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열심히 일합시다” “우리 후손에게 가난을 물려주지 맙시다.”

자녀들과 함께 남해 파독마을
자녀들과 함께 남해 파독마을

근현대사는 영욕의 역사이다. 조선은 나라를 빼앗기고, 36년간 식민지 통치를 받았다. 외교권도 국권도 인권도 자유도 평등도 종교선택권도 산업도 땅도 철저하게 일본의 병참기지에 불과했다. 남자들은 전쟁 총알바지로 탄광으로 끌려갔고, 처녀들은 일본인의 성노리개로 끌려가서 낯선땅에서 죽어갔다조선의 이름을 잃어버리고 일본식으로 이름을 개명당했고, 이땅에서 농사지은 모든 곡물을 수탈당했다일본 천황을 신으로 모셔야 했기에, 신사참배와 동방요배를 강요당했고, 예수님 믿는다고 교회문을 걸어 잠그고 불을 질러 태워죽이는 만행을 저질렀다.

해방의 기쁨도 채 누리기도 전에 6.25 전쟁으로 인해 동족끼리 총을 겨누고 죽이고 죽이는 피비린내는 싸움으로 인해 이 나라는 황폐해졌고, 일자리도 없고, 먹고 살 것도 없고, 거리에는 거지로 가득찼고, 미국의 원조없이는 굶어죽어가는 그런 시련의 세월을 보냈다.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가 대한민국이었다이것이 근 현대사에 우리 부모님이 겪은 고초이다.

남해에 가면 독일마을이 있다국가와 국민이 모두 가난했던 1960-70년대, 독일로 광부과 간호원으로 떠난 분들이 있다광부 7396, 간호사 11,057명이 사랑하는 가족을 두고 독일로 떠났다고국으로 돌아와 여생을 보내라는 취지에서 마을을 조성했다.

당시 한국의 국민소득은 고작 76달러에 불과했다. 너무 가난했던 시절이다. 시골은 초근목피로 연명했던 가난의 절망이 나라를 덮었던 시절이다. 미국의 원조도 이제 끝났다미국의 캐네디 대통령에게 원조 요청을 했지만 거절을 당했다수출을 하려고 해도 종잣돈이 없었던 대한민국이었다.

그 첫 번째 기회가 독일에 광부와 간호사를 보내는 것이었다당시 간호사와 광부는 독일 사람들이 기피하는 3D 업종이었다광부와 간호사 파견을 담보로 차관을 얻는데 성공했다차관 금액이 15000만 마르크, 한화로 450억이다.

이들은 최소한의 생계비를 제외하고 월급의 80% 이상을 고국으로 송금했다15년 동안 이들이 보내온 돈이 무려 1153만 달러(당시 수출액의 10%)였다고 한다.

1964년 박정희 대통령이 서독을 방문했다. 대통령은 준비해간 원고를 접어 버리고 눈물을 흘리며 같이 울었다.

우리 열심히 일합시다” “우리 후손에게 가난을 물려주지 맙시다.”

이들은 대통령에게 부강한 나라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고대통령은 아무 말도 못하고 그들의 등만 토닥여야했다고 한다.

이들이 고국으로 보낸 돈으로 한강의 기적을 이루었다.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하고 공장을 세웠다

꿈과 희망을 안고 독일 땅에 들어선 순간 그들에게는 참혹한 현실과 마주했다. 20살을 막 넘은 간호사들에게 주어진 업무는 시체를 닦는 일과 병원에서 요양원에서 노인들의 똥고 오줌을 닦아주는 고된 삶의 연속이었다.

광부들에게 주어진 현실은 40kg이 넘는 장비를 들고 지하 1200미터 들어가서 석탄을 캐내는 일이었다그런데 이들은 근면과 성실함으로 독일인들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전시관에 들어가면 파독 간호사와 광부들이 남긴 짧은 글 들을 모아 놓았다. 읽다보면 눈시울을 뜨거워진다.

-파독 간호사들의 글-

향수병에 걸려 눈물로 밤을 지새운 세월 어느새 환자는 내 부모처럼 느껴졌고... 이젠 그 인내의 시간이 열매가 되었다.”

낯선 땅 독일에서 서러움을 느낄 때면 마음속으로 항상 외쳤다. 그래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자 라고

어머니가 보고 싶어서 울다가도 어머니를 생각하며 힘을 냈어요

독일에서 30년을 살았는데도 한국이 그리웠다

나는 용감했기 때문에 독일로 갈 수 있었고, 지금도 용감하게 산다. 앞으로도 후회없이 용감하게 내 삶을 개척할 것이다

-광부들의 글-

지하 1000미터 아래서 배웠다. 끝나지 않는 어둠은 없다는 것을

우리는 독일인보다 작았지만 그들에게 모범이 될 만큼 열심히 일했다

떠나간 청춘! 돌아온 황혼!”

지금도 그때 받았던 봉급표를 간직하고 있다. 거기에 내 젊음이 있기 때문이다

독일 광산에 가면 매월 600마르크(당시 4만원)씩 준다는데 하루 두끼도 못 먹는 고향의 가족들이 배불리 먹을 수 있을 것 같아 망설이지 않고 독일로 가기로 결정하였다

이들이 우리의 아버지이고 어머니이다.  이 토대 위에 대한민국의 오늘을 이루었다. 그뿐이겠는가? 공장으로 중동으로 돈을 벌수만 있다면, 잘살수만 있다면, 가족들이 굶주림을 면할수만 있다면,자녀들을 공부를 시킬수만 있다면, 우리의 부모님은 허기진 배를 움켜잡고 하루 15시간 이상을 일하며 쪽잠을 자며 살아냈다. 이것이 우리의 부모님이다. 이들에 대해 고마움과 감사함을 잊지않는 것은 후대의 몫이다.

너무 물질에 질식해서 살아가는 현대인의 풍요로움은 어머니아버님들의 핏방울위에 세워진 유산이다. 지금 내가 잘 산다고 해서, 많은 것을 누리고 있다고 해서 단순히 그것이 내것으로만 착각하지 말자. 내것이 아니라 이 땅의 부모님이 물려준 헌신의 결과물이다.

무엇보다 남해에 독일마을을 잘 조성한 정부 당국의 배려에 고마움을 느꼈다. 고국에서 여생을 보내는 분들에게 주님의 위로와 평안을 빌었다. 역사의 살아 있는 흔적을 자녀들과 함께 걸으며 볼 수 있어서 참 좋았다. 

평일인데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이 독일마을을 찾았다. 독일마을은 서로 위로받고 위로하는 마을이 되었다. 옆을 돌아보는 그런 삶이 귀하다는 것을 새삼 다가온다.

 

[파독마을]

최원영목사, 본푸른교회, 본헤럴드대표
최원영목사, 본푸른교회, 본헤럴드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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