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개혁주의 미학의 선구자, 한스 로크마커의 서양 교회사와 예술

송광택 목사, 한국교회독서문화연구회(www.bookleader.org) 대표, 한국기독교작가협회 고문, 바울의교회 글향기도서관 담당목사
송광택 목사, 한국교회독서문화연구회(www.bookleader.org) 대표, 한국기독교작가협회 고문, 바울의교회 글향기도서관 담당목사

. 로크마커(H. R. Rookmaaker) / 번역 송광택

편집자 주한스 로크마커 : 네덜란드의 인도네시아 식민지 지사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미션스쿨 고등학교에서 기독교를 접한 후 나치 치하의 고국에서 지하운동에 관여하다 투옥되면서 성경을 읽고 복음을 영접 했다. 1952년 암스테르담의 시립대학을 졸업하고, 1959년에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라이덴대학을 거쳐 자유대학교에서 미술사를 강의했으며, 재즈에도 조예가 깊어 비평가로 활동하면서, 네덜란드 국립 라디오의 편성위원회와 영화 이사회, 라브리 공동체 등에서 활동했다. 지은책에 <현대 예술과 문화의 죽음>, <예술과 그리스도인의 생활> 등이 있다.

1400년과 1500년 사이의 한 세기는 중세기의 끝을 의미하였고 새 시대의 시작을 뜻하였다. 예술에 있어서 이러한 변천으로 인하여 수반된 긴장감이 1500년경 하이 르네상스(High Renaissance)의 새로운 접근 방식 안에서 - 특히 이탈리아에서 해소되었다.

 

지위가 올라간 예술

하이 르네상스의 로마 카톨릭 예술 중 가장 위대한 것들은 로마 바티칸 궁전의 라파엘(Raphael) 과 미켈란젤로(Michelangelo) 의 대작들이며 무엇보다도 성 베드로 성당의 작품이 유명하다. 브라만테 (Bramante)와 미켈란젤로 (둥근 천장에 작품을 만든 인물)는 함께 분담하여 일했다.

16세기 후반기에는 영적인 갱신에 뒤따라 델라 포르타(Della Porta)와 마데르나(Maderna)가 베드로 성당의 정면을 완성하였다.

St Peter's Basilica Dome
St Peter's Basilica Dome

베니스에서도 비슷한 하이 르네상스 운동이 일어났다. 16세기 후반기에 티티안(Titian)과 틴토레도(Tintoretto) 가 함께 활약하였다. 도레토의 예술품은 카톨릭의 경건을 강력하게 표현하였다.

카톨릭이 종교개혁의 충격으로부터 점차 벗어나고 반종교개혁을 통해 새 힘을 얻게 되자 점차 새로운 예술품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러한 것들은 하이 르네상스의 작품 특히 라파엘과 베니스 예술가들의 작품 중에서 발견된다. 새로운 스타일로 표현된 최초의 작품은 게수”(Gesu) 였는데 이는 로마에 있는 예수회의 모교회이다. 이 건물은 1568년 비그라(Vignola)에 의해 시작되었고 다음 세대에 세워진 많은 교회들은 그 교회의 양식을 따랐다. 볼로냐의 예술가들 특히 1600년경에 일한 카라키스(Caraccis)와 카라바기오(Caravaggio)는 우리가 바로크(baroque) 양식이라고 알고 있는 새 양식을 창조해 냈다.

 

종교개혁 정신

한편 독일의 경우 알브레히트 뒤러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강력한 영향을 받은, 초기 독일과 플랑드르 예술 중 가장 좋은 요소를 합친 새로운 양식의 방향을 강조하였다. 그의 예술은 종교개혁의 정신을 풍기고 있었다. 이러한 정신은 일찍이 1498년에 이미 요한계시록을 묘사해 그린 그의 유명한 목판화 작품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루터가 그를 위해 기반을 세웠고 뒤러는 그의 뒤를 따랐다.

뒤러의 예술은 모든 면에 있어서 강력하게 사실적인 묘사를 해주고 있다. 조각과 목판화에 있어서 그를 능가할 자가 없다. 그는 또한 훌륭한 제도가였으며 좋은 화가였다. 그처럼 폭 넓은 주제를 다룬 예술가도 없을 것이다. 그는 단순한 동식들로부터 인물 소요, 초상화, 전등(정확한 원법에 의한), 성경이나 고대 이야기, 심지어는 환상적인 장면이나 꿈같은 것도 그렸다. 비록 크라나하 (Cranach)와 홀베인(Holbein)이 루터교도였지만 다음 세기의 다른 몇 명의 유명한 예술가들은 그 전통을 이어받고 있었다. 독일에서는 신교 정신이 주로 음악으로 표현되었다.

남부 네덜란드 출신의 칼빈주의 망명자들은 16세기 후반에 네덜란드에 정착했다. 얼마 후 그곳에서 성경적이고 칼빈주의적인 것에 뿌리를 내린 새로운 예술이 생겨났다. 많은 교회가 이러한 전통에 의해 세워졌으며(예를 들면, 헨드릭 드 카이서(Hendrick de Keyser)에 의해 암스텔담에 세워진 교회) 많은 옛 교회들이 새로운 장식을 하였다.

 

사실주의적 경향

그러나 신교는 그림으로 궁극적인 표현을 하였다. 네덜란드에서 1600년경 몇 번의 시도를 경험한 후 새로운 예술이 발생하였다. 그것은 남부 유럽에서 유행했던 바로크 양식과는 아주 달랐다. 주로 네덜란드 화가들이 할렘(Harlem), 암스텔담, 델프트(Delft), 도르트에 근거를 두었다. 그들 중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거장들이 있었다. 프란스 할스(Frans Hals, 초상화), 솔로몬과 샤콥 반 루이스댈(Solomon and Jacob van Ruysdael), 잔 반 고이엔 (Jan van oyen, 풍경화), 헤다(Heda) 와 피터 클라에즈(Peter Claesz, 정물화), 브라우어(Brouwer) 와 반 오스타데 (van Ostade, 풍속화), 게라드 도우(Gerard Dou, 실내화), 시몬 드 블리거(Simon de Vlieger, 바다 풍경), 델프트파에 속하는 베르미어(Vermeer), 피에터 드 후그 (Pieter de Hoogh)와 렘브란트(성경적, 역사적 주제를 다룬 그림, 초상화 그리고 동판화) 등이다. 렘브란트는 성경적 주제를 많이 다룬 예외적 인물이었다.

“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 (Remrandt van Rijn 1606-1669) 램브란트 돌아온 탕자
“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 (Remrandt van Rijn 1606-1669) 램브란트 돌아온 탕자

네덜란드의 화가들은 일상의 삶을 다양하게 사실적으로 그리는 데 중점을 두었다. 역사적 성경적 주제의 그림은 드물고 그들이 가장 특징적으로 주제를 삼았던 것은 일상생활이다. 즉 집, 들에서의 생활, 선술집의 모습, 풍경, 바다 그림, 정물화 등이다. 네덜란드의 화가들은 사실적인 묘사에 깊은 관심을 두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자연주의가 아니었다. 비록 그들이 상징과 다른 종류의 시각적인 은유들을 사용하긴 했지만 신중한 구성을 이용했고 그들의 작품 가운데 설교와 같은 메시지를 담았다. 그들은 작품 속에서 도덕적인 것들을 다루었다. 즉 모든 것의 허무함, 전적으로 우주적이고 인간적 의미를 지닌 구속, 삶의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 피조된 세계의 아름다움 등이다. 그들의 예술품에는 성경과 상식의 지혜가 들어 있었다.

 

바로크 예술의 대가

1600년 이후에 두 명의 천재적인 예술가가 나타나 반종교개혁 성격의 가톨릭의 바로크 양식을 보여 주었다. 그 중 한 사람은 루벤스(Rubens)로 그는 주로 앤트워프(Antwerp)에서 활동하였으며 가끔 이탈리아, 잉글랜드, 프랑스, 스페인에서도 활동하였다. 그가 그린 제단 뒤의 장식 그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제단 뒤의 그림은 성모 마리아와 성인들의 삶과 순교를 그렸다. 그는 또한 역사적 고전적 주제와 초상화, 풍경화를 그렸으며 무한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두 번째 인물은 조각가이며 건축가인 로렌조 베르니니 (Lorenzo Bernini) 였다. 그는 로마에 있는 베드로 성당 앞 거대한 광장에 있는 상들뿐 아니라 내부의 중요한 상들도 조각하였다. 그 이후의 모든 바로크 조각가들도 역시 베르니니파라고 부를 수 있다. 로마의 또 다른 유명한 건축가 보로미니(Borromini)는 바로크식 교회의 내부와 외부에 곡면의 정면과 달걀 모양의 양식을 사용하였다.

바로크 양식은 반종교개혁의 예술로 인정되고 있다. 이 양식은 카톨릭의 부흥을 목표로 삼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사용되었다. 이 양식으로 지어진 교회들은 방문객들을 압도하였다. 방문객들에게 풍요로움과 능력을 과시하였고, 카톨릭이 주장한 교리가 가치 있고 중요하며 참되다는 점을 확신시키기 위해 그 양식을 사용하였다. 구원의 모든 방편들은 극적으로 표현되어야 했다. 그것은 성모 마리아, 성인들, 성물, 미사 광경, 성찬식 등을 표현했다. 바로크 양식의 교회는 많은 상징물들을 보여 주었다. 어떤 표현은 구원자인 그리스도를 나타냈다. 십자가상에서의 그리스도의 고난은 종종 제단의 성찬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었다.

다른 상징물들은 삼위일체를 강조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 상징물들은 성모 마리아를 하늘로 승천한 마돈나, 하늘의 황후 혹은 원죄 없는 수태자로 승격시켰다. 다른 상들은 경건과 고행에 있어서 충성스러움의 모범이 되었던 성인들의 신비적인 열정을 표현하였다. 풍유적인 상이나 장면을 통해서 신학적 진리를 보다 더 일반적인 형태로 표현해주었고 인간과 자연의 실상과 가치를 보다 더 직접적으로 표현하였다. 반면에 궁전이나 세속 건물에서는 고전적인 주제를 다룸으로써 똑같은 진리와 가치관을 비유적이기는 하나 보다 더 인문주의적 방법으로 증거하였다.

바로크 예술은 르네상스의 양식 위에 세워졌으나 그 위에 명암의 효과가 첨가되었다. 이것은 초자연적 자연주의라고 불릴 수 있다. 거기에서는 인간이 열려진 세계 즉, 마리아와 성인들의 중재로 땅과 하늘 사이에 교제가 가능한 세계에 살고 있음을 강조했다.

유명한 예술가 피에트로 다 코르토나(Pietro da Cortona)17세기 중반에 로마에서 활동 했다. 그가 그린 천장은 소토 인 수”(sotto in su), 즉 밑에서 보이는 대로 초자연적 세계를 그리는 식의 환상적 예술의 궁극적인 발판을 마련하였다. (예를 들면 로마 예술가 중 팔라조 바르베리니(Palazzo Barberini) 와 키에사 누오바(Chiesa Nuova)가 포함된다), 코르토나의 뒤를 이은 포조(Pozzo)는 로마의 이그나티우스 성당의 천장을 그렸다. 포조는 17세기 말에 이러한 양식을 오스트리아에 전수시켰다.

Pietro Berrettini Pietro da Cortona - Cortona Mia
Pietro Berrettini Pietro da Cortona - Cortona Mia

반종교개혁의 또 다른 중심지는 스페인이었다. 그곳에도 유명한 예술가들이 있었다. 주르바란(Zurbaran), 리베라(Ribera), 무릴로(Murillo)는 모두 제단 뒤의 장식 그림과 종교 예술에서 뛰어났고, 벨라스퀘즈(Velasquez)는 초상화가였다. 그리나 스페인인의 타오르는 경건성이 가장 특징적으로 표현된 것은 건축물이었다. 그곳의 건축물은 로마 건축물을 기초로 하여 세부적인 조각과 장식을 풍부하게 이용하여 놀랄 만큼 발전된 모양을 보여 주었다. 이러한 양식은 중남미를 포함하여 널리 스페인어를 말하는 지역으로 확산되어 갔다.

18세기에 이탈리아에서는 바로크 예술의 중심지가 급속도로 북부로 옮겨졌다. 유명한 티폴로는 바로크식 제단 뒤의 장식, 제단 위의 장식, 궁전내의 프레스코 벽화, 서정적인 면을 능숙하게 표현한 뛰어난 천장을 그렸다. 그의 스타일은 자연적이면서도 이상주의적이었다.

 

바바리아의 바로크 예술

바로크 양식의 반종교개혁 예술이 마지막으로 가장 번성했던 지역은 오스트리아와 남부 독일이었다. 건축가 피쳐 폰 에르라하(Fischer Erlach)18세기 초반에 비엔나와 잘즈부르그에서 활동하였다. 그와 그의 추종자들은 18세기 오스트리아의 중요한 건축물을 건축하였는데 그 양식은 오늘날까지도 비엔나와 다른 오스트리아 시들의 외관을 장식해주고 있다.

바바리아에서 1720년경에 아삼(Asam) 형제가 이러한 건축 양식을 그들의 벨텐부르그 (Weltenburg) 교회내에 널리 보급시켰고, 1750년경에는 발타사 뉴만(Balthasar Neumann)이 비에르젠하일리겐(Vierzehnheiligen)에 보급시켰다. 피처(J. M. Fischer)도 많은 교회와 수도원을 건축했는데 가장 유명한 것은 오토보이렌(Ottobeuren)에 있다. 비이스(Wies)에 있는 교회(1750년경)는 돔 김메르만(Dom Zimmermann)에 의해서 설계되었는데 이 놀랄만한 바로크 후기의 예술품(혹은 종교적인 로코코 예술) 중 가장 뛰어난 실례로 간주되고 있다.

이러한 예술은 매우 정교한 작품이다. 상은 매우 복잡하고 세밀한 부분까지도 정교하게 설계되었다. 한 신학자가 교회를 장식해 보고자 했다. 그러나 바로크 양식 또한 대중적이고 극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어서 미사에 도움을 주었다.

바로크 양식의 교회는 전체적으로 하나의 풍요롭고 즐거움을 주는 건축물이다. 제단, 그림, 조각, 가구, 오르간, 치장 벽토, 그리고 다른 장식들이 모두 다 그들 나름대로의 장식과 부드럽기는 하나 장엄한 듯한 색채를 가지고 교회 내부를 꾸며 준다. 거기에는 빛과 어두움이 엿보이며 양식과 내용에 있어서 통일성을 이룬다.

모짜르트의 음악이 오르간과 오케스트라 합창대에 의해서 울려 퍼지고 종교 축제를 위해 성직자와 평신도가 그 교회를 채우게 되면 전교회는 실제로 생기를 얻게 된다. 이러한 교회들을 장식했던 많은 예술가들의 이름의 상당수가 익명인 채로 남아 있다. 그들의 예술품은 전체 중의 부분을 이루었고 그것은 서로 각각의 작품에 의존하였다.

이 교회들이 세워지고 있는 동안 유럽의 절대 군주를 위한 장엄한 궁전들도 건축되었다. 제후나 주교 그리고 수도원장들도 모두 그들의 궁을 세웠다. 베르사이유 궁이 모델이 되었다. 그들은 교회와 비슷한 양식으로 그들의 궁을 설계하고 장식하였다. 예를 들면 뷔르즈부르그(Wirzburg)에 있는 레지덴즈”(Residenz)를 들 수 있다. 이 건축물은 1720년 발타사 뉴만에 의해 시작되어 1750년 티폴로에 의해 천장화가 완성되었다.

Würzburg - Residenz | View at the top of the main staircase. ,from. Flickr
Würzburg - Residenz | View at the top of the main staircase. ,from. Flickr

한 시대의 소멸

고양된 경건과 위엄을 지닌 반종교개혁도 궁극적으로 이러한 바로크식 교회를 통해 표현되었다. 그러나 그 교회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종종 제단 위나 아래에 그려진 성인의 시신을 보게 된다. 죽음이 중심부에 있는 것 같다. 전체적인 모습을 통해 우리에게 분명히 다가올 죽음을 재확인시켜 주는 것 같다. 이러한 제단(shrine)들은 성자와 그들의 유품이 지닌 마술적이고 부적 같은 역할 때문에 미신적 경향을 종종 띠게 된다. 그리스도보다는 그 형식(풍요와 권세의 교회당) 이 중심을 이룬다.

거기에는 종종 빛과 아름다움의 느낌이 있긴 하지만 동시에 천박한 느낌도 있다. 18세기 바로크 예술에서는 내면의 정신은 사라시고 보다 세속적인 면이 강조되었다. 아름다운 형태가 정면을 꾸미게 되었다. 이것은 바로 바로크 예술이 갑작스럽게 끝나게 된 까닭을 설명해 준다. 1780년경 그 거대한 건축물들이 막 완성되었을 때 그 전통은 중단되었다. 이러한 양식으로는 더 이상 어느 것도 시도되지 않았다. 이성주의적이며 거의 세속적인 표현을 한 신고전주의가 시작되었다. 이성의 시대와 계몽주의가 싸움에서 이겼다. 곧 혁명적인 전쟁들이 일이나 수도원을 제압하고 교회의 문을 닫게 만들었다. 로마 가톨릭은 그 권세를 잃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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