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을 뚫고 나온 김석균 목사를 열방의 찬양사역자로 세워

  • 입력 2021.06.03 10:39
  • 수정 2021.08.31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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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심을 회복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 “창작의 샘이 마르지 않게 해 주세요”

찬양사역자 김석균 목사, 40년 시간속에 18집의 작곡집, 400여곡의 찬양이 그를 통해 쏟아졌다.
찬양사역자 김석균 목사, 40년 시간속에 18집의 작곡집, 400여곡의 찬양이 그를 통해 쏟아졌다.

인터뷰이 : 찬양사역자 김석균 목사

   인터뷰어 : 본헤럴드 윤홍식 편집국장

일 시 : 2021.5.31.

장 소 : 홀리빈 (서울 양천구 신정동)

"목사님의 지난 사역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긴 하지만, 다시 들어도 감동을 주고, 도전이 되는 것 같습니다. 오늘 인터뷰도 우리 <본헤럴드> 독자들을 위해 목사님의 지난 40년의 찬양사역을 돌아보며 함께 은혜를 나누는 시간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Q1. 목사님 예수님을 처음 믿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목사님에게 있어서 처음 주를 만난 날의 신앙생활의 모습은 어땠나요?

A. 우리 집에는 예수 믿는 사람이 없었어요. 어린 시절 저를 교회로 인도한 사람은 옆집 형과 누나였어요. 16살에 시집 온 어머니는 시어머니의 무속신앙을 대물림 받아 살림을 했어요. 어머니는 무속적인 능력이 있어서 누군가 아파도 우리 집을 찾아오고 문제가 생겨도 우리 집을 찾아올 정도였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렘1:5에서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 했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는 말씀처럼 저를 이미 찬양사역자로 세우실 계획을 가지신거죠. 그래서 6~7살 무렵부터 3~4km 먼 거리에 있는 교회를 동네 형들 따라 3년 가까이 다녔고, 그 후 그 교회가 우리 동네에 지교회를 세운 후부터는 지금까지 한 번도 교회를 떠나본 적이 없어요. 저는 사무엘처럼 늘 교회에 머물렀어요. 교회는 나의 집이자 마당이었고 놀이터였지요. 성탄절이 올 때면 한 달 내내 모여서 노래 부르고 성극을 연습하던 무대였어요.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 했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렘1:5

그렇게 자연스럽게 예수님의 말씀과 은혜가 흡수가 됐어요. 하나님은 제가 신앙의 길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지금까지 이끄셨어요. 아버지가 쉰한 살, 어머니가 마흔세 살에 저를 낳았는데 거의 방목하듯 자랐어요. 그러다가 제가 아홉 살 즈음에 아버지가 뇌졸중으로 쓰러져 병석에 누웠다가 열여덟 살에 돌아가셨어요.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던 아버지마저 돌아가시게 되자 우리 집은 더욱 깊은 가난에 빠졌어요. 결국 위로 네 명의 누나들 중 세 명은 초등학교도 나오지 못했어요. 가난한 집 막내인 저에게 교회만이 유일한 즐거움이었어요.

 

Q2. 목사님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어린 시절의 가난이 목사님을 훈련시킨 하나님의 품성 훈련이 아니었나 생각되네요.

A. 맞아요. 어린 시절의 가난은 나로 하여금 긍휼의 마음을 품게 해 줬어요. 그러다 보니 사역하면서 적은 수입이 생겨도 주변의 가난한 사람들과 선교지로 자연스럽게 흘려보낼 수 있었어요. 얼마 전에 원치 않게 저작권 문제가 발생했을 때 저는 하나님께 물었어요. "하나님, 왜 나를 광야로 끌고 나오십니까?" 억울한 마음도 있었고, 충분히 해명할 수 도 있었지만 눈물로 기도밖에 할 것이 없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은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더 내려놓아", "? 더 내려놓으라고요?"

저를 돌아보는 계기가 됐어요. '그래, 내가 잃어버린 초심이 있지는 않나? 나는 변질되지 않았나? 나는 어떤 상황과 형편에서도 감사하며 헌신하고 있나? 첫 마음의 그때처럼 작은 사례에도 기뻐하며 사역하고 있나?' 이번 일로 내 안에 회복된 것이 이것이었어요. 더 대접받으려는 마음, 더 존중받고 싶은 마음, 더 사례를 받고 싶은 마음. 하나님은 이것을 내려놓게 해 주셨어요. 그래서 이 사건은 저에게 굉장히 큰 은혜예요.

 

Q3. 성악을 공부했거나 음악을 전공한 것은 아닌데 음악적 재능이 있어서 일찍부터 대중 가수로도 활동했던 것으로 아는데 언제쯤부터 어떤 활동을 했나요?

A. 저는 태어나면서부터 하나님께 받은 은사가 있었어요. 어렸을 때 어머니가 늘 말씀하시기를 "너는 얼마 동작이 빠른지 걷기 시작하면서부터 두 발이 동시에 땅에 닿지 않을 정도로 항상 뛰어다녔어. 그런데 두 발이 땅에 닿는 때가 있는데 그때가 노래를 부를 때야" 사람들이 지나가다가도 "석균아! 노래해봐" 하면 그 자리에 서서 노래를 아주 간드러지게 불렀어요. 제 두 발이 얌전히 땅에 닿을 때는 노래 부를 때였던 거죠.

초등학교 4학년 때는 노승균 담임선생님이 풍금을 치셨는데, 저를 교실마다 데리고 다니면서 동요 시창자(始唱者)로 세웠어요, 중학교 다닐 때는 서울대 음대에서 성악을 전공한 곽인 선생님이 합창단을 구성하며 오디션을 봤는데 합격해서 음악을 배웠어요. 대학 다닐 때는 오디션에서 <아침이슬>로 대상도 받았구요. 그 후 72~73년도 무렵 무교동과 종로 일대의 음악다방 뮤직박스에서 디스크자키로도 활동했어요. 당시 데뷔 전의 전영록 같은 가수들과 가까이할 수 있었고, 나도 많은 노래들을 습작하듯이 작곡하고 있었기 때문에 음악도 배우고 음반도 내고 싶었지만 가난했기 때문에 음악을 제대로 할 수 없어서 세상 노래 쪽으로 진출하지 못했지요. 그런데 생각해보니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였어요. 아마 돈이 있어서 세상 음악을 불렀다면 오늘의 저는 없었을 거예요.

하나님은 제게 창작의 달란트를 주셨어요. 창작은 작곡을 전공했다고 되는 게 아니어요. 실습하고 훈련한다고 작곡이 되지 않아요. 창작은 창조주 하나님이 창작의 능력을 부어주실 때 누리는 은혜예요. 저는 문학 전공인데도 지금도 작곡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이 저를 열방의 찬양사역자로 세워주심을 믿어요.

하나님은 제게

창작의 달란트를 주셨어요.

Q4. 그렇게 하나님이 주신 창작의 달란트를 가지고 찬양사역자로 본격적으로 들어서게 된 때는 언제고 어떻게 찬양사역을 시작하게 됐나요?

A. 1978년도에 군대를 제대하고 복학을 할 때 서울에 계신 형님이 계셨는데 살림이 여의치 않으니까 여러 차례 이사 했어요. 수유리로 이사 간 형님 집에 얹혀살게 됐는데 근처에 우이중앙교회가 있었어요. 그 당시에는 꽤 큰 교회였던 그 교회 대학청년부를 지도하던 국용환 전도사님을 통해 하나님이 은혜를 부어주시는데, 그분 말씀이 꿀송이처럼 달아서 신앙생활을 정말 열심히 했어요. 그렇게 교회학교 교사, 성가대원 등 기쁨으로 헌신 했지요.

저는 청년부 예배 모임 때 기타를 치면서 예배를 이끌었어요. 그 시절은 복음성가라는 것이 거의 없었어요. 그래서 해외에서 들어온 번안곡이나 건전가요를 불렀어요. 그러던 어느 날부터 전도사님이 그러는 거예요. “석균 형제, 왜 세상에 나가서 세상 노래를 불러? 하나님이 주신 재능을 세상 노래하는 데 사용하지 말고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데 사용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어?” 저에게 세상 가수 그만두고, 찬양 가수로서의 삶을 계속 권면하는데 나중에는 이것이 하나님의 음성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이것을 기도제목 삼고 100일 작정기도를 했어요.

그렇게 두 가지를 기도했죠. “첫째, 하나님 이 사역을 이해하고 도울 수 있는 준비된 배우자를 만나게 해 주세요. 둘째, 이 사역을 계속할 수 있는 직장을 주옵소서매일 이렇게 한 시간씩 기도를 했어요. 그리고 그 기도의 응답으로 지금의 아내를 만났고, 교직을 감당할 학교를 만난 거예요. 그즈음에 내가 갈 수 있는 학교만 세 군데나 나왔는데, 제가 살던 수유리에서 가장 먼 학교인 문일고등학교로 가게 됐어요. 알고 보니 그 학교는 크리스천 학교였어요. 이사장이 장로님이어서 학교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제가 예배 인도를 다 해주니까 교사로 있으면서 찬양사역을 병행하는 것이 전혀 어렵지 않았어요. 학교에서 충분히 편의를 봐줬어요.

그리고 지금의 아내를 만나 결혼을 하면서 1981년에 창작의 문이 확 열렸어요. 첫 번째 쓴 곡은 <영원히 주와 살리>였는데 이 곡은 별로 알려지지 않았고, 다음으로 나온 찬양이 <주를 처음 만난 날>이어요. 지금 생각하면 그 찬양이 만들어지기까지 하나님을 오랫동안 기다리시고 준비시킨 거죠. 그 이후에 봇물을 터지듯 1년이면 몇십 곡을 썼어요. 그리고 나오는 곡들마다 히트를 쳤어요. 하나님이 나에게 한국 스타일에 딱 맞는 멜로디와 신앙인의 가치와 맞는 가사를 주셨어요. 이전에는 없던 선율에 이전에는 없던 가사의 찬양이 나오니까 한국교회가 열광을 한 거죠.

김석균 찬양사역자를 통해 한국교회는 복음성가 부흥의 시대를 맞이했다
김석균 찬양사역자를 통해 한국교회는 복음성가 부흥의 시대를 맞이했다

 

Q5. 제 기억에도 당시 유명했던 복음성가집 <찬미500> <찬미1000> <찬미2000>에도 목사님 곡이 가장 많이 실리지 않았나 기억됩니다. 목사님의 이야기를 들으니까 시편 속 다윗의 무수한 시들이 그냥 나온 것이 아니라, 평생에 만난 하나님 체험을 통한 것이구나를 다시금 깨닫습니다. 목사님의 또 다른 특별함은 고등학교에서 국어교사로 20년 넘게 재직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국어교사로 있으면서 찬양사역까지 힘들지 않았나요?

A. 한국교회 성도님들이 제 찬양 가사에 은혜를 많이 받으신 것 같아요. 저는 문학을 전공했는데, 사실 형님도 시인이고 조카도 시인이어요. 집안이 글 쓰는 집안이어요. 그분들은 세상 시를 썼지만 저는 그런 세상 시를 쓰는 사람이 아니잖아요. 대학 다닐 때는 백일장에 나가 국문과 많은 학생들을 제치고 장원도 했어요. 하나님은 작사라는 달란트를 주셨어요. 하나님 말씀과 지나온 삶의 은혜가 뒤범벅되고 섞이면서 어느 순간 가사가 쏟아지는 거였어요.

교사를 하면서 찬양사역을 할 수 있던 유익은 그 당시에 찬양사역이 활발하던 때가 아니어서 초청도 적었지만 초청을 받아도 3~4천 원 받는 때였어요. 하지만 교사로서 봉급을 받으니까 찬양사역을 지속할 수 있는 안전장치가 된 거죠.

아침 일찍 학교 보충수업을 시작으로 이어진 학교생활도 바쁜데, 거기에 수요일 저녁예배, 금요일 저녁예배, 주일 저녁예배까지 평일에도 찬양집회 인도까지 정신없었어요. 그러다가 1984년도에 <사랑의 종소리> 가 발표되자 확 뜨게 됐고, 교회 초청이 많아지니까 새벽 5시에 일어나 학교 출근 준비로 시작된 일상이 집에 들어오면 밤 11시를 넘어 새벽 1시까지가 다반사였던 거죠. 그러자 사람의 몸이 점점 망가지더니만 2~3년 후엔 몸의 면역체계가 무너지면서 식사하면 바로 토하고 설사하고, 체중도 급격히 빠지기 시작했어요. 과로사 직전까지 간 거죠. 어느 날 병원을 가니까 의사 선생님이 당신 이렇게 살다 간 2~3년 살기 힘듭니다.” 하는 거예요. 그런데 문제는 더 큰 곳에서 터졌어요. 1980년에 결혼해서 거의 혼자 아들 둘을 키운 아내가 이제 나는 더 이상 당신과 살 수 없다. 내가 이러려고 당신과 결혼한 것이 아니다.”라고 이혼하자는 거였어요. 갑자기 닥친 두 가지 큰 시련. 건강 문제와 이혼 앞에 제가 내릴 수 있는 답은 한 가지 사역을 내려놓는 것뿐이었어요.

하나님은 그때 그것을 뚫고 나가게 해 주셨어요. 그래서 그때 만들어진 곡이 <나는 가리라>였어요. “비바람이 앞길 막아도 나는 가리 주의 길을 가리문제 앞에 기도하니까 하나님께서 네가 가는 길이 아니라, 내가 너를 선택해서 가는 길이니까 비바람이 앞길 막아도 눈보라가 앞길 막아도 가라고 응답해주셨어요. 그렇게 순종하면서 학교 다니며 사역을 이어가니까 건강도 다시 회복됐고, 하나님이 아내 마음도 만져주시니까 은혜 충만해지면서 제 사역을 존중해줬어요. 그 후 41년을 아내는 나의 최고의 동역자가 됐어요. 아내는 나의 부족한 점을 충분히 채워줄 뿐만 아니라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나를 지지하고 응원해줬어요.

네가 가는 길이 아니라,

내가 너를 선택해서 가는 길이니까

비바람이 앞길 막아도

눈보라가 앞길 막아도 가라

집회의 수입을 통해서 각 신학대학을 다니던 가난한 신학생들 선발해서 학부부터 대학원까지 7년의 등록금을 대주기도 했고요. 뿐만 아니라 작곡 발표회를 통해서 하나님이 사람들을 삼천 명 사천 명 모아주시면 그 수익을 선교사님들께 보냈어요. 80년대 90년대에 천만 원, 삼천만 원, 사천만 원 보낸다는 것은 지금으로서도 엄청난 금액이지만 이 일을 아내가 동역하지 않으면 이룰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하루는 당신은 어떻게 나를 이렇게 믿고 따를 수가 있었어?” 물어보니까 자기는 어릴 때부터 너무 부자로 태어나 좋은 것을 다 누리며 살아봐서 당신처럼 가난한 사람 만났을 때 오히려 내려놓을 수 있다는 거예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사역을 위한 100일 기도의 응답으로 국영환 목사님의 중매로 제 아내를 만났어요. 그런데 그 때 제 아내는 사도신경도 주기도문도 못 외우는 예수 믿은 지 겨우 넉 달 된 사람이었는데 하나님은 그렇게 응답해주신 거죠. 그때는 몰랐어요. 나중에 돌아보니 이것이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라는 것을 느꼈어요. 지금 저는 코로나로 인해서 수입이 없어요. 하지만 매달 3~4백만 원씩 선교비로 나가야 하는데, 수입이 없는데 어떡합니까? 그냥 가진 돈을 털어서라도 선교비를 보내야죠. 이 사역에 아내가 동역하는 거예요.

<선교사의 삶>이라는 곡 안에 이런 내용이 있어요. “내가 즐기고 싶은 것 다 즐기면서 어떻게 이 길을 가겠는가? 내가 누리고 싶은 것을 다 누리면서 어떻게 이 길을 가겠는가? 내가 즐기고 싶은 것을 포기하고 내가 누리고 싶은 것에 등 돌리고 주님께 내 삶을 던지는 것이 선교사의 삶이다라고 노래해요. 그걸 아내가 같이 가주는 거예요.

 

Q6. 한국기독교를 대표하는 찬양사역자로 살아오면서 삶의 수많은 명암이 있었을 것으로 이해되는데, 돌이켜볼 때 사역자로서의 삶에서 가장 큰 고비나 인생의 전환점 같은 때는 언제였나요?

A. 저는 지난 40년 넘게 간증집회를 다니면서 병원에 응급실에 실려 간 적도 없고 동네 병원에 입원한 적 없었어요. 주로 밤에 돌아다니니까 사고 위험이 많은데도 하나님이 모든 상황에서 지켜 주셨어요. 그렇게 지난 40년 사역 동안 약 만 번의 집회를 다녔는데 그 모든 집회를 빠트리지 않고 갈 수 있도록 하나님이 저를 입원시키지도 않고 운전도 안전하게 지켜 주셨어요. 그래서 여러분! 큰 병에 걸렸다가 회복되는 것도, 큰 사건에서 건짐 받은 것도 귀한 간증이지만, 그런 것들 없이 하나님 은혜로 평탄하게 산 것도 좋은 간증입니다그것이 나의 간증이자 자랑이었어요.

그런데 금년 1월에 전립선 암 선고를 받고 113일 암 수술을 했어요. 그리고 지난 3월에 저작권 문제가 터지면서 깨달았어요. ‘하나님 제가 너무 교만했군요.’ 그러면서 이 땅의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을 아픔과 고난을 더욱 이해할 수 있게 됐어요. 이런 아픔들을 겪고 나니까 비로소 내가 전에 불렀던 찬양들이 내 가슴으로 들어왔어요. <주님 손잡고 일어서세요>라는 찬양이 진정으로 내 노래가 된 거죠. 그러고 보니까 암도 이번 사건도 코로나도 모두가 은혜였고, 고난 중에 내 고난의 삶을 뚫고 나가는 찬양이 진짜 내 찬양이라는 것을 알았고 그 곡들이 이제야 나를 세워가는 것을 발견했어요. 하나님 예전의 저를 회복시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안에 다시 새 노래가 나오게 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김석균 목사는 "고난을 뚫고 나가는 찬양이 진짜 내 찬양"이라고 고백한다.
김석균 목사는 "고난을 뚫고 나가는 찬양이 진짜 내 찬양"이라고 고백한다.

 

Q7. 목사님은 현재까지 40년 넘게 찬양사역자의 길을 걸어오시면서, 작곡집만 18, 400곡을 써 오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모든 곡들이 목사님의 대표곡이지만, 그중에 한국교회 성도들에게 가장 많이 애창된 곡들이 참 많은 것 같아요. 이를테면 <주를 처음 만난 날> <사랑의 종소리> <주님 손잡고 일어서세요 : 왜 나만 겪는 고난이냐고> <난 예수가 좋다오> <주의 길을 가리라> <해같이 빛나리> <예수 믿으세요> . 이런 은혜로운 곡들이 나오기까지 수많은 사연과 간증이 있을 것 같은데요?

A. <사랑의 종소리>가 그렇게 나왔어요. 제가 82년도에 우리 교회 전도사님과 중창단을 하며 듀엣을 했는데, 그분이 결혼식을 하게 돼서 제가 선물로 축가를 써주겠다고 약속했어요. 그래서 고전 13장을 수없이 읽다가 그 찬양이 만들어진 거죠. 그 후 90년까지 사랑의 종소리가 결혼식장에서 거의 도배되다시피 했어요.

 

Q8. 지금까지 국내외 수많은 교회들을 다니시면서 찬양을 통해 복음 전파 사역을 감당하셨는데, 특별히 기억에 남던 집회나 만났던 교회들의 에피소드가 있다면 어떤 일들이 있나요?

A. 20년 전으로 기억돼요. 서울 어느 교회 집회를 가서 기타를 치면서 찬양 첫 곡을 부르는데 회중석에 있는 한 분이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어요. 더 이상 진행이 안 될 정도로 소란을 피웠어요. 귀신 들린 사람이었어요. 예배당에 모인 사람들 시선이 거기에 쏠렸고 부목사님들과 전도사님들이 우르르 몰려가 제어를 해도 귀신 들린 한 사람을 통제를 못하는 거예요. 그때 무대에서 제가 잠시만요. 그분 내버려 두세요. 우리 찬양을 합시다.” 그러면서 찬양을 불렀어요. 그러자 그 귀신 들린 사람이 갑자기 잠잠해지더니만 잠이 들어버린 거예요. 그분이 귀신 들린 걸로 아주 유명한 분으로 평소에도 그렇게 방해가 됐는데, 찬양을 부르고 잠들자 모두들 신기해했던 일이 있었어요.

미국에서 집회를 할 때도 어떤 분이 찬양을 부르니까 진행을 못할 정도로 통곡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다른 찬양을 이어 부르니까 잠잠해졌어요. 알고 보니 몇 년 전에 갑작스러운 사고로 아들을 잃었는데, 너무 큰 충격에 아들의 장례식장에서 눈물이 한 방울도 나오지 않던 거예요. 그 이후로 죽은 아들 생각만 하면 눈물은 나오지 않고 분노만 가득했고 가슴 아래가 막힌 것처럼 늘 답답했는데, 그날 찬양집회 때 제가 <주님 손잡고 일어서세요>를 부르니까 드디어 그 막혔던 울음이 터진 거예요. 그분이 목양실로 찾아와 그 이야기를 하는데 이제야 내가 살 것 같다. 너무 감사하다라고 눈물로 고백하는 거예요. 다윗이 수금을 탈 때 악령이 떠나고 심령이 치유되는 역사를 현장에서 끊임없이 봤어요.

 

Q9. 처음 사역을 시작할 때는 김석균 집사님으로 시작했다가, 나중에 신학을 하고 목사 안수까지 받으셨잖아요. 신학을 하게 된 동기는 무엇인가요?

A. 1995년 말에 평소에 호형호제하던 장욱조, 김민식 찬양사역자들과 송년회를 마치고, 장욱조 사역자님 집에서 커피를 마시는데, 장욱조 사역자가 , 내년부터 신학을 해야겠다는 거여요. 그리고 기회가 된다면 목회도 할 생각이라는 거예요. 그러자 김민식 집사도 , 나도 신학하면서 사역의 지경을 넓힐 생각이어요말했어요. 그러자 장욱조 사역자가 ! 너는 안 할래?” 그러는 거예요. 그 자리에서 에이. 형 저는 직장이 있는데 어떻게 사역해요. 저는 괜찮아요그리고는 집에 와서 다림질을 하는 아내에게 그 말을 했더니 대뜸 당신도 신학을 해보라는 거예요. 그렇게 급하게 알아보니 1995년 당시 유일하게 교육부 인가 야간 신학이 안양대 신대원에 있어서 다니게 됐고 졸업은 1999년에 했지만, 전도사로만 사역하다가 2014년 목사 안수를 받았어요. 목사 안수를 받으니 좋은게 11시 대예배에도 세움 받을 수 있었어요.

 

Q10. 극동방송에서는 <김석균과 함께> CTS TV에서는 <최미, 김석균의 내 영혼의 찬양>의 진행자로도 사역하셨는데, 특별히 방송활동으로 은혜가 되었던 점은 무엇인가요?

A. 제 나이 50살이 되던 2000년이어요. 50대를 시작하는 1월에 오산리 기도원에 올라가 하나님께 50대 이후의 계획을 여쭸어요. 그런데 기도하는데도 아무런 응답이 없었어요. 그런데 기도 끝나고 내려오니까 하나님이 목을 못 쓰게 만드셨어요.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데, 사역은커녕 교단에도 설 수 없을 정도였어요. 결국 아내도 그만 두라고 말해서 4월 초에 명예퇴직 신청서를 내고 명예퇴직 신청서에 최종 사인을 했는데 신기하게 다음날 목을 풀어주신 거예요. 그 일이 있고 2001년에 CTS에서 PD가 찾아와 MC 제안을 했어요. 처음에는 거부했어요. 하지만 방송국에서 수차례 회의를 해도 김석균 만한 사람이 없다면서 또다시 찾아온 거예요. 그러면서 방송 시놉시스를 보여주는데, 순간 내 마음속에 그래, 이거다하는 감동이 들었어요. 하나님이 나를 방송으로 이끄신다는 것을 깨닫고 아무런 조건 없이 제안을 받아들여 <내 영혼의 찬양>이 시작된 거죠. 그렇게 13년을 진행했어요. 하나님은 방송 일을 시키시려고 앞서 학교를 그만두게 하신 거예요.

하나님은 방송 일을 시키시려고

앞서 학교를 그만두게 하신 거예요.

Q11. 목사님의 이후의 꿈과 계획은 무엇인가요?

A. 특별한 계획은 없어요. 주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가고 싶어요. 단지 제 간절한 기도는 하나님, 창작의 샘이 마르지 않게 하옵소서예요.

하나님, 창작의 샘이 마르지 않게 하옵소서

평생 창작의 샘이 마르지 않기를 기도하는 김석균 목사
평생 창작의 샘이 마르지 않기를 기도하는 김석균 목사

"오늘 목사님의 간증에 많은 은혜가 됐습니다. 또 이 기사를 접하는 독자들에게도 큰 위로와 도전이 되리라 생각됩니다. 목사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창작의 샘을 이 후로도 계속 넘치도록 해 주셔서, 이 땅의 교회들과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그 은혜가 흘러 들어가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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