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승훈 목사의 인물연구⑨】 - 여일심목사(1914~1994)

글∙임승훈목사/서울신학대학교 신학박사, 더감사교회 담임, 위대한맘 대표
글∙임승훈목사/서울신학대학교 신학박사, 더감사교회 담임, 위대한맘 대표

1931년 여름철,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어느 날, 두 젊은이가 석양빛에 긴 그림자를 드린채 어딘가로 부지런히 걸어가고 있었다. 하나는 얼굴이 미남형으로 생겼지만 키가 작지 않다. 그의 곁에는 훤칠한 키에 눈이 부리부리하며 코마저 큰 것이 흡사 서양사람 같이 보인다. “! 멋지다. ‘젊은이여 왜 우느냐!’ 영화제목이 끝내준다. ?” 이러한 대화를 나누며 두 청년은 유쾌하게 종종 걸음을 치고 있다. 앞선 사람은 황성주요, 옆에서 걷는 사람은 여일심이었다. 황성주보다 두 살이 아래지만 여일심은 올 봄에(18)에 장가를 든 가장이었다. 죽마고우(竹馬故友) 간인 이들은 최근 새 꿈을 두었다. 영화배우의 꿈이다. 김천극장을 들락거리는 중이다. 그런데 배우가 어디 쉬운 일인가? 현실의 벽은 높고도 어려웠으며, 부모님의 반대 또한 극심했다. 좌절에 빠지면 이들은 술집에 가 만취되기가 여러 번이었다.

십대 후반 배우를 꿈꾸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를 그냥 놓아두지 않았다. 그가 17살이던 여름철 어느 날, 당일에도 친구 황성주와 함께 영화를 보러 김천극장으로 가는 중이었다. 번화한 시내 중심가에서 북소리가 들리고 몇 사람이 모여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들은 호기심에 구경꾼들 틈에 끼어들었다. 때를 놓치지 않고 전도자는 두 청년에게 다가왔다. 자신들을 소개하더니 구원의 복음을 전하고는 무작정 남산동교회(김천남산)로 이끌고 갔다. 마침 부흥성회 중이던 터라 구원의 초청에 손을 들었고, 다음날 새벽기도회를 참여하면서 일심의 인생은 180도 바뀐다. 그의 이름 그대로 여호와 하나님만을 향한 한마음(一心)’이 되었다. 곧 학습을 받고 같은 해 12월 세례를 받았다. 주일학교교사로 봉사를 시작했다. 1932년이니 일심의 나이 18살 때의 일이었다.

그 이듬해 8, 여일심은 십자군전도대의 천막집회 소식을 접하고는 저녁 예배 후, 또래 청년 7명이 의기투합하여 은혜 받기 위해서는 먼저 기도해야 한다며 지하 기도실에서 뜨겁게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새벽녘에 회개의 기도가 터져 나왔다. 멋으로 알고 했던 모든 장난이 불의한 죄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가슴을 치고 울면서 회개하였다. 7명이 모두 회개하며 통곡하는 중에 일심은 중생의 거듭남을 체험하였다. 잠시 생각을 잘못하여 부모님 마음을 아프게 한 불효에 대해 용서를 구하였다. 친구 성주와 함께 친구들을 찾아가 빌렸던 돈을 돌려주었으며, 또 과수원에 찾아가서는 과거 과일 서리한 것에 대해 용서를 빌며 배상하였다. 김천역장을 찾아가서는 소년 시절 6회에 걸쳐 무임승차한 것의 용서를 구하고 대금을 지불하였다.

 

예수를 만나 회개하니 새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성우회 창립과 활동

여일심은 1914124일 김천에서 여종규씨(모 김이남씨)의 독자로 출생하였다. 어려서 서당에서 사서삼경을 잘 암송하고 공부하여 늘 남의 부러움을 샀다. 일본식 공교육은 받지는 않았으나 그는 명석하여 십대후반부터 사업*1)을 하는 등 능력을 발했다. 잠시 배우가 되겠다고 한눈을 팔던 일심이 예수를 믿고 착실하게 생활하니 아내는 물론 부모님이 매우 좋아했고, 그의 뒤를 따라 믿음생활을 하였다.

1934(20) 121, 저녁 9*2), 여일심을 비롯한 신앙동기 황성주, 이기창, 안계완, 신태영, 이상윤, 조용수 7인이 모여 성우(聖友)청년회*3) 발기인 총회를 열고는 그로부터 보름 뒤인 26일 다시 남산교회에 모여(15인의 청년들) 성우회 총회를 열었다. 이들은 전도대를 만들어 전도, 교회개척, 봉사에 열심을 내었다. 이들 손으로 남산교회의 종탑을 만들어 올렸고, 다수교회, 광천교회, 태촌교회, 조마교회, 신안교회, 구미교회 등 6교회가 세워졌다.

19445, 여일심은 30세 어린나이에 남산교회에서 장로가 되었다. 크게 헌신하고 봉사하였다. 어려운 이웃교회 개척자들이 남산교회에 와서 도움을 요청할 때면 여장로에게 가야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남산교회에서 십일조는 물론 감사헌금 주일헌금 특별헌금 모든 부문에서 1등이었기 때문이다.

 

여일심의 목회사역 : 천광교회, 연안선교회

한국전쟁 후 사업에 어려움이 생겼다. 40대 초반, 그는 온가족을 이끌고 강원도 주문진에 새둥지를 틀었다. 장로교 감리교 인근교회에 출석했으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직접 자신의 가게 겸 집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장로로 약 3년간 목회하니 그곳이 바로 오늘의 주문진성결교회이다. 50세 늦깎이로 서울신학교를 졸업하고, 수원 반정교회에서 5년간 목회하며 망포(영통교회)와 승리교회(기산교회) 개척에도 기여하였으며, 그 후 친구인 황성주목사의 주선으로 인천 천광교회에 부임하였다. 천광교회는 그가 목회하는 동안 부자가 되고 교회는 연일 부흥하였다. 198268세에 그는 조기 은퇴하고 연안선교회를 조직하여 하나님 부르시는 날까지 지도목사로 헌신하였으니 그 단체가 오늘까지 인천항을 비롯한 전국의 여러 항구에서 선원들의 구령에 이바지 하고 있다.

여일심 목사와 성청회
여일심 목사와 성청회

<미주>

*1) 십대후반, 물자운영조합 전무로 탁월한 경영능력을 보였고, 이어 17세 무렵 경북 청과주식회사 [一心堂] 상무이사가 되다.

*2) 왜, 청년들이 한겨울 깊은 밤 저녁 9시가 되어 성우회로 모였을까? 일경의 눈을 피한듯 싶다. 혹시라도 귀찮게 할까봐서다. 후일 성우회가 중심이 된 전도대가 교회개척사역을 하며 말씀을 전하던 중 고등계형사의 소환으로 모두가 김천경찰서 유치장에 3주간 감금된 적이 있다. 이유는 국시에 어듯나는 발언을 했다는 것이다. 여일심이 대표로 각서를 쓰고 모두 풀려났다.

*3) 발기인들의 서언을 보면, ‘나날이 사악해지고 음란부패하여 가는요즘, 신앙향상과 미신자의 전도, 상호친목을 목적으로 한다고 밝히고 있으며, 20여 조항의 규칙을 정하고 임원을 선거하였는데, 회원자격으로는 16세 이상이면 되며, 3개월간 열심출석자로 하며, 입회비 15(), 월 회비 10()으로 하다.

 

<연보(年譜)>

* 1914124, 김천 남산동에서 여종규씨와 김이남씨 사이에 독자로 출생하다어린시절 이름은 여상범이었다.

* 1921(07)경부터 사서삼경(四書三經) 대학(大學) 논어(論語) 맹자(孟子) 중용(中庸),

시경(詩經) 서경(書經) 주역(周易) 등 한학을 공부하다.

* 1929(15) 물자운영조합 전무, 탁월한 경영능력으로 회사에 공헌하다.

* 1930(16) 1, 경북 청과주식회사 일심당(一心堂)상무이사가 되다.

* 1931(17) 42, 최옥선씨와 혼인하다.

* 1931(17~) 황성주와 어울려 영화배우의 꿈을 꾸다.

* 1933(19) 8월 김천 남산동교회(현 남산교회) 입교하다.

* 1933(19) 12월 김천 남산동교회에서 세례 받다.

* 1934(20) 집사로 임명받다.

* 1934(20) 121, 저녁 9, 여일심을 비롯한 신앙동기 황성주, 이기창, 안계완, 신태영, 이상윤, 조용수 7인이 모여 성우(聖友)청년회발기인 총회를 열다. 발기인들의 서언을 보면, ‘나날이 사악해지고 음란부패하여 가는요즘, 신앙향상과 미신자의 전도, 상호친목을 도모키로 하니 성우회라 하다.

* 1934(20) 26일 남산교회에서 15인의 청년들이 모여 성우(聖友)청년회총회를 열다. 20여 조항의 규칙을 정하고 임원을 선거하다. 회원자격으로는 16세 이상이면 되며, 3개월간 열심출석자로 하며, 입회비 15(), 월 회비 10()으로 하다.

* 1934(20)~, 여일심 황성주 등 7인이 중심이 되어 열정어린 성청활동 중에 다수교회,

광천교회, 태촌교회, 조마교회, 신안교회, 구미교회 6개교회를 개척하다.

* 1944(30) 5, 김천남산교회에서 장로 장립하다.

* 1954(40) 3월 봄, 강원도 주문진읍으로 이사하다.

* 1959(45) 4, 강원도 주문진교회 개척하다(당시 직분 장로)

* 1962(48) 3,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한 것이 인정되어 서울신학교 전수과(2학년)에 편입하다.

* 1962(48) 수원 반정교회에서 신학생 시절부터 담임전도사로 시무하다(5).

* 1964(50) 2, 서울신학교를 졸업하다.

* 1966(52) 5, 성결교단에서 목사안수 받다. 반정교회 담임목사 취임하다.

수원반정교회 시무 중에 망포교회(현 영통교회), 승리교회(현 기산교회)를 지교회로 세우다.

* 1967(53) 11, 당시 승승장구하던 송현교회 황성주목사 추천으로 천광교회 담임 목사로 청빙 받다(15년간 시무)

* 1982(68) 95, 조기 은퇴 하다.

* 1982(68) 101, 인천 연안선교회 창립하다(지도목사).

* 1985(71) 610일 활천 주간 유재하목사와 대담하다. 성청운동의 창시자 여일심목사

* 1993(79) 49,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다.

* 2018423. 서울신학대학교 총동문회가 수여하는 서울신대인상을 수상하다(횡성, 웰리힐리.

 

가족사항

장남, )여성원권사, 자부 정인숙권사

차남, 여성삼목사, 자부 김찬자사모

장녀, )여정련사모, 사위 김정구목사

차녀, 여정숙사모, 사위 고)정세택목사

삼녀, 여성숙집사, 사위 양종국집사

사녀, 여명자목사(미주)

오녀, 여명숙권사, 사위 박완식권사

육녀, 여정화사모, 사위 이기승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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