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부담(요 15:9-17)/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요일 5:1-6)/찬양받으시는 하나님(시 98편)/이방인 전도(행 10:44-48)

문철영 목사, 연세대학교 신과대(B.A), 본대학원 Th.M, 및 신학전공 Ph.D 취득,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역임, 호서대학원 강사역임, 노량진교회 부교역자 역임,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인천노회 제 37대 노회장역임, 수정교회 담임목사(1989. 6. 20~ 현재까지)
문철영 목사, 연세대학교 신과대(B.A), 본대학원 Th.M, 및 신학전공 Ph.D 취득,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역임, 호서대학원 강사역임, 노량진교회 부교역자 역임,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인천노회 제 37대 노회장역임, 수정교회 담임목사(1989. 6. 20~ 현재까지)

 

1. 거룩한 부담(요 15:9-17)

 

최근에 와서 발과 팔꿈치에 부상을 입는 일이 자주 일어난다. 지난 4개월 동안은 오른 팔꿈치에 엘보가 와서 물리치료와 깁스를 병행하였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나는가하고 곰곰 생각해보니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그동안 사용하지 않던 근육을 생각지 않고 갑자기 의욕적으로 발과 팔목을 사용한 결과였다는 결론이다. 왜 그러면 우리의 근육이 약화되었는가? 우리는 무슨 일이든지 쉽고 빠른 길을 선택하기를 좋아한다. 그렇게 하다 보니 결국 무심코 사용하지 않는 지체들이 많다. 그 순간 지체들이 편안해 보일 수 있었으나 다른 한편으로 그 지체들은 기능이 약화되는 경험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우리 몸의 지체는 귀찮을 정도로 부담을 느끼는 일을 하는 것을 필요로 한다. 종교 생활도 마찬가지다.
 유대인들의 경우 율법을 지킴으로써 무겁고 부담스러운 일을 하는 것을 하나님 앞에서 상당히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같은 부담은 거룩한 부담이라고 일컬어질 수 있다. 오늘 본문에서는 무겁고 부담스런 율법의 이야기기로 전환되고 있다. 저자는 포도나무 이미지에서 율법의 언어로 화제를 바꾸고 있다. 왜 그는 왜 율법의 언어를 사용하는가? 요한복음을 읽는 독자들이 이 율법의 언어에서 친숙함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누구인가? 날 때부터 율법지키는 일을 지상의 최고의 자랑거리로 삼는 생활을 하는 유대배경에서 온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십계명과 할례법과 정결례법을 지킴으로써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키는데 삶의 목표를 두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율법의 요구를 다 충족시키는 것도 아니다. 율법은 그들에게 빚이 되기도 하고 그렇기 때문에 율법의 종처럼 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율법을 지키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여겼던 바리새인 중 바리새인이었던 사도 바울마저도 이 세상의 어떤 사람도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킬 자는 없다고 하였다. 율법이 심판의 잣대로 살아있는 한 어떤 자도 율법 앞에서 의롭게 설자 없고 율법의 정죄 앞에 모든 사람이 죄인으로 나타날 수 밖에 없다. 결국 모세의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야 할 자는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 먼저 율법의 노예로 전락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들이 지키는 율법 중에서 가장 힘든 계명이 무엇인가? 그것이 다름 아닌 “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계명이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새로운 계명을 주겠다고 한다. 그 새 계명을 지키고 그 안에 사는 자에게 자신의 기쁨을 주어 그 기쁨이 충만한 삶을 살도록 하겠다고 한다. 그 새 계명이 무슨 계명인가? 서로 사랑하는 계명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가장 힘들게 여기는 그 사랑의 계명대로 사는 제자들에게 무거운 짐이 아니라 기쁨이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여기에 대한 수수께끼를 풀기위해서는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했으니 내 안에 거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의 뜻을 이해해야만 할 것이다. 이 말씀의 뜻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실 때 억지로가 아니라 기쁨으로 지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만큼 제자들을 위한 사랑의 행동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랑은 고통보다 죽음보다 더 강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제자된 우리들을 향하여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친구라고 하신다. 그리고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라고 한다. 최고로 무겁고 짐이 될 수 있는 사랑하라는 계명일지라도 예수님으로부터 친구사랑을 받았다면 예수님이 사랑한 친구를 위해서 사랑하는 것이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은 무엇인가? 지체를 위해 부담을 느낄 정도로 서로에게 시간을, 물질을, 그리고 마음을 내어 줄 뿐만 아니라 관용까지도 보여줄 수 있는 여유를 가지는 것이다. 그런데 이같은 부담을 믿음으로 감내한다면 그것은 거룩한 부담을 감당하는 능력을 소유한 것이다. 그같은 능력은 지체된 우리들에게 믿음과 영적인 근력을 강화시켜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보다 건강한 지체로 거듭나게 해 주는 것이다.

 

2.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요일 5:1-6)


  저자는 요한 공동체에 기독교가 새로운 신앙운동으로 빠져 들어가는 데서 문제점을 발견하고 있다. 그들이 믿음이 부족한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에 대한 지나친 열정 때문에 오는 문제였다. 그 결과로 그들은 육체를 입은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을 부인하고 오직 육체 아닌 신성만을 가진 예수님만을 인정한 나머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인정할 수 없는데 까지 간다.
그들은 예수님이 물로 오신 것만 인정하고 피로 온 것은 인정하지 않는다. 다른 말로 하자면 세례 받으신 예수님은 인정하되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은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저자는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이시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라고 하여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이심을 확증한다. 이를 증거하시는 분은 진리이신 성령이시다. 혈과 육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들의 문제점은 우리 자신의 육체됨을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형제사랑을 스스로 부인하는 결과에 이르게 된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에 적용한다면 예수님을 슈퍼맨으로 그린 나머지 예수 믿는 우리들이 고통도 없고 슬픔도 없고 모든 것의 최고의 자리를 지키는 승리적 삶의 비법을 배우려는 방향으로 치우치게 된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한다. “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니 또한 낳으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 연약한 육신을 입고 오셔서 우리와 같이 세례를 받으시고 십자가에 고난을 받아 피흘리면서 죽어 가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동시에 부활로 승리하신 하나님이시다.

 

3. 찬양받으시는 하나님(시 98편)
 

  본 시편은 찬양 시이자 왕의 시편으로 분류된다. 이 시는 백성들에게 “새 노래로 여호와께 찬송하라”로 시작한다. 찬양하고 싶은 느낌을 가진 사람 몇 명만이 찬양에 초대받는 것이 아니다. 오늘 찬양을 위해 초대받는 자들은 먼저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며 그리고 자연과 생물들까지도 초대받고 있다.  오늘 시편에서 새 노래로 여호와께 찬양하라고 한다. 여호와를 찬양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시 96편에서 찬양할 이유는 하나님이 창조자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98편에서는 찬양할 이유는 96편과 다르다. 하나님이 기이한 일로 구원을 베푸시는 구원자요 승리자이시기 때문에 모든 백성들이 찬양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우리가 찬양을 어떻게 할 것인가? 큰 소리로 찬양을 하고 악기 곧 수금과 호각으로 찬양을 하라고 한다. 시끄럽게 찬양을 하라고 한다. 찬양을 하면 믿는 자들이 골방에서 조용히 찬양하면 되지 온 나라가 시끄러울 정도로 큰 소리로 악기를 동원해서 찬양을 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찬양받아야 할  하나님이 위엄차고 장엄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세상의 통치자로서 공의와 공평으로 세상을 심판하러 내려오시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공의 심판자 하나님 오심을 어떤 의미로 받아들이는가?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에게 사랑하기로 약속한 그 사랑을  약속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받아들인다. 하나님이 자신의 변함없는 사랑을 기억하셨고 자신의 승리를 세상에 나타내 보이셨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그의 구원을 알게 하시며 그의 공의를 뭇 나라의 목전에서 명백히 나타내셨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집에 베푸신 인자와 성실을 기억하셨으므로 땅 끝까지 이르는 모든 것이 우리 하나님의 구원을 보았도다.”

 

4. 이방인 전도(행 10:44-48)


  베드로는 유대인의 대표로서 상징성을 가지는 지도자이다. 그렇기 때문에 유대의 문화와 전통을 그대로 간직하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여야 한다. 베드로가 복음을 전할 대상은 유대인들이다. 당시의 입장으로 들어가서 보면 베드로가 운신할 수 있는 폭이 좁을 수 밖에 없다. 유대경계 유대 법 안에서만 복음을 제시해야 하기 때문이다. 베드로가 안디옥에서 바울에게 책망을 받기까지 하면서 유대인들의 눈치를 보게 된 것이 그같은 이유에서다. 당시 안디옥에서는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이 구분없이 공동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서 야고보를 비롯한 지도자들이 안디옥에 도착하였을 때 베드로는 이방인과 함께 앉아 식사하던 자리에 일어나 유대인들의 식탁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같은 베드로였는데 오늘 본문에서는 베드로가 이방인의 집에 유숙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방인에게 세례를 주고 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듣는 이방인들에게도 성령이 내려왔고 그 증거로 그들이 방언을 하게 되었다.
 기독교인 가운데서 유대인의 대표로서 베드로가 이방인 집에서 유숙하며 그리고 그들에게 세례를 주는 일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는가? 정말 불가능한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그 일을 했다. 이유가 무엇인가? 베드로 역시 그 일이 불가능한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베드로는 성령의 인도를 받아들이는 사람이었다. 그가 가이사랴의 백부장을 맞이한 것도 성령께서 보여주시는 환상을 따라 순종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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