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승훈 대기자의 자랑스러운 성결인을 찾아서(1)

서울신대 사회복지학과 82학번 임성규 교수
서울신대 사회복지학과 82학번 임성규 교수

서울신대 사회복지학과 82학번, 사회복지전문가 임성규 교수

필자가 임성규 동문1)을 만난 지는 40년 가까이 된다. 해병대를 제대하고 복학하고 난 뒤였으니까. 아마도 그를 알고 지낸지는 1983년 언저리라고 생각된다. 지난 6월 하순 종각역 앞 YMCA에서 만났다. 오랜만이지만 그를 알아보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카페에서의 만남이 오늘의 스토리가 되었다.

그에게는 늘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몇 개 있다. 궁금한 김에 묻고 싶다. 성결교 목회자의 아들로서 신학교를 오면서 신학과를 택하지 않고 사회복지학과를 택했는가? 신대원을 졸업하고는 곧 교회를 개척하여 목회하였는데 대체 어떤 목회를 하였는가? 12년 동안이나 새아침교회를 목회하다가 또 복지관의 관장으로 진로를 바꾸었을까? 흔한 이야기지만 남들은 아버지의 목회지를 이어받아 편안한 인생을 살던데 그는 왜 아버지의 청을 거절하였을까? 이런저런 궁금증을 가지고 그를 만나러 전철을 탔고 공항선과 1호선을 환승하며 손쉽게 50여분 만에 종각에 닿았다.

 

-그의 학부시절: 데모대의 선봉에 서다

학생 데모가 일어났다 하면 맨 앞에서 군부 독재 물러가라.’라며 돌을 던지던 거칠게만 보이던 임성규였다. 그렇게 학생 운동의 선봉에 섰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 당시 그에게는 성결교회의 목회자 가정에서 티 없이 맑고 순수한 성결한 목회자의 아들이라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로부터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자.

나의 이야기는 아버지로부터 시작해야 할 듯합니다. 그게 자연스러우니까요. 저는 방금 선배님 말씀하신 대로, 목회자의 가정에서 태어났고, 그 중에서도 독특한 삶의 관습을 가지고 있던, 아버지 임희창 목사는 전형적인 성결인이요 성결교회의 목자였습니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까지도 하루에 네 번에 걸쳐 교회당에 들어가 한 시간씩 엎드려 부르짖어 기도하는 목사였지요. 그가 신학생이던 59년에 서울의 가장 가난한 동네 성북구 삼양동2) 언덕배기 작은집에서 길음교회를 개척하였습니다. 교회가 부흥하니 한평생 네 번의 건축을 하셨습니다. 한길밖에 모르니 곰 같은 목회자요, 청빈(淸貧)이란 친구와 함께 성결을 실천하며 우직하게 사셨습니다.”

이렇게 지내다가 제가 대학을 들어가고 보니 학교의 분위기도, 정치권과 나라의 분위기도 내가 기대하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선배님 아시다시피 80년대의 모습이 어떠했지요?”

필자가 기억하기에도 군부 독재의 앞잡이 사복 경찰들이 캠퍼스를 속속들이 들여다보고 있던 시절이었다. 학보사 곁에는 언론을 감시하는 사복 경찰이 사무실 하나를 독차지하며 상주하였다. 캠퍼스 내에 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는 곳이면 어디든 사복 경찰의 매서운 눈초리가 우리들의 일상을 엿듣는 분위기 정말로 안 좋던 때였음을 기억한다. 그가 다시 말한다.

이때 뭔가 데모를 해서라도 학생들의 순수한 힘으로라도 변화를 모색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앞장섰던 것이지요.”

 

-사회사업학과 제1기생으로 서울신학대학의 문을 두드리다

임성규는 1963년 삼양동 언덕 길음교회 사택에서 21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늘 이렇게 말씀하셨다. “목사는 말이야, 우리 교우나, 우리 동네 사람들의 평균 수준으로 살아야 돼, 잘살아도 안 되고 못살아도 안 되는 숙명이지.” 그렇게 가난을 벗 삼아 살면서도, 갈 곳 없는 북에서 내려온 피난민 한 권사님을 믿음의 어머니라 하여 집에서 평생을 모셨다. 임성규는 어려서부터 할머니가 세분인 줄 알았다 한다. 큰 집에 가면 친할머니, 외가에 가면 외할머니, 집에 계시는 믿음의 할머니..., 어느 때인가는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낯선 아이가 있었다. 지역에서 돌봐줄 이 없는 버림받은 아이를 아버지가 데리고 와 아들처럼 키우셨던 것이다(지금은 목사가 됨). 이렇게 모두가 한집에 살았으니 좁은 집에는 늘 조용할 날이 없었다. 임성규는 그 흔한 육성회비를 한 번도 제때에 낸 기억이 없다. 혼잣말처럼 그는 그러고 보면 우리 어머니가 더 대단하셨다.’라고 회고한다.

그가 대학에 진학할 때가 되니, 그의 아버님께서 신학을 공부하는 게 어떠냐고 권하였다. 입시요강을 살피다가 마침 사회사업학과를 알게 되고, 이왕이면 신학교에서 색다른 공부를 해보자는 생각으로 사회사업학과의 문을 두드리게 되었다.

 

-1992년 가을, 새아침교회를 개척하다. 2002 길음교회 후임자리를 거절하다

서울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군복무를 마치던 1992년 삼양동에서 가까운 방학동에서 새아침교회를 개척했다. 신학을 하면서도 운동권에서 몸담았던 친구들은 대개 민중교회로 나가 노동자들과 함께했다면, 임성규는 민중교회와 지역교회의 중간 지대를 목회의 노선으로 추구하였다. 철저하게 지역주민과 함께하는 교회, 민중교회 정신을 가지고 지역주민을 섬기는 지역교회가 그의 목회철학이었다. 그래서 새아침교회는 지역사회의 영혼구원은 물론, 저들의 지역욕구를 해결하고자 노력했다. 민중교회가 노동자들만의 편인 것을 보완하는 철학이었고 구조였다. 개척 4년 만에 선교비를 끊고 자립을 선언했다. 재정의 십일조는 지역민을 위한 선교비로 지출하기 시작했다. 지역민들을 품고 목회를 하다 보니, 어떤 할머니는 추수감사절이나 크리스마스 등 절기에 교회에 나와 감사헌금을 드리곤 했는데, 임목사는 그것을 크게 나무랐다. 하나님께서 기쁨으로 받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나중에 그 할머니는 텃밭에서 가꾼 쌈채가 나면 조용히 교회 앞에 두고 가곤 했다.

새아침교회 목회 10년 차이던 2002년 방아골종합사회복지관장으로 초청이 있었다. 그는 크게 고민하였다. 내가 하고자 하는 목회와 복지기관의 일은 무엇이 다른가? 방식은 달라도 차이가 없다고 결론 내리고 2002년 목회를 병행하며 비상임 관장 일을 시작했다. 하루는 그의 아버지에게 전화가 왔다. 너는 NGO도 해보고, 사회복지도 했으니 길음교회의 후임으로 오면 어떠냐?” 한 주간 기도해 보고 대답하지요. 결국엔 “NO!”라고 답할 수밖에 없었다. 주변에서 큰 교회들이 아들에게 목회를 대물림하는 세습현상은 사회의 지탄을 받던 시절이었다. 혹자는 길음교회는 임성규의 목회지라고 권하는 선배도 있었으나 그는 아니요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아! 고맙다.”라고 화답했다. 45년의 목회지, 500여 명의 길음교회, 은퇴하며 누군들 아들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겠는가마는 역시 기도하는 목회자는 묻기는 했으되’ ‘아니오를 바랬던 속 깊은 목사요, 그에 부응하는 아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방아골종합사회복지관장에서, 가양5종합사회복지관 관장으로, 서울시복지재단 대표이사로

임목사는 복지관업무를 점점 알아갈수록 목회와의 병행이 어렵다고 판단했다. 작은 교회라 해도 강단에 설 때마다 준비되지 못한 말씀을 들고 설 때가 많았다. 결국 2004년 월, 12년간의 목회를 사임하고 전문적이며 실천적인 사회복지의 일선에 서게 되었다.

목회를 하다가 사회복지현장으로 나간 이유는 무엇일까?

저는 목회하면서도 지역사회와 함께하는 시민운동의 성격 하나와 지역빈곤자들과 함께한다는 의식을 늘 가지고 있었기에, 복지와 목회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여겨졌지요. 방아골종합사회복지관으로부터의 청빙도 복지관의 직원들의 함의에 의해서 였어요.”

특별하다. 그가 가진 목회철학의 실천이 복지관에서 하는 일과 다르지 않았으며, 이런 목회자라면 관장으로 오면 좋겠다는 공감대가 상호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방아골종합사회복지관에서 그가 한 일은 우선 직원들을 대상으로 사회과학서적을 읽도록 하고 공부시키는 일이었죠. 놀랍게도 잘 따라와 주었습니다. 주인의식 심어주기+주민조직화+시민운동 등을 연계하는 작업인데 이것이 당시에는 복지관에서는 하나의 혁신이었죠.”

그 후 줄곧 방아골종합사회복지관은 국내, 또는 서울시 평가에서 상위권을 달리는 우수사업장이 되었고, 그것이 모아져 얼마 후엔 신명 나는 지역복지 만들기라는 책(인간과 복지출판사)을 출간되었으며, 8주간의 실습과정에 참여하기 위해 전국에서 실습생들이 밀려들 정도로 많은 자원자들이 셋방을 얻어 까지 참여해 주었다. 방아골복지관의 임기가 끝나고는 기장 측이 운영하는 가양 5 종합사회복지관 관장자리 3)에 초청을 받아 3년간의 직임을 감당해 냈다. 책 출판 시 박원순(희망제작소소장)씨가 추천사를 써주어 서로 알게 되고 후일 서울시복지재단 대표이사(2012-16)의 일을 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끝으로 현장 복지관의 문제와 보람은 무엇인가?"

사회복지사들의 처우가 우선적으로 개선돼야 한다고 보고요. 2003 투쟁을 통해서 기초수급자들의 처우를 개선해 낸 점, 보조금을 확대한 점, 복지사와 클라이언트에서 갑을의 관계를 대등한 관계로 개선한 점 등이 보람이라고 하겠습니다.”

임성규 교수와 인터뷰를 하는 내내 그는 너무나도 신명 나게 말하고 있었다. 과거의 일이지만 오늘 이어지는 사역처럼 말이다. 사회복지현장 자기 영역에서의 자신감에, 확신, 기쁨, 사람의 마음을 파고드는 안목, 전문적 지식과 사고를 넘어 그 지식을 복지현장에 투사하는 진보적 인물이었음을 알게 된다. 어떤 이의 지식은 아카데미에 머물고, 어떤 이는 계속되는 공부 없이 현장에 매몰되고 마는데, 임교수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지역사회 관련 학위논문을 현장으로 끌고 가 지역사회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툴로 적극 활용해 낸 인물이라 본다. 지난 18년부터 3년간은 주택관리공단 사장(차관급)으로, 또한 대통령 직속 자치분권위원회 전문위원(20-22)으로 활동하였으며 현재도, 세종대학교의 공공정책대학원 외래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미주>

서울신학대학교 82학번, 사회사업학과 1, 신대원을 졸업하고 뒤이어 대학원, 선교대학원에서 선교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92년 새아침교회 개척하였다. 2002년 방아골종합사회복지관장, 2007년 서울복지시민연대 공동대표. 2009년 가양5종합사회복지관장, 2011년 서울시사회복지사협회 회장, 2012년 서울시복지재단 대표이사. 2018년 주택관리공단 사장. 2020년 대통령직속 자치분권위원회 전문위원. 2022년 세종대학교 공공정책대학원 외래교수

삼양동! 삼양동은 삼각산 남쪽 양지 바른 곳이라는 뜻에서 유래되었다. 삼양동은 1959년 서울시조례 개편으로 미아1, 2, 3동은 폐지되고 길음동, 인수동, 송천동과 함께 신설된 이름으로 서울 성북구 달동네의 대명사가 되었다.

가양5종합사회복지관 관장으로 갈 때는 기장내부적으로 시기질투가 많았다고 한다. 우리교단에 인물이 없어 성결교회 출신을 관장으로 부르냐고. 사실 그는 2011년 서울시사회복지사협회 회장에 출마할 때도 중앙대, 강남대, 숭실대 출신의 뿌리깊은 사회복지학과 출신 지식인 교수 현장 관장들의 시기 속에서 당당하게 당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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