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20:19-31; 요일 3:1-7; 시 133편; 요일 1:1-2:2

문철영 목사, 연세대학교 신과대(B.A), 본대학원 Th.M, 및 신학전공 Ph.D 취득,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역임, 호서대학원 강사역임, 노량진교회 부교역자 역임,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인천노회 제 37대 노회장역임, 수정교회 담임목사(1989. 6. 20~ 현재까지)
문철영 목사, 연세대학교 신과대(B.A), 본대학원 Th.M, 및 신학전공 Ph.D 취득,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역임, 호서대학원 강사역임, 노량진교회 부교역자 역임,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인천노회 제 37대 노회장역임, 수정교회 담임목사(1989. 6. 20~ 현재까지)

1. 생명, , 진리(20:19-31)

요한복음의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 앞에서 모두가 기뻐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도마는 그렇지가 못하다, 왜 도마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난 제자들이 나누는 기쁨에 대하여 회의를 가지는가? 그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일까? 그렇지 않다. 도마는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믿음은 변함이 없다. 도마가 문제를 삼는 것은 부활 후에 신자들이 증언하는 그리스도의 모습이다. 그리스도가 몸이 없이 영으로 떠돌아다니는 것에 회의를 느끼고 있다. 도마는 부활하신 그리스도 몸의 형질이 무엇인가에 대한 끈질긴 질문을 하고 있다. “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25).” 도마가 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에 대한 확인을 필요로 하였는가? 당시에 부활한 그리스도가 몸없는 영만으로 되었다는 사상이 퍼져 있었다. 이 사상은 영적 체험을 강조하면서 개인주의 신앙을 부추기고 있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몸의 공동체에서 이탈하는 것의 정당화의 기본원리가 될 수 있었다. 도마는 제자들에게 돌아왔으며 그들 가운데서 나타난 부활한 그리스도를 경험하게 된다. 그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 박힌 못자국난 손과 창에찔린 창자국 난 허리를 가지셨다. 그 그리스도는 영만의 존재가 아닌 살과 피가 있는 부활의 몸이었다. 뿐만 아니라 도마는 부활한 그리스도의 몸과 실체 없는 영만을 믿는 것으로 전락되는 기독교에서 부활의 몸과 실체가 있는 그리스도를 믿는 기독교가 되는 데 기여하였다.

그런데 제자들과 도마가 혈과 육을 가진 몸으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전달받은 메시지는 무엇인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그리스도가 몸으로 부활하여 제자들에게 숨을 내쉬면서 주신 생명을 그들이 받았다. 그 숨을 내쉬는 것은 하나님이 태초에 흙으로 사람을 만든 후에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신 창조의 행위와 동일한 것이다. 부활한 그리스도가 제자들에게 그 숨을 내시면서 생명을 주신 것은 새로운 시작을 위한 창조행위다. 부활한 그리스도가 새로운 시작을 주신 이 생명 활동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관계의 통로를 통해서 주신 것이다. 관계의 통로를 통해서만 생명과 빛과 진리가 전달된다. 부활한 그리스도와 관계를 통해서 제자들에게 전달된 그 생명이 하나님과 관계 속에 있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내려왔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관계를 통해서 온 그 생명을 전달받기 위해서 우리들이 그리스도와 맺는 관계는 무엇으로 가능한가? 믿음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관계를 통해서 하나님의 생명과 빛과 진리를 선물로 받는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2. 사랑 관계(요일 3:1-7)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일컬음 받게 된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때문이다. 아버지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심이다.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본성적으로 죄없는 자로 변형된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죄를 제거하기 위해 오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 안에서 사는 자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 산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야 살도록 되어 있다, 이것은 자연스런 현상이다. 자녀는 출생에 의해서 자녀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자녀도 출생된 것이다. 이것은 관계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출생된 것은 변경될 수 없다.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로 출생된 우리는 본성상 하나님의 성품을 닯은 자로 변형된 자이다. 이것은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사랑 관계에 의해 자연히 변형된 것이다. 이것은 어떤 선행의 양이나 종교적 체험의 양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사랑으로부터 흘러내려온 사랑관계에서 이루어진 변형이다.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

 

3. 생명과 위로의 복(133)

본 시편에서는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하는 모습의 아름다움을 아론의 머리로부터 수염으로 흘러내리는 기름과 헐몬산의 이슬에 비유하고 있다. 그런데 머리로부터 수염까지 흘러내리는 기름과 헐몬산의 이슬이 아름다운 이유는 무엇인가? 이해를 돕기 위해서는 이 시의 표제어를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 NIVNKJV 등 번역에서 다윗의 노래, 올라가는 노래(A song of ascents, of David)”라고 되어 있다. 올라간다는 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마알라는 올라가다라는 동사 알라(עָלָה)’에서 파생된 말이다. 이 시는 순례객들이 예배드리러 예루살렘 성전으로 오르내리면서 부르는 노래 중에 포함된 노래다.(Howard Wallace). 예배자에게 가장 큰 복은 예루살렘 성전에 제사장이 그들을 맞이한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와 복은 기름부음받은 제사장의 중보를 통해서 내려온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순례객들의 마음속에 간절한 소원은 사죄와 생명의 복이다. 그 다음에 건강 물질 등의 복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제사장 아론을 상징하는 기름 부음받은 제사장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의 중요함은 그들이 예루살렘의 회복의 현장을 목격하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헐몬산의 이슬이 귀한(precious) 이유는 눈덮인 헐몬산 아래에 흐르는 물은 갈릴리 호수를 이루고 그 큰 호수의 물은 팔레스틴 땅의 모든 식물에 생명과 영양을 공급하는 젖줄이 되기 때문이다. 그 이슬은 하늘로부터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을 위해 내리는 생명과 축복의 선물이다.

그렇다면 그토록 값진 생명과 축복이 되는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한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흩어졌던 유대 나라의 12 지파들이 한 지파도 빠짐이 없이 모였을 뿐만 아니라 서로 간에 불화나 다툼이 없이 서로 협력하여 평화를 이룬다는 의미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각 지파들의 역할과 임무를 잘 수행하며 백성들의 축복을 위한 레위지파의 제사임무가 정상기능을 회복하였다는 말이다. 기독교에 적용하면 예수 십자가로 흩어졌던 모든 제자들이 대제사장이신 부활하신 주님을 모시고 예배하고 있는 모습이다. 여기에 생명과 위로의 복이 있다.

 

4. 관계 회복(요일 1:1-2:2)

요한 사도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계신 그리스도를 먼저 이야기 하고 있다. “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그런데 사도는 화제를 바꾸어서 이 그리스도 오심과 그리스도의 증거는 우리의 상호간 사귐을 위한 것이라고 한다. 사도는 왜 하나님과 사귐을 통하여 가능케 된 우리의 사귐으로 강조점을 옮기고 있는가? 사도는 혈과 육을 가진 진짜 예수에 대한 관심에 집중한다. 그 이유는 우리의 사귐의 관계를 깨고 공동체를 해치는 무리들은 혈과 육을 가진 진짜 예수를 거부하고 육이 없는 영만의 예수를 고집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도에 의하면 몸이 없는 영만의 예수를 주장하는 자들의 문제는 그들이 혈과 육을 가진 예수의 인간성을 부인하기 때문이다. 17장에서 예수님이 믿는 자들의 일치를 위한 기도를 드린다. 일치를 깨고 분열로 떨어져나갈 위험성을 사도는 감지하고 있다. 분열의 문제가 어떻게 해결되어야 할 것인가? 사랑만이 해결책이다. 회개하고 돌아오는 자들을 받아 줄 뿐만 아니라 아직 돌아오지 않은 자를 위해서도 예수님께서 화목제물로 돌아가셨다.

우리는 잘못을 저지르고서 그 잘못을 부인하지 못한다. 그 이유는 우리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우리 자신이 옳다고 고집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잘못은 개인적인 회개로 해결되지 않는다. 공동체로 돌아와서 그 앞에서 공개적으로 자백을 할 때에만 해결된다. 잘못한 죄는 예수의 혈과 육을 부인하고 개인주의적 영적체험만을 고집하여 공동체를 이탈한 것이다. 하나님은 신자들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기 원한다. 그리고 잘못된 것은 회복하시기를 원한다. 오직 사랑과 정직만이 돌아오게 하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회복하게 한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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