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매 맺는 가지(요 15:1-8)/사랑의 하나님(요일 4:7-21)/고난에서의 감사(시 22:23-31)/마음 문이 열리도록(행 8:26-40)

문철영 목사, 연세대학교 신과대(B.A), 본대학원 Th.M, 및 신학전공 Ph.D 취득,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역임, 호서대학원 강사역임, 노량진교회 부교역자 역임,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인천노회 제 37대 노회장역임, 수정교회 담임목사(1989. 6. 20~ 현재까지)
문철영 목사, 연세대학교 신과대(B.A), 본대학원 Th.M, 및 신학전공 Ph.D 취득,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역임, 호서대학원 강사역임, 노량진교회 부교역자 역임,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인천노회 제 37대 노회장역임, 수정교회 담임목사(1989. 6. 20~ 현재까지)

1. 열매 맺는 가지(15:1-8)

 

2019425일 수요일 오전 930분에 숙소를 떠나서 우리를 태운 버스는 다낭시내에 있는 한인교회로 갔습니다. 교회간판도 없었으며 큰길가에 여러 개인주택들이 들어서 있었고 골목길을 따라 개인주택 서너 채를 지나 들어가니 안쪽에 3층 건물의 상가모양으로 된 교회당으로 들어갔습니다. 큰 길에서 보면 교회를 찾기가 어려울 만큼 교회를 표시하는 간판이나 안내 표지판이 없었습니다. 본당은 2층이었습니다. 교회 이름은 다낭 비젼교회였습니다. 간판도 표지판도 붙일 수 없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현지에서 오래계신 연로한 목사님이 인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 분이 다낭교회의 역사를 이야기했습니다. 우리가 밟고 있는 그 교회당이 100년 된 교회당이라고 했습니다. 100년 전 영국의 WEC선교회에서 선교사를 파송하고 후원하여 세운 교회당이라고 했습니다. 이 교회가 베트남이 공산적화통일이 되면서 1976년에 입구에서부터 폐쇄조치를 당하였고 교회 지도자는 감옥에 갔으며 교회는 정부로부터 종교 활동 금지처분을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이 교회가 겉으로는 공산당에 의해 해체된 것 같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지도자가 감옥에 가 있고 정부로부터 교회가 종교활동금지 처분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이 교회 신자들은 예배를 중단하지는 않고 아직까지 예배를 드린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2019년 초에 그 교회 초대목사님이 102세로 세상을 떠났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공산당 정부로부터 폐쇄처분을 받았는데 어떻게 지금까지 예배를 드리고 교회가 유지되고 있는가? 이것이 궁금했습니다. 그 나라와 그 교회는 아픔이 있는 나라요 아픔이 있는 교회였습니다. 베트남 공산주의 정부 아래서 교회생활을 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정부가 허락한 교회는 예배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이 교회는 정부에 신고하지 않는 미등록교회입니다. 미등록교회라도 교회인근 주민이 민원 신고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그래도 예배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예배 중에 있는 교회가 이웃 주민의 신고를 받았을 경우에는 베트남정부에 속한 경찰이 예배드리는 현장에 출동하게 됩니다. 그 때에 지도자와 신자들이 감옥으로 가고 교회가 폐쇄조치를 당합니다. 그런데 이교회는 어떻게 지금까지 이웃 주님들의 민원신고가 경찰에 들어가지 않고 예배할 수 있게 되었는가? 교회 옆에 전세나 월세로 자리가 비는 순간에 한명씩 이사를 오게 됩니다. 그리하여 교회 주변에 123겹으로 교인들이 세들어 살게 됩니다. 그리고 하여 교회당을 가운데 예배를 드리는데 교회당 주변에는 모두가 신자들로 에워싸고 있기에 민원을 넣을 사람이 없게 됩니다. 전도는 공개적으로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가장 잘 신뢰하고 아는 사람들만 좋은 관계를 통해서 교회로 출석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고대의 기독교의 모습 중 요한공동체의 신앙생활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요한공동체의 배경은 무엇인가? 로마의 황제 도미티안이 기독교에 핍박과 박해를 하던 시기였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요한공동체의 교회는 박해 속에서 교회의 생존을 위한 방안을 강구해야만 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요한공동체의 지도자는 사도 요한입니다. 그 지역은 소아시아 에베소 지역이었으며 사도 요한은 밧모섬에 유배생활을 하면서 편지를 교회에 보냅니다. 그 편지가 요한일서 요한2서 요한 3서이며 그리고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묵시를 기록해 놓은 책이 요한 계시록입니다. 교회가 로마의 박해를 받는 이유는 기독교인들의 종교생활을 로마 정부가 인정할 수 없는 비공인 종교생활로 규정했기 때문입니다. 로마의 황제를 숭배를 강요받았으며 황제숭배를 거부하는 종교는 불법종교로서 반정부단체와 같이 취급했던 것입니다. 기독교는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계명에 의해 황제숭배를 거부하였습니다. 똑같이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길 수 없는 황제숭배를 거부하는 종교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유대교였습니다. 문제는 유대교는 박해를 면하고 기독교만 박해의 대상이 되었는가에 있습니다. 유대교인들이 로마에 밀고하여 기독교는 유대정통종교가 아닐 뿐만 아니라 유대인교와 다른 종교인들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기독교가 바리새파 중심의 유대교통일운동에 거부하는 데 반감을 품고 기독교 말살을 위해 로마에 까지 손을 뻗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외부적으로는 기독교가 박해의 위협을 받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기독교 내부에 분열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동방지역에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인이 되면서 그들이 본래 믿던 동방사상에서 기독교를 이해하려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던 중에 기독교와 동방사상을 섞어서 만든 기독교교리를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동방사상과 결합한 기독교교리에 매력을 느꼈습니다. 오늘 요한공동체 안에서 교회 분열을 일으키며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육체는 악하고 영만 선하다는 기본교리 위에서 성경을 해석하고 설교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약은 인정하지 않고 신약만 인정했습니다. 예수님의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고 십자가에 달리셔서 고난 받는 것은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오직 영으로만 오셨고 영으로만 부활했다는 교리를 펼쳤습니다. 이것은 당시 동방사람들에게는 매력적이었습니다. 그래서 박해를 피해 교회를 떠나는 사람 더 이단교리를 따라 떠나는 사람이 요한공동체 안에 생겨났고 이 때문에 교회가 분열의 고통을 경험해야 했습니다.

그렇다면 교회가 박해와 이단의 공격에서 살아남기 위해 어떤 길이 있는가?

오늘 요한복음은 포도나무 비유를 통해서 생존의 길을 충분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농부요 예수님은 포도나무입니다. 그리고 신자들인 우리들은 가지입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남아있을 때에만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을 얻게 됩니다. 구원을 얻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구원을 받는 것은 그 포도나무 가지에서 맺히는 열매입니다. 그 열매는 또한 사랑의 열매이기도 합니다. 포도나무의 진액을 받아 가지에서 열매 맺는 자들은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처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와 긴밀한 충실한 관계를 맺는 신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와의 신자 된 우리의 관계 유지는 자동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격려와 위로 및 양육을 받을 때만 가능합니다.

 

2. 사랑의 하나님(요일 4:7-21)

 

어느 때 이든지 세상에 사는 우리들이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으나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길이 있다고 한다. 그 길은 무엇인가? 우리가 서로 사랑하게 되면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심을 알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서로 사랑 하는 우리들의 모임 속에서 하나님의 계심을 알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이 사랑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나타난 구체적인 사건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이 세상에 자기의 독생자를 보내신 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시는 사건이다. 죄없는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연약한 인간들의 손에 잡혀 죽으시는 이유는 우리들을 살리시기 위함이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53: 5).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는 존재이지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3. 고난에서의 감사(22:23-31)

 

우리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마지막 운명하실 때에 외치시던 것을 복음서(27:46; 15:34)에 인용되었던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의 내용 때문에 시편 22편에 익숙해 있다. 22편은 탄식시에 해당하고 예수님 십자가 운명하던 날 성 금요일 본문으로 읽혀진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같은 시 안에 있으나 전혀 다른 주제로 된 시처럼 보인다. 예배의 용도에 맞도록 쓰여진 시처럼 보인다. 23절에서 시편은 여호와를 찬송하고 여호와께 영광을 돌리고 여호와를 경외할지어다라고 하고 있다. 오직 찬송과 영광과 경외를 받으실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시라고 선언하고 있다. 전반부에서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하지 않고 부르짖어도 하나님이 응답이 없다고 하다가 왜 후반부에서 여호와께 찬양과 영광과 경외를 돌리라고 하는가?

고난의 깊이, 버림받은 느낌 그리고 소외의 상처에서부터 노래되어질 때에 오직 참된 찬양이 나오기 때문이다. 시인이 겪은 이전의 고통과 어려움의 경험에서만 그리고 그같은 고난으로부터 구원의 경험으로부터 그같은 세계를 포용하는 찬양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는 곤고한 자의 곤고를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아니하시며 그의 얼굴을 그에게서 숨기지 아니하시고 그가 울부짖을 때에 들으셨도다

하나님을 신앙하되 예배하는 신앙을 가진 자들은 누구든지 고난의 때가 있었던 사람이다. 하나님으로부터 구원받은 체험들을 한 가지씩 가진 사람들만이 예배를 귀하게 여긴다.

고난에서 구원받은 경험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 감사역시 고난의 기억이 없는 그냥 감사는 깊이가 없다. 고난에서 건짐을 받았던 기억을 가지고 있을 우리는 진정한 감사를 할 수 있다.

 

4. 마음 문이 열리도록(8:26-40)

동아프리카 에디오피아는 기독교인구가 45%나 되는 나라이다. 에디오피아가 많은 기독교인을 가지게 된 이유가 무엇인가? 4세기 중엽이전에는 에디오피아에 기독교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으나 그 이후에 기독교가 왕성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에디오피아가 기독교의 복음을 받아들인 역사는 기독교 초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오늘 본문은 에디오피아의 여왕 간다게의 내시가 빌립집사를 통해서 복음을 접하는 장면을 소개해 주고 있다. 여왕의 내시는 높은 관직에 해당한다. 아마도 에디오피아의 역사에서 최초로 기독교인이 된 사람이다. 그가 예루살렘 유대인의 절기에 참석하고 돌아가는 길에 선지자 이사야의 길을 읽다가 궁금증을 느끼고 있을 때 가까이에 접근해 가고 있었던 빌립집사는 이사야서의 고난의 종이 예수 그리스도임을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증거한다. 그리스도를 믿은 내시는 빌립집사에게 세례를 받기를 요청했으며 빌립집사는 가던 길을 멈추고 물속으로 들어가 그에게 베풀게 된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초기 기독교에서 이방인세계로 복음이 어떻게 전달되고 있었는지 배울 수 있다. 먼저 복음을 가진 빌립집사는 성령이 임재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복음을 가진 빌립이 먼저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접근하여 적극적으로 복음을 제시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방인 내시는 복음을 듣고 세례를 받았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는가? 예루살렘에서 본국으로 수례를 타고 돌아가던 에디오피아 내시는 큰 소리로 예언서 곧 이사야서 53장을 읽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고난의 종이 선지자인지 누구인지 궁금해 하고 있었다. 바로 그 때 빌립집사는 예언서를 소리 내어 읽는 내시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가까운 지점에 있었다. 복음을 가진 빌립집사가 한 일은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도움을 찾고 있는 내시에게 성경해석의 도움을 주는 역할을 했다. 그리고 때마침 그가 궁금해 하는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임을 증거하였다. 그 다음에 세례 받는 것도 빌립집사가 내시에게 먼저 권유한 것이 아니었다. 세례를 받는 것이 어떠하냐고 요청한 사람은 성경의 궁금증을 해결하고 그리스도를 믿었던 내시였다. 이 때에도 빌립집사는 세례받기를 소원하고 있는 그를 물속에 데리고 가서 세례를 베풀었다. 그렇다면 누가 복음을 전하였는가? 내시의 마음의 문을 연 것은 주의 영이었다. 그리고 주의 영의 인도를 받은 빌립이 마음 문이 열린 내시와 접촉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오늘날 복음전도를 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주의 영이 임하도록 기도하는 일이 시급하다. 그리고 주의 영의 사람의 마음 문을 열어주시도록 기도해야 할 것이다. 그 다음에 마음 문이 열린 사람을 도울 수 있을 만큼 가까운 위치에 있을 뿐만 아니라 시간과 여건을 주시는 주의 영의 인도를 받도록 기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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