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천일목사, 만나 사랑방 2022 4 10

"내 죽음이 한 알의 밀알 되게 하소서" 새종 -

:내 이 죽음이 한 알의 썩은 밀알이 되어 조선 교회를 구해 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 주기철 목사 -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생명을 내어주심으로 인류를 구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바로 한 알의 밀알이 되신 희생의 삶이셨습니다예수님 그리스도를 본받아 자신의 삶을 밀알로 드렸던 우리 신앙의 선조들로 인해 절대절명의 위기 속에서도 신앙을 지켜낼 수 있었습니다.

희생하는 어머니가 있기에 포근한 가정이 있고, 희생하는 성도가 있기에 부흥하는 교회가 있습니다. 누군가가 희생하기에 우리는 평안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알의 밀알이 되신 예수님처럼 자신을 밀알로 드릴 때 생명의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스케줄 없는 하루 송길원의 요즘생각 -


박한선 전문의(서울대 인류학과)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모두 지킬 수 없는 목표를 세우고, 목표를 이루지 못한다며 죄책감을 느끼며 살아간다. 원하는 것이 80이라면, 목표는 100으로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모두가 과도한 목표를 세우고, 그걸 달성하려고 허덕거린다.

원래부터 무리인 계획이니 패배감에 빠질 수밖에 없다. 모든 사람이 무리수를 두고 있으니, 아무리 뛰어도 제자리다. 자칫 한눈팔면 멀리 뒤처져 버린다. 그러니 이를 악물고 처음부터 무리였던 방학 일과표를 지키려고 기를 쓰는 것이다. 강박이 없으면 패배하는 세상이다. 시대적 강박이라고 할 만하다.”

방학이 끝날 무렵이면 거짓말 일기를 쓴다고 얼마나 많이 설쳤던가 말이다. 방학을 방학답게 보내지 못했던 시대가 떠올라 피식 웃는다. 그런데 나는 아직도 그 버릇에서 못 벗어나 아침이면 꼭 스케줄을 확인한다. 나는 박한선교수의 말에서 다시 위로를 찾는다. “원래 인간은 이렇게 살도록 설계되지 않았다. 선조들은 아주 자유로운 삶을 살았다. 가보지 못한 곳으로 사냥도 가고, 깊은 산속으로 열매도 따러 갔다. 가끔 그런 것이 아니라 매일매일 그랬다. 항상 예기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사나운 포식자를 만나기도 했겠지만, 운 좋게 달콤한 벌통을 발견하기도 했다. 삶은 늘 뜻밖의 해프닝으로 가득했다. 당장 늑대를 만나 짧은 생을 마칠 수도 있다. 하지만 우연히 멋진 이성을 만나 뜻밖의 사랑이 시작될 수도 있다.” 늑대(코로나)만 만나지 않는다면 스케줄 없는 하루, 도전 해볼만 하지 않을까?

 우선순위가 어느새 바뀌어 버렸다 새 종 -


- 양의섭 목사의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


기독교가 뭔가 자기 정체성을 잃어버렸다. 신용도 얼마 추락한 정도가 문제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진정 무엇인지 본질을 잃어버렸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우선순위가 어느새 우리에게 있어서 바뀌어 버렸다.

하나님은 우리의 주인이시다. 맞다물질은 그다음의 단계이다. 아니, 하나님 다음의 단계가 아니라 그다음은 인간이고, 그다음이 물질이다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우리는 , , 하다가 정말 돌아버리고 말았다돈이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는 지경으로까지 몰아갔다사람을 평할 때도 연봉으로 평하고, 몇 평짜리에서 사느냐얼마짜리 차를 타고 다니느냐,...

돈이 사람을 평가한다는데, 말이 되는가영적인 가치가 최우선인 교회에서도 돈이 있어야 장로 되고, 돈이 있어야 선교하고, 돈이 있어야 주의 일하고... 모든 것을 돈에다 걸어놓았습니다그러니 돈이 교회에서까지 주인 행세를 하게 된 것입니다.

한 통계에 의하면 성인의 경우, 하루의 약 60-70%를 돈과 관련된 생각으로 보낸다고 합니다. 돈은 단순한 우리 생활의 방편, 도구가 아니라 우리의 희망이요, 노래요, 산성이요, 피난처요, 찬양받을 존재로 추앙했다면 참된 그리스도인은 돈을 이 위치에서 끌어내려야 합니다돈이 신이요, 하나님이 아니라는 분명한 신앙고백이 있다면 말입니다.


백수(白壽)의 본뜻


나이를 일컫는 여러 가지 말 중에서 백수(白壽)처럼 잘못 쓰이고 있는 말도 드물 것이다. 흔히들 백수를 누렸다고 하면 1백 세까지 살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백수라는 글자를 자세히 보면 일백 백()을 쓴 것이 아니라 흰 백()을 쓴 것을 알게 된다.

흰 백()이란 글자가 일백 백에서 하나를 뺀, 모양인 것처럼 백수(白壽)100에서 하나가 모자라는 99세를 가리키는 말이다.


신앙의 기준 - 옥한흠 목사, (나를 사랑하느냐) -


존 번연의 작품 <천로역정> 가운데 무지라는 인물이 나옵니다.

무지(無知 아는 것이 없음), 즉 무식(無識 지식이나 판단력이 부족함)하다는 뜻입니다. 그는 천국을 향해 가고 있기는 하나 좁은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옆으로 난 오솔길을 통해 들어갔습니다.

이는 무슨 의미일까요? 성경의 진리를 깊이 있게 배우는 성경 공부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만사를 제쳐놓고 시간을 내어 에너지를 쏟아 성경을 공부해야 비로소 눈이 열리게 됩니다. 마치 좁은 길을 걷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런데 무지씨는 배우기를 싫어합니다. 그저 편하게 예수를 믿고 싶었기에 곁길로 들어온 사람입니다.

무지씨는 항상 나는 천국이 있는 것도 믿고, 예수님이 계시다는 것도 믿는데 동의한다고 자랑합니다. 하지만 무지씨의 이 믿음은 진짜가 아닙니다. 참믿음 안에서는 예수를 알고 싶어 하는 갈증이 생기는데, 그는 이 갈증이 없습니다. 하나님이계시고 천국이 있는 것은 마귀도 인정하는 바입니다. 그것을 아는 것은 대단하지 않습니다.

무지씨는 나는 내 마음과 신앙생활이 늘 일치 한다는 것을 확신한다고 자랑합니다. 그러자 크리스천이 그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지 묻습니다. ‘무지씨는 내 마음이 증명합니다라고 답합니다.

자신의 신앙생활을 평가하는 척도를 하나님의 말씀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준하지 않고 자기 마음에 맞추는 것입니다. 성경에 대해 잘 모르니, 모든 것을 자신의 기준대로 판단합니다. 그러나 이는 올바른 믿음의 태도가 아닙니다.

나의 마음을 지배하시는 성령님이 계시고 나의 이성을 지배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나의 인격 전체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 계십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예수님 앞에서 말씀으로 평가받아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무지씨는 잘못된 것입니다. 결국 무지씨는 천국 문 앞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에베소서 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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