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승훈 대기자의 취재기】 빛갤러리 대표, 사진작가 김광용선생을 찾아서

김광용 작가 (빛갤러리 대표)
김광용 작가 (빛갤러리 대표)

 

대담 : 본헤럴드 대기자 임승훈

인터뷰이 : 김광용 작가 빛갤러리 대표, 신구대학1년 사진학과 중퇴

저서: 사진예술로 찬양하는 창세기, 서울: 도서출판 꿈꾸는나무(2006)

일 자 : 2022727

장 소 : 신내동 작업실

Q1. 먼저 작가선생님께서 본헤럴드 독자들에게 자신을 소개해 주시죠.

A. 안녕하세요. 사진작가 김광용입니다. 오랫동안 몸담아왔던 ()한국기독교문화예술원 사진작가협회장과 ()한국기독교의료선교협회 지정 사진작가로 활동한 바 있습니다. 22회 한국현대미술대상대회 미술상을 수상(2001)하였습니다. 정부와 삼성전자, LG전자, SBS의 후원으로 2000년 시드니올림픽컨벤션센터 전시회를 시작으로, 2000년 대한민국국회헌정기념관 전시회, 2001년 러시아 모스크바대학교 전시회, 2002년 한일월드컵 상암동문화관 전시회, 2004년 아테네올림픽컨벤션센터 전시회, 2004년 미국 워싱턴주 클로버파크 전시회 등을 통해 대한민국을 알리는 일을 해왔습니다.

 

Q2. 최근 선생님의 관심사와 작업 중인 작품들은 무엇인가?

A. 꽃과 전통문화를 접목해서 사진예술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주제는 어머니라든지, ‘전쟁과 평화등 다양한 분야를 소화하고 있습니다. 특히 최근에는 “K-Culture 아름다운 조합 1004점 제작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100호짜리로 말이죠(보통 162.2×130.3를 말하지만 나라마다 조금씩 다르기도 하다. 100호는 그 작가의 작품가를 말할 때 기준이 되는 캔버스 크기이다).

 

Q3. 현재 진행하는 작품의 작업이 맘에 드는가?

A. 다양한 과정을 겪고 있습니다. 교류중인 사진작가들이라든지 동료, 지인 등에게 자문을 구하고 시범을 보여주는 것을 관찰하는 것들을 통해서, 특히 마음을 열고 경청하며 작품들을 만들고 완성도를 높여가고 있다.

 

Q4. 대한민국 해방77주년기념으로 오는 815일부터 열리는 오사카 갤러리 전시에도 출품을 하는 걸로 안다.

A. , 이미 만든 것들을 10점을 오사카갤러리 측(강영선 관장)에게 전달했구요. 오사카 강 관장이 2점은 직접 가지고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나머지 8점은 전통문화와 관련된 것들인데, “달 항아리와 꽃”, “복주머니와 꽃”, “복조리와 꽃”, “농악(상무)과 꽃”, “태권도와 꽃이라는 작품이죠. 종로 소재 오사카 갤러리(한국 분원)에 보관하고 있으며 계속해서 일본에서 기획될 때마다 전시될 예정입니다.

 

Q5. 작가께서는 유독 꽃을 좋아하는가보다.

A. 우리 대한민국의 전통적인 문화적 소재만을 다루기엔 단순하고 밋밋하단 생각에서 생화를 준비하여 곁들이는 것인데 일종의 소재의 다양화라고 할까요? 꽃이 함께 하면 관람하는 갤러리(관객)들이 좋아하잖아요. 내가 특히 꽃을 좋아합니다.

김광용 작가는 꽃, 풀과 같은 생명을 사진 소재로 사랑한다.
김광용 작가는 꽃, 풀과 같은 생명을 사진 소재로 사랑한다.

 

Q6. 본인의 작품이 건네지고 전시되는 때마다 작가로서의 보람은 무엇인가?

A. 경제적 유익은 기본이구요, 저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먼저 생각하기에 많은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유독 좋아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고, 실천하는 대상으로 사람들을 보기 때문이죠. 이는 곧 복음을 전하는 기회이기에 자랑스럽게 또 보람으로 생각합니다. 경제적 유익은 시간이 지나면 점차 따라온다고 생각합니다.

 

Q7. NGO기관을 통해 해외에 오랫동안 의료봉사활동을 해 온 걸로 압니다.

A. 저는 지난 30여 년간 국제 NGO라든지, 교회와 선교회 등 단체의 자원봉사를 통해 선한 사마리아인 활동을 하면서 사회의 뜻있는 인사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한국기독교의료선교협회 지정작가 지위도 얻었습니다. 20여 년 이상의 교제를 통하여 신뢰를 쌓아가다 보니 선교사나 목사님 또 꼭 도와드리고 싶은 분인 경우 제가 치료비를 지원하면서 의사들을 소개하여 치료해드리곤 합니다. 적당히 얼버무리고 마는 형태가 아니라 끝까지 책임을 지는 치료방식이 되겠습니다. 외과병원, 한의원, 치과의원 2곳 등이 있고요. 그 외에도 서울 소재 유명대학병원 등에도 인맥이 있어 일정한 도움을 드릴 수 있겠습니다.

 

Q8. 엉뚱한 질문이지만 코로나로 인해 생계가 위협받았을 텐데, 지난 3년간은 어찌 지냈는가?

A. 이해하기 어려울지 모르지만, 어려운 시절에는 노동현장에 뛰어드는 것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흔히 하는 말로 일자리가 없다’, ‘알바자리도 없다고들 난리이지만 위험한 노동현장은 일자리가 넘쳐나죠. 저는 18층 고층의 난간공사 현장이라든지, 먼지나 쇳가루가 많이 나는 위험한 곳에서도 마다하지 않고 일하면서 생계를 유지하였죠. 좀 힘들기는 하지만 일당도 좋으니 해 볼만 하죠.

 

Q9. 그런 도전정신이 있었기에 오늘의 김광용이란 작가가 만들어진 것이로군요. 사진촬영은 언제부터 하였는가?

A. 저의 외삼촌, 이모님, 이모부님이 사진 스튜디오를 운영하셨구요, 아버님과 작은아버님은 젊어서부터 사진 취미생활을 하셨지요. 집안이 모두 사진가족이어서 저는 어려서부터 카메라를 메고 사진촬영을 해왔습니다. 사진생활이란 가정이 부유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것이죠. 할아버지가 50~60년대 충남 공주군 사곡에서 물레방앗간(정미소)3개를 운영하셨으니, 부유한 집안이라고 할 수 있는데, 어떤 계기에서 저는 초등학교 시절 외삼촌이 계시는 천안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외삼촌이 운영하시던 스튜디오에서 사진을 접하고 배우기 시작하여 아마도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인가 천안경찰서 수사관들을 따라 범행현장 촬영을 다녔습니다. 외삼촌과 숙모가 촬영을 나가고 제가 사진관을 지키고 있을 때 사건이 나면 경찰서수사과에서 보내주는 오픈형 지프를 타고 촬영을 다녀오곤 했다. 어려서부터 험한 장면(살인, 자살, 강력사건)을 많이 보았고 그것이 직업이 되었고, 사진을 하게 된 계기였죠.

김광용 작가 어린 시절
김광용 작가 어린 시절

 

Q10. 예수님을 만난 것은 20대 후반으로 알고 있는데요, 군에서도 사진을 찍었는가?

A. 저는 방위병이었는데, 특별한 기술이 있으니까 우연치 않게 사단장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연대장으로부터도 존댓말을 듣기도 하고 신기한 군 생활을 하였지요. 의정부에 있던 72사단이었는데, 공개되지 않은 기밀 벙커사진을 제가 찍어서 육본에 보고하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래서인지 보안대나 헌병대로부터 제대 후 3년 동안이나 기밀보안각서를 요청해오곤 했지요. 제대 후 27세부터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Q11. 예수는 어떻게 해서 믿게 되었나, 누구의 전도였나, 아니면 자발적이었는가?

A. 사진을 하다가 재미있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여기저기 종교단체도 다니며 사진을 촬영하다보니, 교회에도, 천주교 성당에도, 불교의 사찰에도 다니며 사진을 찍게 되었는데요. 종교단체의 촬영빈도가 많아지면서, 우연한 기회에 저를 변화시키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사진가의 안목이라고 할까요?

사찰의 유명하다는 고승(高僧)을 촬영하는데 얼굴표정이 없고, 알맹이도 없는 어떤 어둠을 발견합니다. 두 번째는 성당에서 사제를 촬영하는데 뭔가가 꽉 찬 느낌은 있지만 부정도 긍정도 없는 희미함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개신교의 목사님을 찍을 땐 그 얼굴 모습이 너무나 평온하여 사랑이 넘치는 듯한 을 보았다고나 할까요? 사진은 카메라가 얼굴을 인식하는 게 아니라 카메라의 센서(옛날엔 필름)에 빛을 각인시켜 사진이 되는 원리잖아요. 사진가의 관점으로 3개의 종교를 관찰하며 스스로 터득해 알게 된 것이죠. 작가적 관점으로 3개의 종교를 구분해 내다보니 개신교에 마음에 끌리더군요. 그래서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Q12. 조리개 값으로 말하자면 개신교는 F2.8, 성단은 F4, 불교는 F16 값 정도라고나 할까요. 지도자의 얼굴을 빛의 밝기로 보게 되어, 스스로 교회를 찾아갔다? 그것 또한 특별한 경험이다.

A. . 그렇게 하여 27살에 면목동에 소재한 성동침례교회에 첫발을 딛고 지금까지 근 35년째 신앙생활을 해오고 있습니다. 예수의 눈으로 사진의 사물을 대하니, 주변에 죽어나가는 작가들이 너무나도 많이 보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전에도 같은 현상은 있었지만 예수를 믿고 나니 더 많은 작가들이 자살하는 것이 눈에 뜨이는 겁니다. 그들을 어떻게 하면 살릴까? 예수께로 인도할까, 복음으로 전도할까? 라는 생각이 든 것이죠.

 

Q13. 그래서 김선생님이 하게 된 일이 무엇인가?

A. 2007년부터 작가들의 그림(작품들)을 찍어주게 되는 데 1건에 5천 원씩 받았습니다. 그 촬영 값은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작가를 찾아가 사진을 찍어주다 보면 (시간적으로) ‘얼마 후엔 자살하겠구나.’라는 예측이 되는 겁니다. 이건 피조물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죠. 분명코 이 일은 하나님의 사건이요, 하나님의 일이라는 확신이 들게 되었습니다. 아주 많은 작가들이 사탄에 붙들려있었고, 피로가 누적되어 생활고를 겪고 있던 시절입니다. 우리나라의 자살율이 매우 높지만 문화예술계라고 다르지 않았습니다. 죽을 뻔한 사람들을 여러 명 살리는 계기도 만들어 뿌듯합니다.

 

Q14. 어떻게 전도의 열매가 맺어졌는가?

A. 제가 외과의사, 한의사, 치과의사 2명과 주축이 되어 가난한 나라에 단기 의료봉사활동을 다니기 시작해온지 벌써 20여년이 훌쩍 넘었네요. ()한국기독교의료선교협회 지정 사진작가가 된 것도 우연이 아니었죠.

서울 신내동 철거민들이 천막을 치고 농성하던 때였죠. 젊을 때니까 피가 끌어올라 저들 속으로 들어갔고, 한동안 함께 자고 함께 살았죠. 사진을 찍어 국제 NGO를 통하여 해외 인권단체에 호소했죠. 한국의 인권이 형편없다고, 사각지대가 많다고 알리게 되었죠. 철거민들의 열악한 생활상을 작품으로 만들어 연세대, 고려대, 명지대 등 여러 대학에 전시하며 외쳤습니다. “여러분들이 한국의 지성이라면 신내동의 문제를 도외시하지 말아주십시오

대학생들에게 호소하니 저들이 달려왔습니다. 사회운동이 일어난 것이죠. 청년대학생의 데모를 이끌었고, 그곳에 야학을 개설하였습니다. 의료선교협회에 찾아가 호소하던 중 저들로부터 의료지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만남이 인연이 되어 해외의료봉사를 가게 될 때마다 제가 동행하게 되고 지정작가의 지위도 얻게 되었습니다.

위대한맘과 함께 한 사진
위대한맘과 함께 한 사진

 

Q15. 사회운동을 하다 보면 스스로 망가지기도 하는데 용케 살아나오셨다.

A. 그것은 예수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2천 년대 이전이라 기억되는데요, 하나님 앞에서 목숨을 걸고 건방진 기도를 올렸죠. “세계에서 가장 크고, 세계에서 가장 비싸고,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보는 작품을 만들게 해 달라.”고 말이죠. 이 소원을 들어주시지 않는다면 죽어버릴 거라고... 하나님을 협박한 것이죠.

사회운동에만 매몰되면 술 많이 먹고 생활이 불규칙해지며 망가지기 쉽죠. 부정적인 시각을 긍정의 시각으로 바꾸는 계기가 생겼는데. 그것은 예수 때문이죠. 인권의 사각지대 같은, 한국의 나쁜 모습을 알리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 한국의 자랑거리를 알리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는 의미를 발견한 것이죠.

 

Q16. 시각이 바뀌니 작품이 새로워지게 된 것이군요?

A. 2001년도 제22회 한국현대미술대상대회 미술상*1)을 수상하고 나서부터, 정부와 민간의 주목을 받게 되었죠. 정부와 삼성전자의 후원으로 2000년 시드니올림픽컨벤션센터 전시회를 시작으로, 2000년 대한민국국회헌정기념관 전시회, 2001년 러시아 모스크바대학교 전시회, 2002년 한일월드컵 상암동문화관 전시회, 2004년 아테네올림픽컨벤션센터 전시회, 2004년 미국 워싱턴주 클로버파크 전시회 등을 통해 대한민국을 알리는 문화전도사의 역할을 해왔습니다.

러시아 모스코바대학 전시회, 그는 문화 사절단이다.
러시아 모스코바대학 전시회, 그는 문화 사절단이다.

과거와 현재의 작품 활동에는 여전합니다. 다만 예전에는 봉사와 헌신에 우선하고 작업에는 약간 소홀하여 15%정도의 시간밖에 투자를 못하였다면 요즘은 대략 50%이상의 시간과 열정을 작품 활동에 쏟고 있으며 봉사하는 시간을 줄여나가고 있습니다. 작품이 내게 머물면 그것은 미완성에 불과한 것이죠. 나의 작품이 갤러리에서 전시되고 여러 사람에게 선을 보이고 드디어 작품을 사랑하는 소장자를 만나게 된다면 그것은 그 작품의 완성이라고 봅니다.

*편집자 주 : <한국현대미술대상 미술상>은 사진미술 부문의 대상보다 격이 높은 상이다.

 

필자와의 관계 : 김광용작가

필자와는 한 5년 전부터 싱글맘 단체 WE대한MOM과의 인연으로 알고 지낸다. 왜소한 체구지만 인자한 모습, 김구선생 안경을 낀 학자적 풍모이나 털털한 성품에 나는 많이 끌렸다. 더욱이 위대한맘을 향한 사랑의 모습에서는 진정한 선한 사마리탄을 목도한다. 헌데 그의 진면목은 오늘 인터뷰를 통해 나왔다. 그의 삶을 조금은 이해할 듯하다.

그는 2007, 북경올림픽을 1년 앞두고 미국에서 순회전시 일정과 IOC위원미팅계획을 추진해 나가던 중이었다. 도미에 앞서 건강점진을 하는 과정에서 암이 발견되어 미국순회 전시를 포기하고 수술대에 올랐다. 그의 목숨을 건 기도는 하나님을 협박하는 모양새였지만 지금은 그 결과물들이 서서히 나오기 시작한다.

최근에는 “K-Culture 아름다운 조합 1004점 제작에 도전하고 있다. 이미 10점은 일본의 오사카 갤러리에 위탁되었다. 재정의 부요와 목숨 걸고 기도하던 내용이 응답으로 나오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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