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 열정에 빠진 한국의 바나바 이강천 목사 이야기 (3)

글∙임승훈목사(더감사교회, 더감사운동본부 대표)필자 임승훈은 1980-90년대 월간목회, 한국성결신문에서 편집부장을 역임했고, 1995-2013년까지 서울 인천에서 목회를 했다. 근자에는 뜻한바 있어 더감사교회를  개척하고, 더감사운동본부와 위대한맘(싱글맘)단체를 설립하여 싱글맘들을 돌보고 있으며, 2019년 『나는 당신을 만나 행복합니다』란 감사책을 출간해 큰 반향을 일으킨 바 있다.
글∙임승훈목사(더감사교회, 더감사운동본부 대표)필자 임승훈은 1980-90년대 월간목회, 한국성결신문에서 편집부장을 역임했고, 1995-2013년까지 서울 인천에서 목회를 했다. 근자에는 뜻한바 있어 더감사교회를 개척하고, 더감사운동본부와 위대한맘(싱글맘)단체를 설립하여 싱글맘들을 돌보고 있으며, 2019년 『나는 당신을 만나 행복합니다』란 감사책을 출간해 큰 반향을 일으킨 바 있다.

196520세가 되던 겨울, 은산교회에서는 동계부흥회가 열렸다. 강사는 서울신학대학교의 고() 이상훈교수였다. 이때는 이미 이강천형제가 고입 검정과 대입 검정고시를 패스한 시점이었다. 당시 담임이던 이병돈 전도사는 강사님을 개인적으로 소개하면서 이선생, 이분이 서울신학대학 이상훈교수님이시네...미국 유학파이기도 하시구이는 흡사 이강천 청년을 위한 진로와 미래에 대한 암시뿐 아니라, 그를 위한 집회 같은 그런 부흥회였다.

원고를 읽으며 가끔씩 안경을 추겨 들고는 한 번씩 청중을 훑어보며 안 그렇습니까? 여러분!”하는 아주 냉랭한 부흥회였다. 별로 은혜롭지 않은 가운데 눈을 반짝반짝 빛내는 비쩍 마른 청년이 하나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이강천 형제였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이강천은 66년 봄 서울신학대학의 문을 두드리고 사명자의 길을 가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한 인물을 초청하시고 신학을 하게하시더니, 군목으로 인도 하시고 대학원에서 공부하게 하시었다. 군목 제대와 동시에 있었던 교단 해외장학생선발 시험을 거쳐 켄터키주 에즈베리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과정(M. Div.)으로 유학의 길을 나서게 하셨다. 실로 엄청난 사건이고 변화이셨다.

66년도 입학시험을 치르고 면접을 치르는데 과연 어떤 질문이 날아올지 모두가 심각하다. 첫 면접자로부터 귀관은 방언을 할 줄 아는가?’라는 면접 정보를 듣고는 이강천 자신에게도 같은 질문이 던져져올 때 능청맞게도 방언이 뭔가요?’라고 대답해버렸다. 자신도 방언을 할 줄 알지만 모르는 척 답변하여 합격하게 되었다.1)

입학 후 한 달포쯤 지났을 무렵 교내에 안내문이 붙었다. 1기 군종장교후보생을 선발한다는 내용이었다. 꼭 자신을 위한 프로그램이 가동되는 듯한 느낌이었다. 합격하면 장학금 수혜를 받을 수 있고, 졸업하면 모두가 입대해야 하지만 특별히 군종장교로서 중위로 임관을 한다는 것 아닌가. 마치 이강천을 위해 신설된 제도 같았다. 당당히 또한 합격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가 재학하던 시절에는 서울신대에 대학원이 없었는데 졸업하던 70, 그 이듬해에 대학원이 설립된다는 것이다. 이를 놓칠 리 없다. 1971년 초 서울신학대학교 대학원 제1기생으로 당당히 합격해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마음속에 미국에 유학하고 교수로 일해야겠다는 계획과 작정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일마다 때마다 징검다리 하나씩을 놓아주시는 게 아닌가.

대학원(M.A.)에 입학해 공부하던 2년차 1972, 당시는 서울 상도교회(() 황대식 목사 담임)에서 교육목사로 시무하던 시절이었다. 그해 424일 총회본부에서 군목으로 목사안수를 받았고, 같은 해, 812일에는 황 목사님의 소개와 주례로 홍점순씨와 화촉을 밝히게 되었다. 청소년기만 해도 희망도 없고 미래도 없었던 그에게, 굶주림이 일상이었던 이강천에게 이러한 모든 일은 생각지도 못한 놀라운 시간, 가슴 벅찬 시간들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197511월에 군목대위로 제대를 앞두고 있던 시절, 우리교단에서는 총회장학회가 처음으로 설립돼 첫 해외장학생 선발 시험을 치렀는데 1명을 선발하는 과정에 또 합격했다. 이 과정을 두고 이강천 선생님은 겸손하게 이렇게 말한다.

-아마도 총회장학회에는 이미 이강천목사가 에즈베리대학교 대학원 과정을 전()장학생으로 유학이 내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적은 비용으로 장학회도 알릴 겸 이강천목사가 안성마춤이었다고 생각됐던 모양이입니다. 나보다도 실력 있던 분들이 2명이나 더 응모하고 있었거든요.”

아무튼 이강천은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도 떼어놓고 유학길에 올랐다. 처음 학기에는 언어가 들리질 않아 무척 고생했다고 한다. 두 학기 째가 지나면서 어느 정도 들리는 문제가 해결되니 공부할 만 했다.

-과목마다 리포트가 두세 개씩 주어지는데 그것 또한 만만치 않았지만 한 친구의 도움으로 리포트만큼은 거의 완벽하게 소화하니 평판은 좋은 편이었지요. 윤리학과 현대신학을 중심으로 열심히 하여 3년 과정을 25개월만에 조기 졸업하여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지요.” 그의 나이 만 34세였던 때이다.

서울신학대학 교수에 총회 선교국장까지 그 중 그가 가장 사랑하는 직함은 바나바훈련원 원장이다.
서울신학대학 교수에 총회 선교국장까지 그 중 그가 가장 사랑하는 직함은 바나바훈련원 원장이다.

792월 귀국하자마자 모교인 서울신학대학교에서 윤리학교수로 임용돼 제자들 육성에 열과 성을 다하였다. 하지만 그는 교수체질이기 보다는 목회체질이었는지 만 2년 만에 교수직을 사임하고는 경남지방 밀양교회의 청빙을 받고 목회하였다. 그로부터 2년 뒤 영동중앙교회에서 청빙이 있어 서울 강남지방에서 목양에 헌신했다. 웬일인가. 영동중앙교회에서 3년을 다 못 채운 시기, 임철재목사가 교단 총무로 가자마자 선교국장으로 추천해 교단본부에서 선교사역을 불철주야로 뛰게 되었다. 이 때(1986. 6.)부터 이강천목사는 일평생을 선교사역에 주역으로 뛰었다. 그것이 기회가 되었는가 마지막 세기 마지막 주자(1990, 두란노서원)란 책이 출간됐다. 이 책은 우리교단이 해외선교의 물꼬가 트이고 한참 초석을 다지던 때였는데, 개인의 선교외침이기도 했으나 이 책을 통해 마지막 선교의 시대 ... 선교사로 헌신하는 이들이 들불처럼 일어나게 되었다.

선교국장 시절 이런 일도 있었다. 당시는 해외선교위원회가 설립되고 한참 기틀을 잡아가던 때인지라 선교국장의 직임이 매우 중요했고 전국교회를 돌며 모금을 하면서 뛰어다녀야 했다. 충주를 거쳐 대구로 중요 인사를 만나러 가던 때였다. 문경새재를 넘고 있을 때였다. 꾸불꾸불한 위험한 도로를 빙글빙글 급회전을 하면서 내려가던 중 커다란 대형버스가 중앙선을 넘어 달려온다. 정면충돌의 위기를 간신히 면하고 오른쪽 난간을 벗어나 도랑에 쳐 박혔다. 운전은 송희천선교사, 총무 임철재목사와 해선위원장 이병돈목사는 뒷좌석에, 선교국장 이강천은 조수석이었다. 아뿔사 다른 분들은 조금씩 안정을 취하고 퇴원했으나 늑골에 갈비뼈가 몇 개 부러진 이강천국장은 여러 달을 치료에 매달려야만 했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면서 몇 가지를 생각해본다. 너무 쉼 없이 달렸다는 생각이다. 27에 결혼하여 곧 아들과 딸을 낳지만 유학길에 오른 이강천은 아내와 남매를 한국에 남겨 둔 채 유학생활을 해야만 했다. 2년 반 만에 조기 졸업한 그는 잠시의 여유도 없이 서울신학대학교의 윤리학교수로 임용됐으나, 교수보다는 목회가 더 하고 싶어 만 2년 만에 사임(19812) 밀양과 영동중앙교회에서 56개월간 목회하다가 총회의 부름을 받았던 것이다. 당시는 영어를 할 줄 아는 목사가 귀하던 시절, () 임철재총무의 강력한 추천으로 귀한 선교일선에서 총회 행정을 돕고, 해선위의 모금을 하고, 전세계 선교현장으로 뛰어다니며 총회장, 해외선교위원장 총무 등과 함께 선교사들을 격려하는 일을 진두지휘했다. 그런데 무리였다. 몸의 회복은 더디어지고 휴직계는 더 이상 길게 쓸 수 없고 결국 천안 망향기도원과 대전 갈릴리 기도원에서 요양의 길을 걷게 되었다. (연재 계속)

2021.7.9 영흥도 장경리해변 농어바위 일몰 출사. 이강천원장님 부부를 모시고 다녀왔다
2021.7.9 영흥도 장경리해변 농어바위 일몰 출사. 이강천원장님 부부를 모시고 다녀왔다

 

미주 1) 당시는 방언이 일반적이지 않을 뿐 아니라 OMS선교부의 영향이 큰지라. 방언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불이익을 주던 시절이었다. 80년대 이후 모든 목회자들이 방언을 하고 서울신대교수진들도 방언을 하다 보니 더 이상 그런 질문은 하지 않는 것으로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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