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산동네 마을
스위스 산동네 마을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태복음28: 18-20)“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죄와 사망의 권세>아래 살아가는 인류에게 <구원(救援)의 기쁜 소식>을 전해주시고, 이 <구원의 성취>를 위해 십자가의 <대속(代贖)의 죽음>으로 인류의 <죄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과 십자가의 <대속의 죽음>은, 사랑의 하나님께서 죄와 사망의 권세아래 살아가는 인류에게 주시는 가장 위대한 <사랑의 선물>입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和睦祭)>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요한1서 4:10)“

스위스산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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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서 부활(復活)하신 예수님게서는 <승천(昇天)>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엄히 명하셨습니다.

(1) ‚너희는 가라!‘고 하셨습니다.

흩어져 세상에 나가 복음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2)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하셨습니다.

복음으로 죽어가는 영혼을 살리라는 것입니다.

(3) ‚세례를 주라!‘고 하셨습니다. <믿음>으로 <신앙고백>을 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4)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말씀>으로 <양육(養育)>하라는 것입니다.

성자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을 통해 <지상교회(地上敎會)>에 주신 이 <지상명령(至上命令)>은 바로 <신약교회>가 주님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감당해 나가야 할 <선교적 사명>입니다.

주님은 이 <선교적 사명>을 위해 <신약교회>에 <성령의 능력>을 주셨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사도행전 1:8)“

스위스 산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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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기에 성령으로 거듭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 사명을 함께 감당해 나가기 위해 전심으로 기도하며 온전히 주의 일에 헌신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하늘의 칭찬과 상급>은 항상 깨어 기도하며 충성하는 <헌신 자>들을 위한 것입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요한계시록 2:10)"

하지만 주의 일에 대한 <헌신>에는 <고난>이 따르고 <희생>이 따릅니다. 모든 <복음전도자>들의 <롤모델> 인 <사도바울>은 <복음전파>를 위해 참으로 많은 <고난>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고린도 후서11:23-27).

그러기에 그는 그의 <믿음의 아들>이요 젊은 <목회자>인 <디모데>에게 이렇게 가르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 그러므로 네가 우리 주의 증거와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디모데후서 1:7-8)"


<헌신자>들에게 필요한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기도의 수고>입니다.

<헌신자>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능력으로 일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은 능히 다 하실 수 있느니라! (마가복음 10:27)“

<주님>은 세상에서 당신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많이 <기도>하셨고, <주님의 제자>들도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기 위해 <기도>에 전혀 힘썼습니다.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마가복음 9:27)“

둘째는 <희생>입니다.

<헌신>은 <희생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의 대속(代贖)의 죽음으로 우리의 구원(救援)을 이루어 주시고, 죽음에서의 부활(復活)로 모든 성도들을 위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어주셨습니다.

예루살렘 초대교회의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스데반 집사>의 <순교의 죽음>이 있었기에, <사도 바울>이 주님께 선택되어 위대한 <복음전도자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토록 보존하리라! (요한복음 12:24-25)“


하나님께서 어떻게 헌신 자들의 희생과 기도를 사용하시는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아주 오래 전, 아프리카 대륙의 사하라사막 이남에 아직 기독교가 존재하기 이전에 두 명의 젊은 선교 사들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 밀림을 헤치며 내륙 깊숙이 들어갔습니다. 그들이 가려던 곳이 지금의 <나이지리아>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가는 도중에 <풍토병>으로 죽고 말았습니다. 그들의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죽은 것입니다.

그 후 어떻게 되었습니까? <나이지리아>는 지금 아프리카 최대의 <기독교 국가>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게 하신 것입니다.

1889년 10월 2일 호주 선교사 <조셉 헨리 데이비스(Joseph Henry Davies)>와 그의 누이 <메리 데이비스(Mary Davies)가 부산항에 입항 했습니다. <시드니>에서 출발해서 40일이나 걸린 긴 항해였습니다. 그들은 <서울>에서 몇 달간의 적응기간을 거친 다음에, 그들에게 할당 된 사역 지인 <부산>으로 향했습니다. 아직 교통기관이 발달되지 않았던 시대인지라 좁은 샛길을 걷거나 말을 타고서 여행을 했습니다.

그런데 몸이 약했던 <데이비스 선교사>는 쌀쌀한 날씨임에도 무리를 해가면서 서둘러 목적지로 향하다가 도중에 풍토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천연두>와 <급성폐렴>까지 겹쳐 그는 결국 부산 인근에 이르러 쓰러져 죽고 말았습니다.

1890년 4월 5일 <데이비스 선교사>는 33세의 젊은 나이로 한국땅을 밟은 지 183일 만에 이렇게 하나 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가 그토록 꿈꾸고 갈망했던 선교사역에 착수도 못해보고 말입니다.

그의 누이 <메리 데이비스> 선교사는 그렇게 허망하게 오빠를 떠나 보낸 후, 부산의 바닷가에 나가 고향이 있는 호주 쪽을 바라보며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 드렸습니다.

 


" 하나님, 그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하소서!

이 지역에 부흥의 불길이 일어나게 하소서!"


그 후 어떻게 되었습니까? 복음의 불모지인 <부산>에 <고려신학교>가 세워졌고, 한국교회가 신학적으로, 교리적으로 혼란을 겪을 때 <고려신학교>는 한국교회의 <복음신학의 보루(堡壘)가 되었습니다. 그런 연유로 지금도 부산과 경남지역은 <고신 파 교회>가 강세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데이비스 선교사> 남매의 <희생>이 있었기에 하나님께서는 그 지역에서 이 같은 크고 놀라운 역사를 이루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온 개신교 최초의 선교사이며 순교자는 <저메인 토마스 목사(Robert Jermain Thomas: 1840-1866)>입니다. 1840년 9월 7일 영국 웨일즈의 <회중교회>의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토마스 목사>는 <런던 뉴 칼리지 대학(University New College London)>에서 <신학>을 공부한 후 1863년 6월 4일24세의 나이에 고향 <하노버 교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습니다. 그는 목회보다는 <선교>를 선택했고, <런던선교회>는 그를 <중국>으로 파송했습니다.

그는 그의 아내 <캐롤라인(Caroline)>과 함께 <중국선교사>로 파송되어 그 해 8월에 <상해>에 도착했습니다. 그는 <상해>에 도착한지 얼마 되지 않아 동료들과 함께 타 지역으로 선교여행을 떠나게 되었는데, 그가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보니, 임신초기의 심한 입덧과 긴 항해 중의 뱃멀미로 몸이 많이 쇠약 해진 그의 아내 <캐롤라인>이 혼자 유산을 한 채 피를 많이 쏟고 죽어있는 것이었습니다.

슬픔과 고통과 좌절, 아내 홀로 죽게 했다는 죄책감에 방황하며 갈피를 잡지 못하든 그는 선교회 책임 자와의 갈등까지 겹치자,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산동 성>으로 가서 <세관통역> 일을 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대원군>의 <천주교박해>를 피해 그곳에 온 <조선인 신자>들을 만나 교류하면서 다시금 선교 에 대한 열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는 조선인 신자들과의 교류를 통해 그들이 기독교에 관해서 아는 것이라고는 단지 십자가와 염주뿐인 것을 보고서, 조선으로 건너가 조선 사람들에게 성경을 전해주고, 그들에게 개신교신앙을 전하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제너널 셔먼호
제너널 셔먼호

그렇게 해서 그는 마침내 1866년 8월 조선인들에게 나눠줄 <한문성경>을 많이 준비해 <조선>으로 향하는 미국상선 <제너널 셔먼호(General Sherman)>에 승선했습니다. 하지만 이 배는 <대동강>으로 들어 서면서 조선 군들과의 전투에 휘말리게 되었습니다.

배의 선장이 조선에 통상을 요구하며 총과 포를 쏘는 무력시위를 했기 때문입니다.배가 <양각도> 모래톱에 좌초되자 조선 군들은 화공(火攻)으로 배에 불을 붙였습니다. 배에 불길이 크게 퍼지자 배에 탄 사람들은 배에서 탈출해 육지로 나왔습니다.

<토마스 목사>도 가져 간 <한문성경>을 챙겨서 함께 육지로 나왔습니다. 하지만 격분한 조선의 군사들은 배에서 탈출한 사람들을 닥치는 데로 칼로 베었습니다. 그 경황 중에도 <토마스 목사>는 구경꾼들과 군인들에게 닥치는 데로 성경을 건넷습니다.

그가 마지막으로 성경을 건낸 사람이 조선병사 <박춘권>인데, <토마스 목사>는 그의 칼을 맞고 죽었습니다. 1866년 9월 2일 <토마스 목사>는 이제 겨우 27세의 젊은 나이로 선교의 꿈도 이뤄보지 못한 채 이 렇게 이억 만리 이국 땅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그 후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날 강둑에서 구경하던 <최치량>이라는 소년은 <토마스 목사>가 강변 모래사장에 뿌린 한문성경 세 권을 주어 집으로 가져갔는데 그의 아버지의 말을 듣고 겁이나, 그 성경책들을 평양 성 관리 <박영식> 에게 갖다 주었습니다. <박영식>은 <토마스 목사>가 나누어준 성경책을 수거해 폐기처분 하도록 명을 받은 사람입니다.

<박영식>은 이렇게 수거해 모아 논 성경들을 폐기 처분하지 않고 보관해두었다가, 그의 집을 새로 지으면서 그가 수거한 성경책을 뜯어 벽을 도배했습니다. 그는 밤낮 벽에 도배된 성경을 읽다가 결국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 후 성장하여 사업에 성공한 <최치량>이 이 집을 인수하여 <여관(旅館)>으로 사용했습니다.

<토마스 목사>가 순교 당한지 27년이 지난 1893년, 미국인 선교사 <마포 삼열 목사(Samuel Moffett, 186 4-1939)> 일행이 우연히 이 여관을 찾았다가 벽이 온통 성경으로 도배된 것을 보게 되었고, 그 내력을 알게 된 <마포 삼열 목사>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믿고, 이곳에서 방하나를 세로 얻어 예배를 인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평양 최초의 교회 <널다리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이 <널 다리 교회>가 성장하여 나중에 <평양 장대현 교회>가 되었습니다.

<널다리 교회>가 세워진 얼마 후 대동 강 변 쑥 섬 모래사장에서 <토마스 목사>를 참수했던 <박춘권>이 찾아와 울며 자신의 죄를 자복했습니다. <널다리 교회>는 시작한지 삼 개월 만에 7명의 <세례교인>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들 중 <토마스 목사>의 <순교현장>에 있었던 <최치랑>과 <박춘권>은 <평양 장대현 교회>의 최초의 <장로>가 되었고, <박춘권>은 나중에 <안주교회> 의 영수(嶺袖)가 되어 여생을 기독교사업에 헌신했습니다.

평양신학교
평양신학교

<마포 삼열 목사>는 교인들이 늘어나고 교세가 급속히 확장됨에 따라 조선인 목사들을 양성하기 위해 <평양신학교>를 설립(1904년)했습니다. 한국 최초의 신학교입니다. 이 신학교를 통해 배출된 최초의 조선인 목사 칠인 중 한 사람인 <이기풍 목사>는 <제주도>에 <선교사>로 파송되었습니다.

길선주목사. 길목사님이 목회했던 장대현교회
길선주목사. 길목사님이 목회했던 장대현교회

한국 교회가 자체적으로 파송한 최초의 선교사였습니다. 그는 예수 믿기 전 깡패 짓을 하며 사람들을 많이 괴롭혔는데, 길을 가는 <마포 삼열 목사>에게 돌을 던져 쓰러뜨리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길선주 목사>는 1907년장대현교회에서 한 달이 넘도록 계속된 집회를 통하여 수 천 명의 신자들이 성령세례를 체험하게 했습니다.

<길선주 목사>는 그 여세를 몰아 이어 서울과 경기도 지방에서도 부흥집회를 인도하며 <성신도리(聖神道理)>를 강론했고, 이를 통해 역시 많은 사람들 이 중생(重生)의 은혜를 체험을 하게했습니다.

1907년 <평양 장대현 교회>가 중심이 된 <대 부흥운동>의 결과 1907년 9월17일 <평양 장대현 교회> 에서 한국최초의 <독립노회(獨立老會)>가 조직되었을 때에 노회의 규모는 선교사들을 포함 목사의 수가 49명이었고, 조사(助事)가 160명, 장로가 47명, 교인총수72968명, 그리고 지 교회(支敎會)는 785 개나 되었습니다.

길선주목사 부흥집회
길선주목사 부흥집회

평양에서 시작해 전국으로 확산된 1907년의 대 부흥운동 때문에 <평양>은 그 후 <동양의 예루살렘>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1933년 9월 13일 <토마스 목사>가 순교 당했던 대동강 쑥 섬에 <토마스 기념교회당>이 준공 되었는데 이 교회당은 육이오전쟁 때 폭격으로 파괴되었습니다. 그 후 오랜 세월이 지난 후 북한 정부는 한국교회가 선교를 목적으로 연변에 설립하여 운영하는 <연변 과기대>가 훌륭한 성과를 내자, 북한 당국은 이 같은 학교를 평양에도 세워주도록 요청했습니다. 그때 학교부지로 내 준 땅이 바로 <토마스 목사>가 순교했고, <토마스 기념교회당>이 세워졌던 바로 그 장소였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입니까? 젊은< 토마스 목사>의 희생이 가져다 준 준 놀라운 결과였습니다. 이렇게 젊은 <토마스 목사>의 순교의 죽음은 한국개신교의 위대한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비슷한 한 예가 <종교개혁>의 고장 <스위스>에 있었습니다.


주후 6세기에 <아일랜드>의 선교사 <베아투스(St. Beatus)> 가 <스위스>로 파송이 되었습니다.

그는 스위스 내륙지방 <툰(Thun)>에 정착하여 <툰>을 비롯해서 산동네 <베아텐부르그 (Beatenburg)> 와 호숫가 동네인 <인터라켄(Interlaken)>등 인접지역을 순회하며 <전도할동>을 했습니다. 그는 툰 호수가 산중턱에 있는 <동굴입구>에 거처를 마련했는데, 이 동굴 속에 용이 살고 있다는 소문 때문에 부락사람들은 아예 근접도 안 하는 그런 장소였습니다. 그가 이곳에서 아무 탈없이 지내자 사람들은 그가 그 무서운 용을 쫓아내고 그 자리를 차지했다고 했습니다. 그는 이곳에서 전도활동을 하다가 생을 마쳤고, 죽어서는 그가 거처하던 <동굴입구>에 묻혔습니다.

그는 사 후 성자(聖子-Saint)라는 칭호를 받았고, 그의 활동무대였던 이 지역은 순례자들 (Pilger) 과 수도사(Mönch)들이 찾아와 기도하고 가는 성지(聖地)가 되었습니다. 1130년에 수도사 <프라이헤른 셀리거(Freiherrn Seliger)>가 인터라켄 <마트(Matt)>에 순례자들을 위한 <기도의 집(Bethaus)>을 세웠는데, 이를 근거지로 해서 30 여명의 <어거스틴 파> 수도사들과 사제 들이 <인터라켄 수도원(Das Kloster Interlaken)을 개설했습니다. <황제 로타르 3세(Kaiser Lothar. 3)>와 부유한 상인들이 수도원에 <재정지원>을 해줌으로써 인터라켄 부락전체가 하나의 <수도원>으로 확장이 되었습니다.

규모가 커진 <인터라켄수도원>은1224년부터 인접 해 있는 자치도시인 <베른(Bern)>의 보호를 받게 되었습니다. <인터라켄 수도원>은 남녀수도원으로 구분되었는데 1484년 <여자수도원>에 <풍기문란 사건>이 발생하자 수도원당국은 아예 여자수도원을 폐쇄해버렸습니다. 그만큼 수도원의 규율이 엄격했습니다. 그들은 새벽 3시 반에 기상해서 저녁 8시 반까지 2시간 반 간격으로 기도와 찬양과 말씀 묵상을 되풀이 했습니다. 그들은 넓은 토지와 많은 재산을 지니고 있었지만 정식 식사시간은 하루 한번 오후 2 시 이전이었습니다. 그만큼 <수도사>들에게 철저한 <금욕생활>을 시킨 것입니다.

<인터라켄 수도원>은 1524년에 정식으로 <베른 주(Kanton Bern)>에 편입이 되는데, <인터라켄 수도원> 의 영향으로 베른 지역의 주민들은 스위스의 그 어느 지역보다 영적으로 깨어있었고, 그래서 그 어느 지역보다 먼저 <종교개혁>을 수용하는 지역이 되었습니다. <인터라켄 수도원>이 세워진 지 정확히 사백 년 되던 해인 1531년 10월 31일 <취리히>의 종교개혁자 <쯔빙글리>가 <종교개혁>에 반대하는 <카톨릭 군대>와의 전투에서 <순교>를 당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당신의 나라를 구현하고 확장시키기 위한 <소중한 계획>들을 가지고 계시는데, 하나님께서는 이 계획의 성취를 위해 먼저 당신의 백성들로 하여금 많은 <기도의 수고>를 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과 <가나안정복>을 위해 먼저 애굽의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사백 년간 부르짖어 기도하게 하셨습니다(창세기 15:13).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스위스교회를 종교개혁의 가장 소중한 도구로 사용하시기 위해 먼저 <인터라 켄 수도원>으로 하여금 사백 년간 이라는 긴 세월 동안 <기도의 수고>를 하게 하셨습니다.

쯔빙글리
쯔빙글리

스위스의 종교개혁자 <울리히 쯔빙글리(Ulich Zwingli, 1484-1531)>는 <취리히>에서 자동차로 한 시간 거리인 <쌍트 갈렌(St.Gallen)> 지역의 <빌트하우스(Bildhaus)>라는 동네에서 태어났습니다. <쯔빙글리>는 1506년 < 카톨릭의 사제>로 서품을 받고 <글라루스(Glarus)>의 사목으로 부임했습니다.

하지만 <군종사제>의 자격으로 두 차례 이태리의 전쟁에 참여하면서 전쟁의 비인간성을 목격한 그는 강론(講論)을 통해 스위스의 <용병제도>를 비판했고, 그와 함께 <카톨릭교회>의 <연옥 설>과 <면죄부판매> 등 카톨릭교회의 비성경적인 교리들과 불합리한 제도들을 비판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때문에 그는 사역지 <글라루스>에서 쫓겨났지만 인접해있는 <취리히(Zürich)시>는 이 같은 개혁성향의 <쯔빙글리>를 받아들였습니다.

쯔빙글리 짐
쯔빙글리 짐

1518년 12월 27일 <취리히 시>의 정식 사제로 취임한 <쯔빙글리>는 <시 의회>로부터 전권을 위임 받아 본격적으로 <종교개혁>에 착수했는데, 그의 종교개혁사상은 빠른 속도로 스위스전역으로 확산되었습니다. 하지만 <바티칸>과 밀착되어있던 스위스 중앙의 <산림자치주(山林自治州)>들인 <루체른, 우리, 슈비츠, 운더발덴, 축(Luzern, Uri, Schwyz, Underwalden, Zug)>은 바티칸과 동맹을 맺고 군대를 동원하여 쯔빙글리의 종교개혁을 무력으로 무산시키려고 했습니다. 두 차례의 전투가 있었는데 첫 전투는 취리히의 승리였습니다.

이 전투 후 곧 휴전이 되었는데, 그때까지 이들 지역에 주요 생필품을 공급 해왔던 <취리히>가 이들 <산림자치 주>에 대한 <생필품 공급>을 중단해버렸습니다. 그러자 생존에 위협을 느낀 산림 주 들은 8000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취리히>를 <기습 공격>했습니다.

1531년10월 31일 양측은 취리히(Zürich)와 축(Zug)의 접경지역인 <카펠(Kappel)>에서 교전하게 되었는데, <쯔빙글리>가 이끄는 1500여명의 <취리히 방어 군>은 수적으로 열세인 가운데 이들 <카톨릭 동맹 군>에게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이날 전투로 취리히 방어 군 쪽에서는 <쯔빙글리>를 위시해서 개신교 목사 25명, 의회의원 26명이 목숨을 잃었고, 가톨릭동맹 군은 <쯔빙글리>의 시체를 조각 내어 불태워 그 재를 공중에 뿌리며 승리를 자축했습니다. 이 전투 후 양측은 상호간에 종교적 선택의 자유를 존중하기로 하고 다시 휴전에 들어갔습니다.

<쯔빙글리>는 그의 개혁을 마무리하지 못한 채 인생의 황금기인 47세의 나이에 숨졌고, 그의 죽음으로 그가 벌여 놓은 많은 일들과 사업의 마무리는 후배인 <요한 칼빈>에게 넘겨졌습니다. 이런 면에서 <요한 칼빈>은 가장 적절한 그의 후계 자였고, <종교개혁의 완성 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요한 칼빈
요한 칼빈

5년후인 1536년 9월 5일 프랑스의 젊은 종교개혁자 <요한 칼빈(Jean Calvin, 1509.7.10 -156 4.5.27)>은 <제네바>의 <파렐 기욤 목사(Farel Guillsume, 1489-1565)>의 간곡한 권유를 받아들여 <제네바>의 <성 피에르 교회> 에서 <성경교사>의 일을 시작했는데, <제네바시의회>는 그러한 그를 <피에르 교회당>의 <정식 목사>로 임명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독일의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1.10-1546.2.18)>와 스위스의 <쯔빙글리>에 의해서 시작된 <유럽의 종교개혁>은 <요한 칼빈>에 의해서 계승이 되고 <완성>이 되었습니다.

<칼빈>이 고안한 <장로교회>의 <정치와 제도>들은 스위스의 <풀 뿌리 민주주의>제도에서 도입된 것으로, 이 교회 정치와 제도들은 <청교도>들에 의해서 아메리카 신대륙으로 전해졌고,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한 후 제정된 <미국의 헌법>이나 <민주주의 선거제도>는, 바로 이 <요한 칼빈>의 <교회법>과 <교회 정치제도>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칼빈과 종교개혁자 3분
칼빈과 종교개혁자 3분

또 <요한 칼빈>은 <제네바 대학>의 전신인 <제네바 아카데미>를 설립하여 후진양성을 위해 힘썼는데 이 학교에는 유럽각지로부터 모여든 1500명의 학생들이 <칼빈>의 <신학과 교리 학>을 공부했습니다.

당시 <제네바> 의 인구가 채 만 명도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실로 엄청난 규모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교육을 마친 이들은 그들의 고국으로 돌아가 칼빈의 개혁신앙과 신학을 보급하는데 앞장섰습니다.

오늘날 <장로교 제도>를 따르는 모든 교회들은 교파의 명칭과는 상관없이 그 뿌리를 <칼빈>의 <신앙과 신학>, <칼빈>의 <교회정치와 제도>에 두고 있습니다.

툰 호숫가
툰 호숫가

이모든 위대한 역사는 그 옛날 스위스 <툰 호숫가>의 한 <동굴입구>에서 원시인처럼 생활하며 복음을 전했든 <아일란드>의 선교사 <성 베아투스>의 <복음에 대한 헌신>과 <희생적 수고>로부터 시작되었고, 그 뒤를 이은 <인터라켄 수도원>의 수도사들의 사백 년 세월의 간구와 부르짖음의 결과로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당신의 일을 계승해 나갈 종들을 찾고 계십니다. 그게 누구이겠습니까?

(1) 주의 일을 위해 기꺼이 희생할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마태복음 10:29-30)“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 나 담대 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요한복음 16:33)“

(2)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 위에서도 이루어지기를 소원하며 밤낮 부르짖고 간구하는 종들입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마태복음 6:10)“ <아멘! >


스위스산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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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1) https://en.wikipedia.org/wiki/Robert_Jermain_Thomas -저메인 토마스 목사

(2) https://de.wikipedia.org/wiki/St._Beatus-H%C3%B6hlen... -베아투스 동굴

(3)https://www.tripadvisor.com/Attraction_Review-g1464940...-베아투스동굴 (4)https://de.wikipedia.org/wiki/Huldrych_Zwingli... -쯔빙글리 동상 제막식

(5)https://blog.daum.net/nan1004/15694781-요한칼빈 https://de.wikipedia.org/wiki/Huldrych_Zwingli -쯔빙글리

(6)https://de.wikipedia.org/wiki/Johannes_Calvin -요한 칼빈

(7)https://blog.daum.net/nan1004/15694781 -요한 칼빈

https://de.wikipedia.org/wiki/Thunersee 툰 호수

김정효목사,1983년 2월 스위스 사역시작, 취리히 중앙교회, 바젤한인교회, 인터라켄 쉼터교회 담임. 총신대학교신학 대학원졸업,  스위스한인교회 홈피 www.koreanchurch-swiss.com 
김정효목사,1983년 2월 스위스 사역시작, 취리히 중앙교회, 바젤한인교회, 인터라켄 쉼터교회 담임. 총신대학교신학 대학원졸업,  스위스한인교회 홈피 www.koreanchurch-swiss.com 

 

■스위스 산동네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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