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철영 목사, 연세대학교 신과대(B.A), 본대학원 Th.M, 및 신학전공 Ph.D 취득,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역임, 호서대학원 강사역임, 노량진교회 부교역자 역임,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인천노회 제 37대 노회장역임, 수정교회 담임목사(1989. 6. 20~ 현재까지)
문철영 목사, 연세대학교 신과대(B.A), 본대학원 Th.M, 및 신학전공 Ph.D 취득,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역임, 호서대학원 강사역임, 노량진교회 부교역자 역임,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인천노회 제 37대 노회장역임, 수정교회 담임목사(1989. 6. 20~ 현재까지)

 

1. 사랑관계로 난 자녀(요일 3:1-7)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어떤 곳이라도 낮은 곳이라면 물이 흘러들어가지 못할 곳이 없다. 물은 생명체가 있는 곳까지 흘러가 생명을 소생시킨다. 물은 모든 만물을 이롭게 하되 다투지 않는다고 했다. 중국의 철학자 노자의 사상이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된 자들에게 주시는 사도의 말씀을 듣고 있다. 사도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흘러내려온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라고 한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또한 예수님이 우리 위해 화목제물이 되심으로써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예수님이 화목제물이 되셨다는 의미가 무엇인가? 자녀 되는 데 방해되는 것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혀 있던 죄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제물이 되심으로써 그 죄의 담벽을 허물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사이에 막힌 담이 허물어짐으로써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관계가 열렸다. 하나님과 관계가 열린 것 때문에 위로부터 흘러내려오는 하나님의 사랑인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우리에게 닫힌 문을 열리므로써 하나님의 사랑이 넘치도록 우리에게 들어온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된 과정이다. 이것은 우리가 자녀 된 다른 이유를 다른 어떤 것으로 설명할 수 없고 부모님으로부터 우리가 출생의 과정을 통해서 자녀가 된 것과 같다.
 자녀 된 자들은 자녀라는 의식 프라이드가 있다. 자녀 된 자들이 프라이드가 강할수록 부모를 욕되게 하는 행동이나 죄 된 행동을 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자녀 됨의 의식 하나님의 자녀 되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프라이드를 가진 자는 절대 죄짓지 않는다.
 우리 부모가 나를 어떻게 낳아서 길렀다는 것을 아는 자녀는 절대로 부모를 거슬려서 죄짓는 일을 하지 않는다. 프랑스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부모가 안 계신 친구 집에 아이들을 보내지 마라. 엉뚱한 짓들을 할 염려가 있다.” 거꾸로 말하면 부모가 있는 아이들은 절대로 엉뚱한 짓을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사도는 오늘 분명히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 된 자들은 절대로 죄짓지 않는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지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자녀삼기 위해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기까지 희생시키셨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절대로 하나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죄를 짓지 않는다,. 그렇다면 본문의 상황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죄란 무엇을 말하는가? 하나님과 관계를 열지 않고 닫고 있는 것이다. 예수를 믿노라고 하면서도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가르침을 부인하고 교회공동체를 이탈하여 다른 가르침을 받는 것이다. 다른 가르침이란 혈과 육을 가지고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를 부인하는 것이다. 부활한 예수를 믿지만 예수의 몸의 부활을 인정하지 않고 영만의 부활을 믿는 것이다.
예수의 육체성과 몸의 부활을 거절함으로써  예수의 몸된 교회에 소속된 공동체일원됨을 거부하는 것이다.
 어떻게 죄를 사함 받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회복하고 자녀로 복귀할 것인가?
 하나님의 자녀 됨은 하나님으로부터 자연스럽게 흘러내려온 사랑으로 된 것이다.  그러므로 잘못된 것을 인정하고 거부하고 하나님과 관계에서 열린 상태로 사랑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열린 관계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인 후에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로 사랑을 흘러 보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사랑은 물과 같아서 아래로 다툼이 없이 흘러갈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랑을 받아들이는 자가 하나님의 생명과 은혜와 평화를 공급받을 것이다. 

 
2. 변화된 베드로(행 3:12-19)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앉은뱅이 거지가 일어나 걸어 다녔다. 그를 아는 모든 예루살렘 성전을 오르내리던 사람들이 그를 구경하러 모여들었다. 그들은 앉은뱅이가 서서 걸어 다니는 것을 보고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그 옆에 베드로와 사도들이 서 있었다. 그들은 이 사람을 어떻게 일으켰을까 하는 눈으로 그 곁에 서 있는 베드로를 바라보았다. 그 때에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향하여 베드로가 다음을 말하고 있다.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베드로는 이어서 이 사람이 치료를 받은 것은 “그 이름을 믿는 이 사람을 그 이름이 성하게 하였다”고 한다. 그 이름이란 예수이며 또한 그 이름은 예수 이름의 능력을 말한다.
  그런데 구경꾼들이 누구인가? 그들이 유대인들이다. 베드로는 십자가에 예수를 못 박아 죽인 책임이 있는 그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의로운 이를 거부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주기를 구하여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라고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한다. 베드로가 누구인가? 예수님이 대제사장의 뜰에서 재판을 받을 때에 예수를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던 사람이 아닌가? 베드로가 예수님 십자가 질 때 두려워 도망갔던 자가 아닌가? 그런데, 그러던 그가 어떻게 이같이 담대함으로 유대인들 앞에서 예수를 죽인 책임을 그들에게 묻고 있는가? 아울러 예수의 부활을 증거할 수 있는가?
 분명한 것은 베드로가 바뀐 것이다. 그렇다면 겁쟁이 베드로를 무엇이 담대한 베드로로 변화시켰는가? 베드로는 십자가 지시고 죽은 후에 부활하신 주님 앞에 회개하고 주님을 다시 영접하였다. 주님께서 보여주신 부활을 직접 체험한 것 때문이다.
 그래서 베드로는 청중들에게 다음을 담대히 증거할 수 있었다: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이를 거부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  베드로는 예수님을 족장들의 하나님이 영화롭게 하였다는 것을 증언하고 있다. 왜 족장들의 하나님이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였는가? 베드로의 변화는 예수님이 족장들과 모세와 예언자들이 소망하고 기다렸던 메시야라는 사실을 믿고 확신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3. 영과 몸의 부활(눅 24:36-48)

 엠마오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두 제자가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한 공동의 트라우마를 경험하며 모여 있는 제자들에게 그들이 경험한 것을 말하였다. 바로 그 순간에 예수님께서 그 자리에 오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고 한다. 엠마오의 두 제자 이야기를 듣고 마음에 힘을 얻고 있던 그들은 다시 놀라움과 두려움에 빠졌다. 왜 그들은 다시 나타난 에수님을 보면서 놀라움과 두려움에 빠지는가? 그들이 눈앞에 “보는 것을 영(유령)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부활한 예수님을 영(유령)으로 생각하는 것이 제자들을 두려움으로 위협한다는 의미가 무엇인가? 이것은 초기 기독교에서 예수님의 육체의 부활을 거부하고 영만의 부활만을 고수하는 이단들의 입장을 대표한다. 그들은 예수님의 육체에 관한 모든 것을 거부하고 영만을 주장한다. 그 이유는 육체는 악하고 영은 선하다는 사상의 빛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그러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이 육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까지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부활은 영만이 아니라 성경의 예언대로 육체로 오신 예수님이 고난을 겪은 후에 몸의 부활을 증거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38-39).” 예수님의 부활은 우연한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일으켜 세우신 것이다. 하나님은 성경대로 예수님의 메시아됨을 성취시키셨다. 그러므로 메시야를 거부했던 자들의 폭력 앞에 변호받지 못하고 죽음에 이르렀으나 예수님의 몸의 부활은 하나님이 직접 예수님의 메시아됨을 변호해  주신 사건이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은 성령의 능력에 의한 죄용서의 선포를 포함한다.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4. 믿음으로 인한 평안(시편 4편)


 시편 3편은 압살롬의 반역과 죽음이후에 쓴 탄식과 관련이 있다. 4편은 3편에 이어서 다윗을 반역한 압살롬과 그 신하들이 다윗의 의로움을 거짓되게 고발한다. 다윗은 대적들로 인해 마음이 심란하고 고통스럽다(삼하 15장). 그 대적들이 다름 아닌  압살롬의 지지자들이다. 그들은 다윗을 모함하여 거짓되게 고소하고 있다. 이같은 상황에서 1절에서 다윗은 하나님 앞에 호소하고 있다. “ 내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 다윗은 모함에도 불구하고 마음에 확신을 느끼고 있다. 그 이유는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잘못이 없고 의의 길을 걸었기 때문이다. 비록 사람들이 모함하여 거짓된 고소거리를 만들어 내고 있을지라도 다윗의 옳음을 하나님은 알고 계심을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윗은 도리어 그들에게 점잖게 충고하는 여유를 가지고 있다. “너희는 떨며 범죄하지 말지어다 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고 잠잠할지어다 (셀라).” 뿐만 아니라 다윗은 그의 원수들에게서 비방을 듣고 쫓기는 처지에 있을지라도 풍성한 곡식과 새 포도주를 자랑하는 그들보다도 기쁨과 행복을 느끼고 있다.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그들의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이다 (7-8절).”
심란하고 혼돈스런 상황에서도 다윗이 어떻게 요동하지 않고 마음에 기쁨과 행복을 소유할 수 있었는가? 다윗은 평소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찬송하고 예배하는 일을 몸에 습득하였기 때문이다. 다윗이 특히 여호와의 법궤를 사모하면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습관화하였다. 평소에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았던 것이 고난의 때에 살아계신 하나님의 안전과 보호를 받게 된 것이다. 그는 평안히 눕고 자는 것보다 이 세상에서 더 귀하고 복된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 그것이 바로 살아계신 하나님이 안전하게 살게 하시기 때문이다. 십자가에 처형된 예수님 때문에 트라우마를 경험했고 불안해 하고 두려워 떨고 있던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이 “평안이 있으라”라고 하신 선언 이후에 부활체험을 하였다. 그리고 그들이 주님의 부활을 믿고 확신을 하였을 때 그들의 마음에 찾아온 것이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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