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승훈 목사의 인물연구⑩】 - 이봉성목사(1924~2001)

글∙임승훈목사/서울신학대학교 신학박사, 더감사교회 담임, 위대한맘 대표
글∙임승훈목사/서울신학대학교 신학박사, 더감사교회 담임, 위대한맘 대표

증도, 증도에는 술집과 무당이 없고 풍어제가 없다. 이제는 금연의 섬으로 지정돼 증도에서는 아예 담배를 피울 수 없다. 이 어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모두가 순교자 문준경의 영향력이다. 그래서인가 2007년 증도는 슬로우 시티로 지정되었고, 유네스코생물권보전지역으로써 수많은 전국의 관광객들이 찾는 곳이다. 하지만 이봉성이 태어날 당시엔 달랐다. 낙후지역 증도, 초등학교도 없어 지도에까지 배타고 나가야만 했다.

 

이봉성의 어린시절 순교자 문준경전도사의 보살핌 속에

이봉성은 1924213일 부친 이영균씨와 모친 홍애녀씨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초등학교 4년까지 공부했으나 배타고 통학하는 게 어려워 중도 포기했다. 11살 때였는데, 이때 마침 증동리에 문준경이 개척한 교회가 섰다. 아이들을 끔찍이도 아끼고 사랑했던 그녀의 전도로 이봉성을 비롯한 많은 아이들이 증동리교회에 나가기 시작하였다. 이봉성도 열심을 내어 신앙에 정진하였다. 1939(15)에 세례를 받기에 이르렀고 이듬해 1월 동절기에 개최된 이성봉목사*1) 초청부흥회에서 죄를 고백하고 헌신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때부터 큰형의 핍박이 시작되고,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로는 더욱 심해졌다. 하지만 그는 신앙생활에 정진하는 한편, 증도에 초등학교가 세워지니 뒤늦게(16) 졸업을 하고는 중등과정은 책을 사서 스스로 공부하였다. 1943년 일제 말(19), 동네에 불어 닥친 장티푸스로 부모님 모두가 돌아가셨다. 부모님 상을 치르고 상심하고 있을 무렵 얼마 안 되어 박금임씨와 결혼을 하였는데, 이것 또한 문준경의 중매 덕이었다. 결혼하고나서도 문준경의 권면과 보살핌은 계속되었다.

 

신학공부와 초기 목회 척박했던 고향땅 증도, 그리고

그가 20살 때 결혼하고 가장으로서 가정을 책임져야 했으므로 뜻을 세우고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여 합격*2) 하였다. 그런데 순경으로 발령이 나니 그는 고민 끝에 사표를 낸다. 민족을 말살하고 핍박하는 일제의 앞잡이가 될 수는 없었다. 곧 군에 입대하여 기본훈련을 마치고 보충대에서 대기 중 일본이 패망하여 해방이 되니, 그는 입대 후 얼마 안 되어 다시 고향으로 돌아 올 수 있었다.

이를 안 문준경은 그를 그냥 놓아 둘리 없었다. 이봉성을 집사로 임명하더니 이제는 전도인으로 교육을 받게 하고 지방회의 교육을 받아 전도인으로 파송하니 자신이 개척한 임자진리교회의 임시 담임목회를 하게 하였다. 1년 뒤인 1948년부터 2년간 서울신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하며, 방학 중에는 다시 신안에 내려와 전도 실습을 하던 학업과 전도의 전통을 이어가니, 그의 목회사역은 계속되었다.

문준경 전도사와 문준경 전도사 순교기념관
문준경 전도사와 문준경 전도사 순교기념관

임자진리교회 시절- 한국전쟁의 발발과 함께 불어 닥친 집단학살, 순교사건 수습

이봉성이 서울신학을 졸업하고 임자진리교회의 담임전도사가 되고는 위기가 닥쳤다. 목회를 시작한지 한달만에 6.25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신안 증도에도 인민군과 완장을 찬 인민위원회(바닥 빨갱이) 사람들이 준동하였다. 9월말 그는 문준경전도사와 함께 목포 보안서에 잡혀가 모진 고문을 받고 옥살이 중에 풀려났다. 인민위원들의 준동이 더욱 거세어졌다. 문준경은 증도 증동리교회로 들어갔고, 이봉성은 임자도 이기백씨 댁에 잠시 은거하였다. 그사이 증동리교회에선 핍박의 회오리가 불어닥쳤다. 국군이 들어온다는 소문이 나자 빨갱이들은 문준경과 신자들을 죽일 계획을 세우고 그 날 밤, 증동리 해변에서 문준경과 성도들을 무참히 살해했다. 집단학살이요, 집단순교가 일어난 것이다. 이봉성을 부랴부랴 증도에 달려가 참혹한 시신들을 수습하고는 장례예배를 드려 매장을 하였다.

며칠 후, 임자진리교회에서는 말로 다할 수 없는 참혹한 일이 벌어졌다. 이판일장로 이판성집사 형제를 비롯한 60명의 성도 중 48명의 집단순교(학살) 사건이 터진 것이다. 10명 정도만 남았다. 목포에 나가 있어 목숨을 건진 이는 이인재뿐이었다. 그의 가족과 일가친척이 모두 참혹한 피해를 본 것이다. ! 이를 어찌하랴. 이봉성은 이인재를 붙들고 예배를 드리기 시자가했다. 십자가 지신 예수의 사랑과 정신은 원수를 사랑하고 용서하는 것이라고. 그의 설득에 이인재*3) 가 동의하고 용서하니, 임자진리교회는 다시 60여명으로 부흥하기 시작했다. 눈물없이는 예배할 수 없고, 눈물없이 설교할 수 없는 시절을 이봉성은 용케도 잘 버텨나갔다.

 

군종장교 시절- 황금어장 목회를 시작하다

한국전쟁 중에도 서울신학교는 부산에서 피난신학교를 운영하였다. 19524월 부산총회에서 이봉성은 목사안수를 받았다. 이듬해(53) 다시 징집영장이 나오자, 군종에 지원하였고, 군목제도가 확정되니 1954년 경력을 인정받아 소령에 당당히 임관하였다. 그의 군목시절은 화려했다. 그의 군목생활은 청렴했다. 언제나 예수 닮기를 소망하였고, 전방 장병들의 위로와 병영생활 지도와 정신무장에 초점을 둔 목회였다. 59년 육군 제3군단 군종참모(중령)가 되었고, 61년 나이 37세에 정들었던 8년간의 군생활을 마치게 되었다(중령 예편)

이봉성 목사, 군목 시절
이봉성 목사, 군목 시절

 

상락교회 목회 시절- 신도시 교회건축과 학사관의 개관

61년 예편과 함께 목포상락교회에 부임하였다. 당시 목포는 매립공사와 신도시를 건설해나가던 시절이었다. 매립 건설본부장을 만나 담판을 지어 부지를 좋은 조건에 불하받기로 하고 건축하여 봉헌하니(63) 오늘의 상락교회다. 당시의 작은교회 형편으로는 상상 못할 일이었다. 교회 인근에 학사관을 마련하였다. 이는 신안군 섬마을 학생들을 위한 목회적 배려였다. 학생들 사이에서는 소문이 자자하여 상락교회 학사관에 들어오기를 고대하였다. 학사관에는 청운의 뜻을 품고 공부하던 고 박훈용, 박문석 등이 있었다.

 

목포상락교회와 이봉성 목사
목포상락교회와 이봉성 목사

 

교단의 사역과 총무

19654, 아현교회에서 열린 교단합동총회에서 서기로 선출돼 교단사역에 뛰어든 이후, 그의 업무추진력과 통합정신을 높이사서인지 8연임하였다. 곧 뒤이어 교단의 총무가 되었다. 그는 무교동 총회본부와 중앙교회와의 재산분쟁을 마무리 짓자마자, 강남이전을 추진하였다. 700여 교회*4) 에 불과한 약한 교세를 타개하기 위해 행정체계를 정비하고, 국실장들을 독려했다. 교세확장의 구체적인 밑그림을 그리며,, 교역자 노후설계를 위한 연금제도 도입, 해외선교사 파송, 십자군전도대의 기금유치 등 굵직한 일들을 추진해나갔다. 물론 이봉성목사 혼자한 일은 아니다. 총회와 전국의 교회들의 전폭적인지지, 한국의 경제성장 엔진이 맞물려 가능했다. 그가 총무를 마치던 1985년에는 1400여교회에 52만여명 신자로 250%정도 부흥되었다.

 

이봉성목사- 교계의 보기 드문 큰 별이었다

류재하는 이봉성목사를 일컬어, ‘문준경이 길러낸 스타라고 불렀다. 박문석은 이봉성을 문준경이 뿌린 복음의 열매’*5) 라고 칭했다. 이들은 같은 고향출신으로 대선배 이봉성을 대할 때마다 그렇다고 하였다. 고 김준곤목사는 이봉성을 가리켜 한국교계의 화합에 이바지한 스타라고 말했다. 이봉성은 누구와도 친화적이었다. 특히 군목생활에서 몸에 익힌 화합과 포용, 그리고 희생의 정신은 80년대 이후, 우리나라의 교계적 상황 가운데서도 필요했는가보다. 성서공회이사장, 찬송가공회위원장, 기독교서회 상무와 대표이사 역임, 한국기독교총연합회 총무, 기독교신문사 사장, 한국교회의 일치와 연합운동의 일선에서 유감없는 활약을 펼쳐나갔다.

<미주>

1) 목포 북교동교회에서 목회하던 이성봉목사는 문준경의 신앙적 은사이다. 그의 추천으로 문준경이 신학을 하게 되었는데, 이봉성 또한 그의 부흥회에서 헌신자로 살기로 작정하였다.

2) 일제 말엽, 당시 공무원 시험은 경찰직, 행정직, 수산임산 등으로 세분화돼 있지 않았다고 한다.

3)  이인재는 후일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되어 한 많던 임자진리교회에서 성공적인 목회를 하였다. 그가 여주교회의 이성관목사 부친이다.

4) 정확히는 740개교회 21만 신자였다

5) 박문석은 문준경순교기념교회 출신으로, 문준경 컨텐츠개발 전문위원을 역임하였고, 신안군 압해도의 분매교회 원로목사다. 길러냈다는 표현보다는 발굴했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

() 이봉성(李鳳星) 연보(年譜)

-19240213, 전남 신안군 증도면 증도에서 부친 이영균씨와 모친 홍애녀씨의 차남으로 출생하다.

-1931(07), 초등학교에 입학하다.

-1935(11), 초등학교 4학년 중퇴하다. 당시 증도엔 학교가 없어 나룻배를 타고 지도까지 다니는 어려움으로 중퇴하다,

-1935(11), 문준경전도사가 증동리교회를 개척하다.

-1938(14), 증동리교회에 입교하고 학습을 받으니, 형으로부터 모진 박해가 있었다.

-1939(15), 세례를 받다.

-1939(15), 01월 이성봉목사의 신년부흥회에서 중생을 체험하고 헌신을 다짐하다.

-1940(16), 증도에 사립학교가 생겨 초등학교를 졸업하다. 중등과정은 독학을 하다.

-1943(19), 장티푸스로 부모를 잃다. 그 후 유교사상이 엄격한 형 밑에서 핍박을 받다.

-1943(19), 문준경의 중매로 박금임씨와 혼례를 올리다.

-1944(20), 문관(공무원)에 합격하여 순경에 발령받으니 민족의식으로 사표를 내다.

-1945(21), 입대하여 신병훈련소를 수료하다.

-1945(21), 군 보충대에서 대기 중 해방을 맞이하다.

-1947(23), 집사 신분으로 전도인 시취를 받고 임자진리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하다.

-1948(24), 서울신학교에 입학하다.

-1950(26), 4월 서울신학교를 졸업하고 임자진리교회의 제4대 담임전도사로 부임하다.

-1950(26), 9월말 한국전쟁 발발 후 문준경전도사와 함께 목포 보안서에 잡혀가 모진 고문을 받고 풀려나다.

-1950(26), 고향 증동리 이기백씨의 서고에 은신하여 죽음을 모면하다.

-1950(26), 103일 문준경전도사의 시신을 수습하고 장례예배를 인도하다.

-1950(26), 10월 임자도로 돌아와 한 달간 예배를 인도하며 순교한 신자의 가정을 위로하다.

-1950(26), 60명의 성도 중 성도 48인이 순교당하고 10명정도가 생존하다.

-1950(26), 이판일장로와 동생 이판성집사 가족은 13명이나 희생되는 중 목포에 있어 죽지 않은 생존자인 이인재씨를 설득하여 가해자들을 용서하기로 하다.

-1951(27), 용서받은 동리사람들이 스스로 교회에 나오니 60명의 성도로 부흥되다.

-1952(28), 04월 부산총회에서 목사안수를 받다.

-1953(29), 01월 징집영장이 나오자 군종으로 지원하다.

-1953(29), 04월 최익수목사의 권유를 받고 297부대 군종으로 입대하다.

-1954(30), 12월 육군령으로 군목제도가 확정되니 경력이 인정돼 육군소령에 임관되다.

-1959(35), 중령 진급 후, 육군 제3군단 군종참모가 되다.

-1961(37), 01월 육군 군목 중령으로 예편하다.

-1961(37), 목포상락교회의 초청으로 담임목사가 되다.

-1963(38), 목포 신시가지에 교회를 이전하고 신축하다.

-1964(39), 목포 시내에 장학사관(學舍館)을 마련하여 신안 섬 출신 학생들을 공부하도록 하다. 대표적인 장학생으로는 고 박훈용목사, 박문석목사가 있다.

-1965(40), 723일 합동총회 서기로 선출, 교단총회서기로 8연임하다.

-1969(44), 아시아성결연맹을 발족시켜 후에 세계성결연맹으로 발전하다.

-1973(48), 04월 기독교대한성결교회 교단 총무가 되다.

-1973(48), 대한성서공회이사(후 이사장)와 찬송가위원회위원(후 위원장)을 역임하다.

-1978(53), 9성결회관을 착공하고 지휘하며 전국교회 모금을 독려하다.

-1978(53), 대한기독교서회 이사(후에 이사장, 회장)를 역임하다.

-1979(54), 11월 총회본부의 강남 시대를 열다(대치동 이전).

-1980(55), 본부를 선교국, 교육국, 사무국 3국체제로 업무를 확장하다.

-1981(56) 총무 재임 시절 박희성씨를 교단 첫 선교사로 태국에 파송하다.

-1985(60), 04월 교단총무를 4연임하고(12) 임기를 마치다.

-1990(65), 대한기독교서회 상무를 역임하다.

-1993(68), 기독교신문사 대표이사 겸 사장에 임명되다.

-1996(71), 한국기독교총연합회 총무가 되다.

-2001(76), 01월 성결교 원로목사회(성광회) 회장이 되다.

-2001(76), 1021일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조용히 눈을 감다.

-2001(76), 1024일 중앙교회에서 고 이봉성목사 장례예식이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총회장()에 엄수되다.

-2001(76), 1024일 중대부속병원에 시신을 기증하다.

 

유족(遺族)으로는

장남: 이태학(73, 밸리사랑의교회,목사), 자부: 손희숙/ 다니엘, 티나

장녀: 이희숙(70, 중앙교회 권사), 사위: 김현준안수집사/ 소영, 지영

차녀: 이성숙(67, 창조교회 권사), 사위: 권의현(, 성서공회사장)/ 규홍, 지은

차남: 이중학(64, 소망교회 집사), 자부: 정순옥집사/ 준명, 세명

삼녀: 이현숙(61, 밸리사랑의교회 집사), 사위: 강민선집사/ 동민, 은비, 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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