 공간과 시간은 중립적이지만, 창조가 타락되었고(롬 8:22), 언어도 타락으로 심각하게 왜곡되어 있는 타락언어이다.

성경에서 언어, 혀(舌)에 대한 제시는 매우 중요하게 제시한다. 인생은 어떤 행위나 업적보다 혀를 다스리는 것이 관건일지도 모른다. 혀는 내면을 드러내는 유력한 통로이고 법적 수단이다. 세 치의 혀는 세계를 정복할 유일한 방편이다. 세치의 혀는 사마천의 사기에 ‘세 치의 혀가 백만 명의 군대보다 더 강하다.’는 삼촌지설(三寸之舌) 강어백만지사(彊於百萬之師)의 말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서양에서는 “웅변은 은이고 침묵은 금이다”라고 해서 언어 절제와 “펜은 칼보다 강하다”고 문자의 중요성을 말한다.

기독교는 경전 해석을 근거한 복음 선포를 체계화했다(행 2장). 아무리 좋은 말씀이라 할지라도 경전에 근거하지 않는 말씀에 권위를 두지 않으려 한다. 또한 아무리 좋은 말씀이라 할지라도 교회 사역자가 아닌 행위에 대해서 지양하고 있다. 언어의 모습이 합당하고 언어 사용이 정당하도록 세우는 것은 기독교에 매우 부합된다. 그리스도인이 언어 파괴를 주도할 수 없다. 성경을 해석하고, 해석하여 선포된 말씀을 경청하여 준수하는 의식 체계를 정확하게 확립해야 한다.

언어의 기본은 논리(Logic)이다. 그러나 수사학(Rhetoric), 언어활동의 양태에서 로고스(Logos, 화자의 생각과 감정의 표현)가 전체가 아닌 에토스(Ethos, 화자의 신뢰성)와 파토스(Pathos, 청자에 대한 배려, 공감)를 갖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언한 수사학은 어느 분야에서도 부정하지 못하고 유지되고 있다. 인간은 자기의 강점을 잘 계발해서 타인을 설득하는 능력과 기술이 있어야 한다. 단 하나님 앞에 수사법이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숙지해야 한다.

우리가 말하는 언어는 껍질(표상, 기호)을 말하기도 한다. 인간은 표상 언어의 한계를 초월할 수 없는 것이 특징이다. 단 기독교 교리 문장은 인간 합리적 언어 체계가 아닌, 그리스도인이 믿는 믿음의 내용을 담은 문자이다. 교리 문장이 이해된 문장이라면 비트겐슈타인 등 현대 철학자, 현대 신학자들이 말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기독교 교리 문장은 작성자들이 이해한 문장이 아니라, 자기들이 가진 믿음의 신비를 담은 문장이다. 이러한 문장이 잘 구사한 사람은 종교개혁시대의 마틴 루터인 것 같다. 루터가 표현한 믿음의 내용을 합리적 사고로 검토할 때에 많은 충돌이 발생한 사례들이 있다. 사도 베드로께서 성경을 함부로 풀지 않도록 경고하셨다(벧후 3:14-17). 성경과 교리 그리고 믿음의 문장을 비견할 수 없다. 합리적이지 않지만 그리스도인으로 동질이 문장을 합리적으로 해소하려고 할 때는 큰 혼란이 발생할 수 있다. 기독교 신비를 합리화할 때 교회는 큰 분란이 일어났다. 그러나 또한 기독교 신비를 맹목적으로 이끌 때도 혼란, 무질서가 일어났다. 기독교를 세우는 것은 오직 진리의 말씀과 주의 성령의 조명으로 이루어진다. 진리의 말씀, 계시 언어는 오직 타락 언어를 매개로 전달되는 것이 파라독스(paradox)도 아닌 신비(mystery)이다.

헤르더(Johann Gottfried von Herder, 1744-1803, 칸트의 제자), 「언어의 기원에 대하여」 (1770년) (조경식 역, 한길사, 2003년)

고경태 목사(형람서원, 한영대 겸임교수)
고경태 목사(형람서원, 한영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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