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철영 목사, 연세대학교 신과대(B.A), 본대학원 Th.M, 및 신학전공 Ph.D 취득,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역임, 호서대학원 강사역임, 노량진교회 부교역자 역임,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인천노회 제 37대 노회장역임, 수정교회 담임목사(1989. 6. 20~ 현재까지)
문철영 목사, 연세대학교 신과대(B.A), 본대학원 Th.M, 및 신학전공 Ph.D 취득,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역임, 호서대학원 강사역임, 노량진교회 부교역자 역임,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인천노회 제 37대 노회장역임, 수정교회 담임목사(1989. 6. 20~ 현재까지)

 

1.남을 용납한다는 것은(요일 3:16-24)


오늘날은 스마트 폰 시대인 것 같습니다. 카톡이라든지 밴드라든지 정보를 쉽게 주고 받을 수 있습니다. 카톡할 때는 잘 아는 것 같지만 카톡에서 나오는 순간에 카톡 대화가 지나고 나면 기억이 잘 안나는 것이 문제입니다. 카톡은 가상공간입니다. 카톡 밖에서는 전혀 새로운 세계가 되니까 혼란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가상공간과 현실공간이 구분이 잘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성경을 보면 우리 시대와 다른 내용이지만 비슷한 모습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육신으로 오시고 십자가를 지시고 몸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것이 기독교전통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중에 현실과 동떨어진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영으로만 부활했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 현실세계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육신의 생활을 거부하면서 영만 받아들이는 신자들이 생겨난 것입니다. 육신의 활동을 무시하는 방향으로 흘러갔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이 땅에 와서 고난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고난당하지 않고 죽지도 않는다는 사상 아래서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죽음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고난을 당하지 않았고 고난당한 척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오직 영으로만 이해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초대교회에 왜 문제가 되었는가? 예수 믿는 사람이 서로 유무상통하며 서로 자원을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물질을 나누지 않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영으로만 인정하는 사람들은 현실을 부정하고 서로 물질을 나누는 것을 중요시 여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성경은 신자들이 지켜야할 바른 믿음과 바른 계명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바른 믿음 바른 계명에서 빗나간 사람들은 적 그리스도인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현실과 동떨어진 영의 세계로 여행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유령같이 나타나는 예수님만을 만나기를 원했고 그들의 영성생활이 지상에서 윤리와 법을 인정하지 않는 성향으로 흘렀습니다. 이들은 법과 사회체계를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무질서를 초래하고 혼란에 빠질 수 있었습니다. 공동체의 윤리와 통제를 거부하는 이단이었습니다. 
  오늘 성경에서는 요한사도가 어떻게 말씀하는지 보겠습니다. 16절-17절입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16-17절)”
 형제가 어려움과 궁핍함을 당하는 데 영으로 만족하라고 하는 일이 생깁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은 것도 대속이론 차원에서 봅니다. 하나님이 대신 죄값을 치루었으니까 우리는 다 공짜이고 아무 것도 할 것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문제가 됩니다. 예수님이 다 했기 때문에 우리는 아무 것도 할 필요가 없다는 점이 문제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을 위해 죽으심은 제자들을 살리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목표가 있는 죽음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서로를 위해서 목숨을 내어놓고 살아야 함을 강조합니다. 남을 위해 죽는다는 말이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공동체 생활에서 죽기 보다 더 힘든 일이 있습니다. 받아 주고 용납하는 일이 죽기보다 힘든 일입니다. 받아주고 용납하는 것이 형제를 위해 죽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내 마음에 들지 않아도 받아주는 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1주일에 한번 예배를 위해 교회 출석하는 오늘날 우리들과 달리 초대교회는 공동체 생활을 했습니다. 매일 같이 모여서 식사하고 매일 같이 일하고 매일 모여서 기도하는 자리에 있어야 하는 것이 공동체 생활입니다.
 오늘날 가정 생활할 때에도 적용이 됩니다.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여 죽으신 것을 생각하여 가정에서 서로를 용납하는 것이 이것이 하나님이 명령한 사랑의 실천입니다. 이것이 형제를 위해 죽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성경에서 무엇이라고 하는지 18-19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니(18-19절).” 사랑은 감정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사랑은 감정을 넘어서 신앙으로 하는 사랑입니다.  서로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아무도 없으니 다행입니다. 교회 다녀도 보기 싫은 사람이 있습니다. 위대한 성인은 보기 싫은 사람과 함께 밥 먹고 서로 만나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들은 하늘에 상이 큰 사람들입니다. 좋은 사람만 만나면 상이 크지 않습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말은 정말 나와 취향이 맞지 않는 사람을 용납하라는 말입니다.
요즈음 기도제목이 나와 다른 사람을 용납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가면서 한 가지 감사한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마음에 들지 않고 내 생각과 다른 사람이라도 그 사람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오늘 사도는 하나님과 관계에서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사랑을 생각하면서 서로를 용납하라는 것입니다. 세월이 지나면 이전에 이해가 안 되던 것이 다 이해가 되는 것이 놀랍습니다. 긴 세월을 기다릴 수 없으니 하나님의 사랑으로 용납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사랑을 실천하고 싶어도 미움이 생겨나는 것이 문제입니다. 가인은 아우 아벨의 제사를 받아주시고 자신의 것을 받지 않았을 때에 아우 아벨을 미워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살인을 했습니다. 사랑은 미움의 반대입니다. 사랑은 그 사람을 살리는 것이고 내가 죽은 것입니다.  남을 미워하지 않고 사는 것은 내가 죽는 것입니다. 참으로 힘든 일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우리에게 하나님이 응답 주십니다. 하나님의 응답을 받기 위해서 남을 용납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기뻐하는 일을 하면 우리 마음에 하나님이 확신 주시고 그리고 우리의 기도에 응답이 빠르게 해 주신다는 말입니다. 
 오늘 성경을 21-22절에서 보겠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21-22절).”


2. 영혼 관리(시 23편)


 오늘날 현대인들은 육신의 건강에 관심이 많다. 헬스장에 가서 러닝머신 사이클로 유산소운동과 근력운동을 하고 있다. 비만 해결을 위해 맞춤형 짐을 찾기도 한다. 조금만 병들어도 병원을 찾아가서 의사가 처방해주는 약을 받아와서 정성 다해 복용한다. 그러나 영혼에 대한 관심을 쏟는 사람은 드물다. 이유인즉 영혼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영혼의 중요성을 모르기 때문이다.
 오늘 성경 시편의 저자인 이스라엘의 성군 다윗은 우리와 다른 점이 있다. 그는 육신의 건강의 관심보다 영혼에 대해 지극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도다.” 다윗 같은 위대한 전사이자 정치가가 눈에 보이는 경제와 백성들로부터 지지를 얻기 위한 정치술에 관심을 가지기보다 보이지 않는 영혼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가 무엇인가? 다윗은 영혼의 가치가 금보다 더 귀한 가치가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연세가 아주 드신 분들 중에 아예 음식을 입에 대지 않는 분이 있다. 그 이유는 입맛이 쓰기 때문이다. 이같은 현상은 죽음의 문턱에 가까이 왔다는 신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영혼의 감각은 우리의 삶 가운에서 생명과 죽음을 가르는 잣대가 된다. 영혼이 감각을 느낄 수 없이 마비된 사람은 죄에 대한 감각도 없다. 그리고 행복감도 없다. 다윗은 영혼의 감각이 무디어졌을 때에; 범죄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다. 그는 그 범죄로 인해 모든 것을 송두리째 빼앗기는 경험을 하였다. 그같은 경험을 하고 난후 회개하고 영혼의 감각을 회복한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이 회개했기 때문에 자신이 의로움 때문에 영혼의 감각이 되살아났다고 하지 않는다. 나의 목자되신 여호와께서 내 영혼을 소생시키셨다고 분명히 고백하고 있다. 이 짧은 구절에서 다윗이 영혼관리를 위해 정성과 물질과 시간을 얼마나 투자했는가를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3. 선한 목자(요 10:1-10)


  목자의 이미지는 고대 이집트에서 이스라엘에 이르기까지 통치자의 이미지였다. 다윗은 이스라엘에서 이상적인 통치자였다. 그러나 본문에서 목자는 무엇을 말하는가? 신앙 공동체의 지도자를 말한다.  목자에는 두 부류가 있다. 하나는 돈벌이를 목적으로 직업적인 삯군 목자이며 다른 하나는 소명을 따라 일하는 선한 목자이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10-11절).”  
 여기서 선한 목자가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는 의미가 무엇인가? "예수님이 제자들을 위하여 위험과 죽음에 맞설 준비가 되었다"는 의미다(William Loader).  그것은 단순히 속죄 이론이 아니라 예수님이 제자들을 위해 죽음에 맞섰고 죽었다는 의미다.
 제자들을 위해 선한목자로서 예수님은 왜 죽었는가?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생명을 더 풍성이 얻게 할 목적으로 오셨고 그 목적을 죽음으로써 성취하였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목숨을 버리신 것은 빼앗긴 것이 아니라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해 스스로 버린 것이라고 한다.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17절).”

 

4. 변화된 베드로(행 4:5-12)


  예수님이 십자가 지시기 위해 체포당하고 재판받을 때까지만 해도 베드로는 겁쟁이였다. 그가 주님이 재판을 받을 때 닭 울기 전에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였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는 베드로가 전혀 다른 모습의 사람으로 나타난다. 예수 부활을 이야기하는 사도들이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들과 사두개인들의 통제를 받아 감옥에 오게 되었다. 감옥에 와서도 그들이  전하는 예수 부활 이야기를 듣고 믿는 자가 5,000명이나 넘게 된 백성들을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보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성전 미문 앞에 앉아 구걸하던 앉은뱅이가 일어나서 걸어 다니는 장면을 보고 있다. 그 때에 그들은 사도들에게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느냐고 질문하였다. 그들의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예수를 증거하는 베드로의 모습은 담대하다.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예수님 체포 되어 재판받고 십자가 지실 때 겁많던 베드로의 모습이 아니다.
   겁많던 베드로의 모습이 어떻게 이처럼 담대한 모습을 바뀌어 질 수 있는가?   베드로가 말씀을 전할 때 그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상태였다고 성경을 기록한다.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이르되 백성의 관리들과 장로들아.”  그렇다면 베드로가 성령의 충만의 충만을 언제 받았는가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행 2:1-3).” 120명의 문도들이 마가다락방에서 다같이 한 자리에 모여서 기도할 때에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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