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리훈 박사(라스베가스 갈보리장로교회 장로)
김리훈 박사(라스베가스 갈보리장로교회 장로)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은 유다를 3번 침공하였다. 그 이후에도 소규모로 두 차례 침공하였다는 기록이 성경에 있다. 다니엘은 바벨론이 유다를 첫번째 침공했을 때인, BC 605년, 여호와김 3년에 그의 세 친구들과 포로로 잡혀와 이방 땅(바벨론)에서 70년 동안을 사역하며 바사(페르시아) 고레스 왕 3년인 그의 나이 88세에 생을 마감하였다. 그는 낯선 이방 땅에 포로로 잡혀 왔어도(그의 나이 15세 였음), 바벨론 문화에 동요되지 않고 속하지 않기위해 거룩하기로 결단하였다(다니엘서 1장). 요즘 현대교회의 가장 큰 문제점은 기독교 사회에서 거룩과 경건을 너무나 쉽게 포기하는 모습이 있다. 세상의 문화, 철학, 시대 정신(뉴에이지, 신비주의, 다원화 사상), 물질만능주의, 이기주의가 교회에 침입해 교회의 거룩성을 잠식해 교회가 세속화 되었다. 또한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담당해야 할 성도들이 세상과 동화되어 하나님보다 세상을 사랑하며 쾌락주의에 빠져있는 회칠한 무덤과 같은 모습이다. 교회는 거룩해야 하며 구원받은 성도는 경건하게 살아야한다.

단 1장 - 6장에서 다니엘은 이방왕들의 꿈을 풀고 해석해 주는 척척 박사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 단 7장 - 12장까지에서 다니엘은 자기가 꿈을 꾸지만 그것을 풀지를 못하여 천사가 나타나 그의 꿈을 해석해 주지만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한다. 단 1-6장 까지의 주요 무대는 ‘바벨론과 바사’이고, 단 7-12장 까지의 주요 무대는 ‘예루살렘 성전’이다.

단 2장과 7장은 거의 같은 내용인데 다니엘은 바벨론이 일어났다가 망하며, 메대 바사(페르시아)가 일어났다가 망하고, 그 다음 헬라가 일어났다가 망하고, 또 로마가 일어났다가 망하는 것을 꿈과 이상을 통해 예언하였다. 다니엘은 이러한 제국들의 변천사를 보면서,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류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며 세상의 역사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보았다. 또한 다니엘은 현재 우리가 사는 시대 앞으로 일어날 7년 대환란 후반부에 있을 적그리스도의 시대에 대해서도 예언을 하였다. 적그리스도의 국가는 유사 이래 가장 강력한 국가로서 이것은 마치 세상에 존재해 왔던 모든 제국들을 합한 정도의 가장 강한 세력이다. 그 기간 동안 너무나 많은 성도들이 핍박을 당하고 살륙을 당하게 된다. 그러나 예수님이 재림하심으로 적그리스도의 나라는 패하고 마귀, 적그리스도, 그리고 그의 사자들이 영원한 불못에 처해지고 영원한 나라 새하늘과 새땅이 설립된다.

단 3장을 통해 다니엘은 느부갓네살 왕의 우상숭배와 교만을 보았고 반면 다니엘의 세 친구들(하나냐, 미사엘, 아사랴)은 주인되시는 하나님께 죽도록 충성함으로 풀뭇불에서 구원받았다. 다니엘서 3장 이후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다니엘서 4장은 느부갓네살 왕의 말년에 쓰인 것으로 느부갓네살 왕의 큰 나무 꿈을 예언한 것인데 느부갓네살 왕이 다시 교만하여 하나님의 벌을 받아 그가 어느 사람에게 쫓겨나 7년 동안 미치광이가 되어 초원에서 들짐승과 함께 살다가 다시 그의 총명이 돌아와 자기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깨닫고 그의 왕위가 회복되었다. 우리는 이 점에서 교만을 버리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야 한다.

단 5장은 바벨론의 마지막 왕이었던 벨사살 왕 3년에 일어났던 사건으로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를 벨사살 왕은 무시하고 예루살렘 성전에서 탈취해 왔던 예루살렘 성전 집기들로 술을 마시고 하나님을 멸시하고 모독하였다. 그 때 손가락이 나타나 벽에 글을 썼는데,’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 이었다. 이 글을 다니엘은 해석하였는데 내용은, “메네: 하나님이 이미 벨사살 왕의 나라를 세어서 그것을 끝나게 하셨다(바벨론 나라의 멸망), 데겔: 왕이 저울에 달려서 부족함이 보였다, 우바르신: 벨사살 왕의 나라가 나뉘어서 메대와 바사 사람에게 준바되었다”. 결국 그날 바벨론 왕 벨사살이 피살되고 메대사람 다리오가 바벨론을 얻었다. 메대 바사는 메대와 바사가 합친 국가로서 메대는 지금의 아제르 바이젠으로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메대 사람 다리오는 페르시아 왕이었던 고레스의 외삼촌으로 바벨론 왕 벨사살을 멸망시켰던 때 그의 나이는 62세 였고 바사(페르시아)왕 고레스는 40세 이었다. 메대 사람 다리오는 바벨론을 정복하고 바벨론의 왕으로 세워졌다. 그러나 다리오 3년 이후에 고레스가 바벨론, 메대, 바사(페르시아)를 통합해 페르시아 제국을 설립했으며 페르시아 제국의 왕이 되었으니 그 때가 고레스 원년(BC 586) 이었다.

‘다니엘’의 뜻은 ‘하나님은 나의 재판관 이시다’ 이다. 바벨론 마지막 왕이었던 벨사살 처럼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를 무시하고 하나님을 모독할 때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피할 길이 없다. 1517년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키기 전 그의 최대의 관심사는, “죄인인 인간이 어떻게 의로우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것인가?”이었다. 그리고 종교개혁 시 그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롬 1:17)에서 자기 문제를 해결하였다. 교회의 사면이 아니라 주 하나님께서 주신 의로움(alien righteousenss)으로 사는 것이다. 루터는 이신칭의와 함께 십자가 신학을 주장하였다. 주 하나님의 법정 앞에 선 엄중한 의식이 있었다. 코람데오는 구원과 심판, 두 의미를 갖는다. 그런데 요즘 많은 교역자들이 심판이 배제된 ‘이신칭의’를 주장하고 있다. ‘이신칭의’는 법정적 용어로서 우리가 예수를 믿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사함 받아(의롭게 되어) 구원을 받았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거의 모든 신자들은, “일단 구원을 받으면 심판을 받지않고 그 구원은 영원하다(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라고 말한다. 이러한 “심판이 배제된 이신칭의”는 자유주의 신학자 루터파 루돌프 불트만에 의해 제창되었다. 물론 하나님의 구원은 영원하고 변치 않으시다. 그러나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의 구원을 판단할 수 있을까? 죄를 사하는(죄인을 의롭게하는) 권세와 구원은 피조물인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하나님의 영역이요 주권이다. 하나님의 구원을 인간이 판단하는 것이 구원파 신학 이다.

칼빈주의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A를 선택하셨다면, A는 반드시 구원받는다. 구원받은 A는 구원에서 탈락될 수 없다. 즉 하나님의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다. A가 타락하여 구원에서 탈락하였다면 A는 애당초 구원받은 사람이 아니다. 하나님은 A의 구원을 과거(창세 전)에 예정하셨다(엡 1장). 그러나 피조물인 A는 이러한 하나님의 심오하고 숨겨진 구원의 예정을 알 수 있을까? 칼빈은 말하기를, “하나님의 구원의 예정을 안다는 것은 마치 광안에 있는 빗장문을 열고 그 안을 들여다보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들여다보니 환히 보이는 것이 아니라 캄캄하다는 것이다. 칼빈은 하나님의 구원의 예정을 ‘하나님의 신비’ 즉 ‘하나님의 숨겨진 뜻’이라고 하였다. 칼빈은 생전에 누가 선택되어 구원받았는지 알 수 없다고 하였다. 즉 구원의 여부는 심판대 앞에서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구원의 여부를 알기를 원하는 사람을 위해 칼빈은, “성화의 삶이 구원의 근거가 될 수 있다”고 하였다. 당신은 택자인가? 당신은 구원받은 사람인가? 택자처럼, 구원받은 사람처럼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는가?

알미니안주의에 의하면,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 보다는 인간의 선택과 인간의 자유의지에 중점을 둔다. A가 하나님의 조건적 선택으로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다. A의 믿음은 자기가 선택한 믿음이기에 그 믿음을 자기가 버릴 수 있다. 그러므로 알미니안주의에서는 구원의 탈락 가능성을 말할 수 있는것이다. A가 비록 구원을 받았더라도 A가 믿음을 저버리면 구원에서 탈락할 수 있는 것이다.

칼빈주의나 알미니안주의나 사람이 구원을 확신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칼빈주의에서는 A가 선택을 받으면 A는 반드시 구원받는다. 그러나 A가 하나님께 선택받았는가? 이것이 문제이다. 즉 사람이 인지하는 것에 확실성을 둘 수 없다. 알미니안주의에서는 A가 복음을 듣고 자기의 선택으로 예수를 믿었기 때문에 A는 자기의 믿음을 끝까지 지켜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 A는 자기의 믿음을 끝까지 지킬 수 있는가 ?

자유주의 신학자 오스카 쿨만(Oscar Culmann, 1821-1881)은, ”예수를 믿고 구원은 이미(already) 받았으나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니다(but not yet)”라고 하였다. 고경태는 쿨만의 구도는 인류 역사를 구도화시킨 것으로 밝히고, 개인 구원 서정에 대해서 적용하는 것이 적당하지 않다고 밝히고 있다.

전통적인 구원의 서정에 의하면 구원의 시제를 세 단계로 구분하였다. 구원의 과거를 칭의, 구원의 현재를 성화, 구원의 미래를 영화라고 하였다. 이 말은 A가 예수를 믿고 죄사함 받았다면(칭의), 현재 성령과 동행하는 삶(성화)이 나와야 하고, 이 사람은 믿음을 끝까지 지켜 영광 세계에 들어간다 (영화). 이 과정 전체가 구원이다. 그러나 구원을 과거의 한 사건으로 치부해 버리면 이것은 영락없는 구원파신학 이다. 필자는 오랫동안 구원파 신학을 연구해 왔다.

 

구원파 신학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1. 구원파는 구원이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이며 영역인데 피조물인 인간이 하나님을 대신해서 나나 타인의 구원의 여부를 판단하거나 구원의 확신을 종용하는 행위이다. 우리는 구원의 확신이 있다고 하여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구원을 해 주셔야 구원을 받는다. 우리는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의 확신을 갖는다.

2. 구원파는 인간에게 있어서 구원을 과정으로 보지않고 구원을 사건으로 보는 행위이다. 구원파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을 통해 A가 죄사함의 비밀을 깨닫는 순간 A의 과거, 현재, 미래의 죄가 다 사해져서 A는 의인이 되어 구원이 완성된다’고 한다. 구원파는 구원이 일어났던 순간을 영적 생일 이라고 하여 때와 시간을 중요시한다. 이러한 악한 사상이 심지어 사랑의 교회 제자훈련 과정에도 있었다. 구원파는 영적생일 이후에 의인이 되었기에 죄를 회개해서는 안된다고 한다. 그리고 무슨 짓을 하더라도 그것은 그들의 구원에 하등의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고 한다. 심지어 타인을 죽이거나 자살하여도 말이다. 이것은 현대판 영지주의이다. 영지주의는 영과 육을 구분하여 영은 거룩하고 고상한 것이지만 육은 하등한 것으로 간주한다. 일단 영이 구원받으면 육이 무슨 일을 해도 영의 구원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영지주의 구원은 영이 육체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는 금욕주의로 흐르고 다른 하나는 초대교회의 니골라당 처럼 쾌락주의로 흐르게 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설 때 까지 육신의 몸을 입고 있는 죄인이다. 루터가 제시한 의인이면서 죄인(simul justus et peccator)이다.

3. 구원파의 구원 이해는 심판이 배제된 이신칭의이다. 이들은 예수를 믿음(깨달음)으로 일단 구원을 받았으면 더 이상 심판이 없다고 한다.

성경은 모든 사람의 사후에 심판이 있다고 증거한다. 롬 14:10; 고후 5:8-10; 전도서 12:13-14; 히 9:27.

4. 상급 사상을 강조하는 행위. 상급 사상을 강조하는 것은 ‘그들이 이미 구원을 완성했다’라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하나님의 구원을 인간이 판단하는 망령된 행위이다. 우리는 믿음으로 죄사함받고 의롭게 되어 구원을 받았지만 개인 종말시 하나님(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우리의 믿음과 죄사함(의롭게 됨)의 진위가 판단되어 구원의 여부가 결정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기 전, 미리부터 우리자신의 행위와 생활을 반성하며 저울로 달아보듯이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고 판단해야 한다. 다니엘은 그의 이름처럼 심판을 준비하며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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