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자 임승훈의 인물연구 (12)】 차몽구 목사(1922-1994)

본헤럴드 대기자, 임승훈목사 (한부모가족돌봄센터 위대한맘 대표)
본헤럴드 대기자, 임승훈목사 (한부모가족돌봄센터 위대한맘 대표)

 

차몽구 목사의 군목 시절
차몽구 목사의 군목 시절

화려했던 군목생활 10

차몽구 목사의 군목시절은 화려했다. 1953년에 해군사관학교 제16차 특교대를 수료하고 중위로 임관하여 군목생활을 시작했다. 첫 부임지는 해병대 김포여단 소속 강화부대 군목, 그 다음은 진해신병훈련소 군목을 거쳐, 1956년 진해 해군 통제부교회 담임목사가 되었다. 그는 강직하고 청렴했으며 불의에는 조금도 물러섬이 없었다. 말씀에 있어서도 지성과 영성을 겸비하였기에 통제부 내에 장사병은 물론 장성들조차 그의 설교를 경청하러 모여들었다. 특히나 이승만 대통령과의 인연은 특별했다. 진해 대통령별장에 내려올 때마다 차목사의 예배에 빠짐없이 참여하였으며 그와 교제하기를 즐겨하고 말씀에 감화를 받으니 더욱더 통제부교회는 부흥에 부흥을 거듭하였다. 그의 나이 불혹이 되기 전이었다.

 

전역 후, 부산 수정동, 온천중앙교회의 담임으로

5.16군사혁명이 일어난 이후 차몽구목사는 해군본부 군종과장을 역임하던 중 중령으로 예편하여 10여년의 군목생활은 매듭을 지었다. 잠시 쉬고 싶은 마음도 있었으나, 그의 지근거리에서 유심히 지켜보던 수정동교회 측에서 전역소식을 듣고는 담임목사로 청빙하여 수정동교회의 침체를 극복하고자 하였다. 그 예측은 적중하였다. 부임 3년 만에 교회학교와 남녀전도회 등이 배가로 부흥하니 3년만인 196472일 차목사를 위임목사로 추대하였다. 남전도회를 새로 조직하여 배가되었으며, 새벽기도회의 경우 3년 만에 5배로 출석인수가 성장하였다. 그러니 낮예배는 2부예배로 편성하여 부흥을 꽤하던 중, 8년째에 온천중앙교회의 청빙을 받고 20년을 넘게 영근목회를 해나가니 부산기독교연합회장, 38대 교단총회장 등으로 그의 명성은 빛나게 되었다.

 

원산 출신의 3대 신앙 명문가문에서 태어나다

차몽구목사는 일제강점기 1922년 함경남도 원산에서 의사이자 후일에 장로가 된 차형은씨와 전경애씨 사이에 태어나 어린 시절은 매우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다. 신앙적으로는 조부로부터 물려받은 3대 신앙에 2대째 장로 가문으로 그의 앞길은 창창하였으나, 때는 일제의 강압정치가 드세던 시절이었다.

적을 알려면 적군의 소굴로 들어가야 했는가. 그는 원산에서 당시 5년제 중학을 졸업하고, 일본에 유학을 떠났다. 1943년 고지고등학교에서 수학하고 동경제국대학 농학부에 입학하여 공부에 맛들이고 재미있던 2학년 때였다. 갑작스레 학병징집 통지가 날아든 것이다.

 

3대 신앙의 명문가 출신

 

일본군으로 전선에서 그대로 죽을 수는 없는 일” : 탈영에 성공했으나.

일본은 이미 만주사변, 중일전쟁을 일으키고, 대만, 필리핀, 인도차이나, 인도네시아 등을 차례로 침략, 병참기지화 하더니 급기야 하와이 진주만을 공격하여 태평양전쟁까지 일으킨 상황이었다. 차몽구도 군대 징집명령은 피해갈 수 없었다. 한국으로 귀국하여 학병으로 소집돼 훈련받고는, 그는 함흥의 일본군 제43연대에 배속되었다. 그런데 이대로 전선에 배치된다면 나는 일본제국주의를 위해 싸우다 죽는 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신이 번쩍 드는 순간이다. 몇 날을 도주계획을 세우고 있었지만 기회는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부대 밖에서 야간훈련이 있던 칠흑 같은 한여름 날이었다(831). 야음을 틈타 대열에서 이탈하는데 성공, 고향과는 정반대인 함흥 북쪽 산골마을로 잠입해 들어갔다. 멀쩡한 청년으로서는 도주의 길은 망막하였다. 정신이 나간 저능아 연기를 하는가 하면 미치광이 꼴로 사람들의 의구심을 피해갔다. 가을걷이를 할 때는 일손이 부족한 농가의 머슴으로 호구지택을 삼았으나 그해 겨울 전염병이 나돌자 몽구에게도 그것은 피해갈 수 없었다. 온 마을에 열병이 심하더니 그마져 전염병에 걸려 정신을 잃었다. 수십 구의 시체가 버려지는 때였는지라 그도 함께 버려졌다. 헌데, 헌데 그가 며칠 만에 시체구덩이에서 살아나왔다.

 

사명을 받고 서울신학교에 입학하다.

시체더미에서 며칠 만에 죽었다가 살아나올 때, 그는 천국을 체험한 것으로 알려진다. 한 지인에게 전한 그 소식은 참으로 놀라웠다. 세브란스의 한 선배의사는 몽구야 네가 의학을 공부하면 여기서 일하도록 주선하겠다라는 약속도 들었다. 하지만 그는 천국을 체험한 사람으로서 의사가 될 수는 없었다. 해방이 되자마자 그는 서울충정로의 서울신학교를 자원하여 입학, 공부하고 1949년에 졸업하여 충청도 아사나 매곡교회에서 전도사로서 첫 목회를 시작하였다. 5028세 때, 부산 서전적십자병원교회 전도사로, 그리고 군에 나가기 전, 5230세에 부산 수정동교회 전도사를 역임하였다. 이것이 인연인가 군목을 제대한 이후 곧 수정동교회의 담임으로 부름을 받은 것은 분명 이유가 있을 터, 그의 인품에 감화를 받은 까닭이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 그의 좌우명

94세인 차몽구목사의 아내 안봉주사모는 지금도 입버릇처럼 말한다. “차몽구목사는 진국입니다. 꾸밈이 없는 사람이 사람이지요. 진실된 사람입니다. 제가 세상에서 제일로 존경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고 차몽구목사는 매일같이 묵상하던 양식처럼 읽던 말씀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이었고, 그 말씀처럼 살았다고 전해진다.

1995년 당시 총회장 최건호목사는 추모사를 통해*1) 큰 키에 멋있는 해군 고급장교 복장으로 교단 총회에 참석하시던 모습을 회고했다. 선배 총회장 고 차몽구목사님은 늠름한 해군의 십자군 지휘관의 자태였다고 전제하고 어려운 교단의 행정이나 큰 교회 목회와 치리에도 남다른 인내력과 우직한 의지력으로 유종의 미를 거두신 (성공적인) 목회자로 기억한다. 뿐만 아니라 그의 동기이자 절친인 최동규목사는 고 차몽구목사를 가리켜 그는 신앙의 사람이며 진실된 사람이다. 착한 사람이다. 요령 없이 주어진 대로 순수하게 살아간 사람이었다.”고 회고한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 차몽구목사께서 생전에 남기신 시 한 수를 끝으로 글을 마무리 하고자 한다.

 

1970년대 온천중앙교회와 차몽구 목사
1970년대 온천중앙교회와 차몽구 목사

 

 

메마른 호수*2)

 

차몽구 목사

 

이것은 누가 버린 돌들일까?

호수 밑바닥이 드러나려 하고 있으며

깔린 돌들이 보이기 시작하지 않는가?

 

천년을 하루같이 묵념하여 오던 중

밤마다 천사의 손길이 닦아내린

유리알 같은 호숫가의 은반엔

굵은 소나기의 열매같은 빗방울이

신나게 때리고 시원하게 쏟아 붓고 울리는

자연의 교향악을 고대하고 있건만 ...

 

구김 없는 하늘은

맑고 푸르기만 하고

혹 물 없는 구름은 기대하지 말라고

손을 흔들며 지나갑니다.

 

! 나의 가슴을 태우는 蒼天(창천)이여!

삼라만상이 타고 있지 않는가?

빗방울로 시원하게

생명의 음율을 들려주려무나!

 

 

석양빛에 고운님 그리며 

- 차몽구 목사님을 추모하며*3)

 

동문 시인, 조은 김명숙

 

아직 석양 그림자

설핏 드리우면

아련한 기억 속에

고고한 님 계시옵고

원산 바닷가 명사십리

달리며 놀던 해당화 옛길

유년의 시절 살며시 떠오르네

 

세월은 흐르고

부서지는 포말 속에

들리는 듯 님의 목소리

진해 앞바다 늠름한 군목시절

귀신 잡는 해병에게 심어준

거룩한 열정 호소력의 메시지

호가(好價) 누리신 더 없는 님 이었죠

 

기도로 초석을 놓고

덕으로 세운 믿음의 가문

왕대밭에 왕대난다세언이

부조(父祖)의 가계(家系)에 흘러

자랑스레 자란 복덩이 자손들에게

꼭 대 이을 성골(聖骨) 하나 바라시며

땅엣 것보다 위엣 것 찾으신 님

 

내면의 순수 진실이

영성가득 어울러 포양하여

참 목자의 뜻 수정동에 심고

온천중앙 화합 위해 눈물 뿌려

생채기 싸매고 다독여 치유하니

지성(至聖) 겸비한 조국의 신사라며

인고의 날 보낸 뒤 성자라 불러드렸죠

 

파고의 높이만한 그리움 안고

노을 진 해운대 모래 톱 밟으며

이제는 해 가리개 살포시 접고서

펼쳐놓은 소풍자리 주섬주섬 거두고

님은 내 곁에 올 수 없어도

나 님 곁에 뒤미처 가오리니

구속 벗은 하늘정원 보라 꽃 되려하오.

() 차몽구 목사의 유가족

사모 안봉주(94, 온천중앙교회)

장남 차성율집사(신내교회, 공학박사, 컴퓨터회사 사장)

자부 서숙희집사

차남 차성운안수집사(MIT공학박사, 연세대학교교수)

자부 백영란집사

장녀 차성숙권사(의사, 의학박사, 인제대학교교수, 백병원)

사위 김재도장로(의사, 의학박사, 고신대학교교수, 고신의료원)

손자, 손녀/차명진(의사), 차은재(약사), 김윤진, 김영훈, 김미진

() 차몽구목사 연보(年譜)

192236, 함경남도 원산시 상동 222번지에서 부친 차형은과 모친 전경애 사이에 차남으로 출생하다.

1934(12), 원산 보통학교를 졸업하다.

1941(19), 원산 공립중학교를 졸업하다(5년제).

1943(21), 일본 고지고등학교를 졸업하다.

1943(21), 동경제국대학교 농학부에 입학, 수학하다.

1944(22), 학병으로 강제 징집돼 함흥주둔 일본군 43연대에 배속되다.

1944(22), 일본을 위해 싸우다 죽을 수는 없다는 생각으로 부대를 탈영하다(821)

1945(23), 탈영 후 은신하던 중 한겨울 열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던 중 해방을 맞이하다.

1945(23), 해방 후 고향 원산에서 중등교사를 하다가 목회자로 부름받다.

1946(24), 서울 충정로 서울신학교에 입학하다.

1949(27), 서울신학교를 졸업하다.

1949(27), 충남 아산 매곡교회 전도사

1950(28), 부산 서전적십자병원교회 전도사

1952(30), 부산 수정동교회 전도사

1953(31), 안봉주와 혼인하다(828) 슬하에 성숙, 성진, 성운을 두다.

1953(31), 해군사관 제16차 특교대에서 훈련받고 수료하다.

1953(31), 해군 군종장교로 임관하다(중위).

1953(31),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제20회 총회에서 목사안수를 받다.

1953(31), 해병대 제1전투단 강화부대 소속으로 군목생활을 하다.

1954(32), 진해 해군신병훈련소 군목으로 복무하다(대위).

1956(34), 진해 통제부군인교회 담임으로 복무하다(소령).

1956(34), 이승만대통령께서 진해 별장에 머무실 때, 통제부교회에 종종 출석하시어 차몽구목사의 설교를 경청하시다. 순복음교회 최자실목사가 평신도 시절 여기서 차목사의 신앙지도를 받다.

1960(38), 미 국무성의 초청으로 해군군목학교(Newport.R.I)에서 6개월간 연수하다.

이때 장로교의 신현균목사와 교우하고 동행하다.

1961(39), 해병대 제1사단 군목으로 복무하다.

1962(40), 해군본부 군종과장 근무 중 예편하다(중령).

1962(39), 부산 수정동교회의 담임목사 청빙을 받고 부임하다(4).

1964(41), 차몽구목사 위임예배를 드리다(620).

1965(42), NCC 사태로 인해 예성, 기성으로 나뉘었을 때 끝까지 중립을 지키던 중 아현교회의 합동총회의 결실을 경험하다.

1968(45), ‘성곡의 밤을 열고, 교회묘지를 구입하다(66백평).

1969(46), 지병을 이유로 수정동교회를 사임하다.

1969(46), 온천중앙교회로부터 담임 청빙을 받고 부임하다.

1983(61),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제38대 총회장이 되다.

1987(65), 1월 시골교회의 부흥회를 인도하다가 쓰러지다.

1987(65), 부산 온천중앙교회에서 원로목사로 은퇴하다.

1994(72), 소천하다(612)

19954, 소천1주기 유고설교집 발간(편집 이종래목사), 내가 주를 보았다, 미남인쇄사

<미주>

1) 차몽구목사 유고설교집, 내가 주를 보았다, 1995. p.21.

2) 차몽구목사 유고설교집, 내가 주를 보았다, 1995. p.340.

3) 시인의 말 : 차몽구목사의 12주년 추모식에서 안봉주사모의 그리움 달래드리려 지은 추모시이다. 목사님의 고고한 성품, 이북에서의 유년시절, 이승만대통령께서 해군사령부에 오시면 전역 후에도 당신을 모셨다는 명설교가 미담은 교단에 회자되고 있어, 묵묵히 십자가 지고 사역의 길을 걸어가신 존경하는 목사님의 발자취를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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