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 열정에 빠진 한국의 바나바 이강천 목사 이야기 (2)

필자 임승훈은 1980-90년대 월간목회, 한국성결신문에서 편집부장을 역임했고, 1995-2013년까지 서울 인천에서 목회를 했다. 근자에는 뜻한바 교회를 개척하고, 더감사운동분부와 위대한맘(싱글맘)단체를 설립하여 싱글맘들을 돌보고 있으며, 2019년 『나는 당신을 만나 행복합니다』란 감사책을 출간해 큰 반향을 일으킨 바 있다.
필자 임승훈은 1980-90년대 월간목회, 한국성결신문에서 편집부장을 역임했고, 1995-2013년까지 서울 인천에서 목회를 했다. 근자에는 뜻한바 교회를 개척하고, 더감사운동분부와 위대한맘(싱글맘)단체를 설립하여 싱글맘들을 돌보고 있으며, 2019년 『나는 당신을 만나 행복합니다』란 감사책을 출간해 큰 반향을 일으킨 바 있다.

이강천 목사(45년 부여출생), 그는 여러 가지 직함으로 불리 운다. 시인, 사진작가, 저술가, 학자, 필자 동기들에게는 서울신학대학교에서 가르쳤기에 교수(敎授) 또는 선생님이라고 불려진다, 바나바훈련원을 설립해 목사들을 재교육하였기에 원장 등 다양하게 불려졌다. 또 있다. 체계적인 전도교육이 없던 시절 국제 전도폭발 한국본부장을 맡아 전도의 체계화를 위해 무척 애쓰셨다. 하지만 선생님은 아무래도 제일로 애정이 있는 직함은 원장일 터, 오랫동안 사역하였고, 직접 개척하고 열정을 쏟았던 것이라(바나나훈련원) 원장이라 생각된다. 하지만 2010년 이후, 최근 들어서 그의 이력은 사진작가(?), 사진 활동이 우선이라 하겠다.

이강천 원장님은 참 소박하다. 꾸밈이 없다. 친구 같은 분이다. 귀티는 전혀 없다. 언제나 전화 통화가 가능하다. 카톡이 자유로우며, 메일 뿐만 아니라 sns에도 밝다. 마음이 너무나도 맑으시며, 영성은 말할 게 없다. 나이 탓인지 귀는 조금 어두워졌어도 어린아이처럼 맑은 심성의 소유자이며, 깊은 영성과 건강한 체성의 소유자다. 어쩌다 댁을 방문할 때에 작은 선물이라도 드리면 어린아이처럼 좋아한다. 필자가 제일로 닮아가고 존경하여 같은 길을 걸어가고 싶은 분을 꼽으라면 단연 이강천 원장이시다. 나는 아직 그분의 영적 깊이에, 특히 인성과 인격의 깊이에 비교조차 할 수 없다, 박경리의 토지의 말을 빌리자면 새발의 편자일 뿐이다.

이강천 목사님의 이력을 보다가 깜짝 놀랄만한 것을 수없이 만난다. 그의 정규학업은 초등학교 졸업이 전부다. 또한 고입검정고시(중학교과정), 대입검정고시(고등학교과정)를 청소년기 시골집, 호롱불 아래에서 독파했다는 것이 놀랍다. 어쨌든 그의 아버님은 얼마나 사는 게 고단했으면 어린 이강천을 가사에 보탬이라도 돼야한다며 2학년 때 4학년으로 월반시켰다. 초등학교를 빨리 졸업시켜서 집안의 일을 돌보도록 하겠다는 생각에서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의 그 같은 계획은 곧 수포로 돌아갔다. 어린 시절 피난살이에 잘 먹지 못하여 매일 같이 아프니 의욕 없이 청소년기를 지냈을 성 싶다. 폐결핵으로 얼굴은 파리해지고, 위장병으로 못 먹으니 체구는 작고 비쩍 마른 모습에, 심부전 증상까지 겹쳐왔다. 달리기는커녕 걷는 것조차도 힘들었다. 외출이라도 할양이면 1킬로미터를 채 견디지 못하고 주저앉기 일쑤였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중고등과정을 건너뛰는 검정고시에 매달렸으며 통과할 수 있었을까? 요즘에 흔한 학원 근처에도 가보질 안았을 터. 답이 나오질 않는다.

그만큼 이강천에겐 부여에서의 농촌생활이란 너무나도 작은 터전일 뿐이다. 서울로 올라가야 했다. 그것은 대학에 가는 길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 헌데 15세 때에 이웃집 아저씨의 강권하는 전도로 교회를 나갔고, 16세에 회개와 함께 예수님을 만나는 체험, 세례, 신앙생활을 하는 가운데 큰 은혜를 경험했다. 믿음생활로 인한 치유의 경험이 가장 큰 변화였다. 폐결핵이 보건소의 진단결과 치유되었음을 확인하고, 그의 공부는 달리는 말에 박차를 가하는 형국이었다. 위장병도 심근경색도 차츰 회복이 되어갔다. 검정고시를 차례로 붙어가니 자신감도 생겼다.

또한 또래의 친구들과 함께 산 기도를 자주 다니게 되었는데, 다른 친구들은 방언의 은사를 체험하며 따따부타오랫동안 기도를 하는데 자신은 아무리 기도해도 방언이 나오질 않았다. 당시의 방언은 은혜 받은 징표라며 자랑하던 시절이 아닌가. 이강천은 어느 날 저녁예배가 파하고 늦게까지 앉아 기도하고 싶은 마음에 무릎을 조아렸는데, 입에서 격한 소리, 그러나 알지 못할 언어가 튀어나왔다. 어깨가 들썩들썩 무쓰, 무쓰, 무쓰’, 무슨 말인지도 모를 방언이 터진 것이다. 잠시 어린 시절 얘기를 직접 들어보자. (무쓰는 중국어로 목사란 말이다.)

사진 속 이강천 목사. 지난 연말 수원의 자택으로 방문하여 시와 영성, 사진과 카메라, 한국목회자들의 선교영성훈련에 매진하던 이야기를 가지고 담소하던 중 한 컷을 찍다.
사진 속 이강천 목사. 지난 연말 수원의 자택으로 방문하여 시와 영성, 사진과 카메라, 한국목회자들의 선교영성훈련에 매진하던 이야기를 가지고 담소하던 중 한 컷을 찍다.

Q1.선생님의 종교적인 성장배경은?

A. 신앙이 없는 배경이지요. 6.25로 인해 서울에서 충남 부여(은산)로 피난을 갔습니다. 피난살이하며 잘 먹지를 못해 위장병, 폐결핵, 심부전 등 병치레로 청소년기를 보냈습니다. 한 마을에 사는 유일한 신자가정의 집사님 전도로 15세에 교회를 나가게 되었고, 1년후 16세 때에 회개하고 예수를 만나는 체험을 했죠. 예수를 만나자 절망가운데서 희망의 마음을 갖게 되어 온갖 불가능한 환경과 조건을 넘어 이제까지 힘차게 살고 있습니다.

 

Q2. 가족사항은?

A. 이제 결혼 49년차인데 아들 하나(이휘재, 73년생)와 딸 하나(이은경, 75년생)를 두었는데, 아들은 캐나다 토론토에서, 딸은 미국 달라스에 이민하여 살고 있습니다.

 

Q3. 학력을 소개해주세요.

A.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에 갈 여력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만나고 희망적인 에너지가 솟으면서 독학으로 중고등학교를 검정고시로 통과하고 대학입학 자격을 얻었어요. 예수를 믿고 서울신학대학교에서 신학을 하고는 군목으로 복무하고 제대 후 미국에서 유학하고는, 서울신학대학교 교수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나이 22세가 기울던 12월이었다. 농촌에서는 대개 논농사와 가을추수를 모두 마치는 12~1월 중, 그러니까 농한기가 다가오면 대개 동계부흥회가 열렸다. 당시 은산교회 담임 이병돈전도사(현재 은평교회 원로목사, 전총회장)의 주선으로 이상훈교수를 모시고 동계부흥회가 열린 것이다. 그런데 강사님이 원고만을 읽으면서 가끔씩 회중을 쳐다보고는 그렇지 않습니까?’ 하는 게 아닌가. 농촌실정에 전혀 맞지 않는 강사가 초대된 것이다. 이를 어쩌랴. 이는 순전히 이강천을 신학교로 인도하려는 하나님의 또 다른 계획이셨다.(연재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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