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승훈 목사의 인물연구⓼] -김만효 전도사

글∙임승훈목사/서울신학대학교 신학박사, 더감사교회 담임, 위대한맘 대표
글∙임승훈목사/서울신학대학교 신학박사, 더감사교회 담임, 위대한맘 대표

 

우리는오직예수, 영혼구원의

열정으로 살았던

김만효 전도사님을

잊을 수 없습니다

김만효 전도사는 매우 독특하다. 한반도에서 기독교를 가장 먼저 접한 평안북도의 곽산이 고향이다. 선교사들의 정식 선교사역이 있기 전, 다시 말하면 조선정부의 허락이 있기 전에 만주 땅을 오가던 상인과 선비들에 의해 체득되고 알게 되어 자연스레 믿음이 전파된 특별한 조선 땅, 그 중심이 바로 서북지역 평안북도 곽산이다. 선교신학적인 말로하자면 학자들은 이것을 선교이전의 구도라고 한다.

그녀의 체구는 145정도의 단신이었으나 매우 당당하고 꼿꼿하여 여장부라 불리었다. 불혹(不惑)의 나이 시절부터 하얀 머리 휘날리며 거리를 활보하니, 오직예수, 복음전도, 영혼구령, 교회개척, 신앙우선의 열정을 가진 헌신의 사람이었다. 일평생 심한 이북사투리를 놓지 않았고, 목소리는 쩌렁쩌렁하였으며 이북에서 홀홀단신(忽忽單身) 월남하였기에 자신의 먹고 입고 살아가는 것에 거리낌이 없었다. 그래서인가 그녀는 어려운 교회를 우선으로 자원하여 목회하였고, 폐쇄된 교회나 이름뿐인 교회의 재건을 위해 힘썼으며, 골짜기 마을에 교회개척을 사명으로 알고 한평생을 달려 나아갔다.

 

남편의 출병과 전사소식 이후

그녀에게 결혼 8년차이던 1940(27) 청천벽력(靑天霹靂)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남편이 대동아전쟁에 징집돼 나갔는데 글쎄 1년도 채 안되어 전사했다는 것이다. 유골이 온 것도 아니고 우체부가 전해준 전사(戰死)를 알리는 쪽지 한 장이 전부였다. 심한 외로움에 몸서리를 쳤다. 철없이 보채는 두 딸아이들, 아들도 못 낳는 며느리라는 시어머니의 잔소리를 피해 그녀는 압록강 건너 만주 땅 심양에 살던 언니 집에 잠시 몸을 의지하였다. 실은 가출이나 마찬가지였다. 언니를 따라 매주일 교회를 같이 다녔지만 별재미가 없었다. 언어와 문화가 다른 중국인 교회였던 것이다. 몇 달이 지나지 않아 당시 조선과 만주를 내 집처럼 오가며 집회하던 유명 부흥사님이 강사로 오신다는 것이다. 주보를 보니 성결교회의 이성봉 목사님이었다.

처음 마주한 이성봉 목사님의 부흥회에서 김만효는 그만 성결의 은혜를 체험하였다. 뜨겁게 회개하고 새사람이 됨(회심)을 경험하였다. 날아갈 것 같은 이런 체험은 그녀가 모태신앙인이었지만 이제까지 예수를 믿으며 경험해보지 못한 순간이었다. 집회가 끝나고 일상으로 돌아오니 곽산에 두고 온 두 딸과 시부모님께 큰 죄를 지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급히 시댁에 돌아온 그녀는 시어머니에게 사죄하고 용서를 구하였다. 딸들을 보살피며 집안일을 다시 해나갔다. 그리고 주중에는 읍내 장거리를 오가며 매일처럼 전도하기를 반복하였다.

산사참배를 반대하다가 옥고를 치르다

일제 말, 신사참배를 강요할 때는 함께 반대하다가 담임목사님, 장로님과 함께 경찰서에 끌려가 모진 수모를 겪었다. 그녀의 시아버지도 장로였기에 한 가정에 두 명씩이나 수감되고 어린 두 딸을 둔 아녀자임이 참조돼 훈방되어 집에 돌아왔다. 주일이 되자 곽산읍교회는 담임목사님도 장로님들도 아무도 없는 일시적 지도자 부재상태가 되었다. 김만효는 강단에 올라 신사참배는 우상이라는 시국설교를 하다 잠복 중이던 사복경찰에 체포돼 10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 8개월여 만에 해방을 맞았다.

감옥 안에서는 매일 기도하고 다른 죄수들에게 전도를 많이 했는데, 내가 재봉틀 일을 잘한다니까 죄수들 옷 만드는 일을 시켰디요. 그런데 8개월 만에 해방이 되었수다. 할렐루야디요.”*1)

해방으로 석방돼 집에 돌아오니까, 두 딸 아이들은 시어머니를 잘 따르며 크고 있었다.감옥에서 나와 집에 오니까 내 아이들을 할머니가 키우고 있었디요. 나는 틈만 나면 개인전도를 하기 시작했디요.”*2)

 

전도자가 된 김만효

그 후, 짬만 나면 읍내에 나가 거리전도를 하다가 문득 말로만 듣던 서울을 구경도 할 겸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전도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였다. 한참 영적으로 뜨겁던 김만효는 이내, 경의선에 몸을 실었다. 그녀의 나이 32살의 일이다. 두 딸을 집에 둔 채로, 두 번째 가출인 셈이다. 경의선 3등 칸, 수많은 사람들이 만석이었고 서성이는 승객도 많았다. 앉아 있는 것을 보고는 가슴이 뜨거워지니 그녀 특유의 우렁찬 소리로 전도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전도메시지는 단순했다.

-“(거저), 예수 믿고 구원받읍시다. 일본은 예수를 믿지 않고 못된 짓 하다가 망했디요. 우리 나라도 예수 믿어야 좋은 나라가 됩니다.”*3)

-조선도 해방은 되었으나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내가 거저 예수를 믿고 보니 새사람이 되어 서울구경 갑니다만 예수 믿고 복음으로 똘똘 뭉쳐야 삽니다.”

-역사의 심판은 다시 오실 예수님께서 하실 터인데 악인은 지옥불로 선인은 천국으로 들어갈 겝니다.”(두 문단은 필자 구성)

그녀는 주변의 시선을 아랑곳 하지 않은 채 쩌렁쩌렁한 금속성 목소리로 3등 칸을 오가며 전도하였다. 사람들의 웅성거림, 서성거리던 사람들은 그녀의 전도설교에 조용해지고 말았다. 이 때문인가, 옆 칸에 있던 사람들 중 이성봉목사가 다가와 자기자리로 데리고 가 앉히더니 여러 가지 사정을 물으며 (이런 자매가 성결교단에서 꼭 필요한데...) 내년 4월 중순, 충정로 아현교회에서 교단총회가 있으니 꼭 와보라는 말씀과 함께 김만효에게 명함을 건네주었다. 이것이 그녀가 성결교회로 넘어오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김만효와 이성봉의 개인적인 첫 만남이다. 그녀가 5년 전 만주 심양교회 집회에서 은혜를 크게 받고 성결 체험을 하였을 때가 성결교회와의 첫 만남이었다면 이번 열차 안에서의 이성봉목사와의 만남은 성결교회와의 두 번째 만남이었다. 이 때 만주 심양교회 부흥회 이야기도 자연스럽게 말씀드렸다고 생각된다.

 

김구 선생 귀국환영회 석상의 즉석연설

서울에 오자마자 김만효는 남산이며 경복궁이며 볼만한 몇 곳을 두루 구경하였다. 그녀는 신문을 통해 여러 소식들을 접할 수 있었다. 김구 선생이 4511월 환국하였는데 정동감리교회에서 귀국환영회가 열렸다. 그녀는 한달음에 달려갔지만 이미 만석이 된 환영식장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가만히 있을 그녀가 아니었다. 기지를 발휘하여 내래, 이북 여성대표로 왔는데 왜 안 들여보내느냐!”고 호통을 쳤다. 경비원들이 순순히 그녀를 들여보내주었다. 김만효는 순서를 지켜보다가 이승만 박사의 축사가 있고 뒤이어 김구 선생의 답사가 이어졌다. 김구 선생이 답사를 하는 중에 그녀는 몸에 피가 끓어오르면서 온 몸이 떨려옴을 경험하였다. 한참 만에 손을 번쩍 들고는 내래, 이북여성대표로 왔는디, 나도 한마디 축사합시다.”라고 말했지만 사회자의 제지로 뜻을 이루지 못하는가 했는데, 광고시간에 이승만 박사가 일어나더니 아까 이북 여성대표로 축사하겠다는 분, 나와서 한 말씀 하시지요.’하는 바람에 하단에 나가 즉석 축사 기회를 얻었다.

우리나라가 좋은 나라가 되려면 사리사욕을 버리고 하나로 뭉쳐야 한다.”는 내용으로 연설했더니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았다. 이 일을 계기로 많은 유명 인사들을 알게 되었고 그들의 도움을 받아 여기저기 다니며 시국 강연도 하고 전도 강연을 하고 다녔다. 그녀의 강연은 주로 소학교에서 있었는데 시국 강연은 줄곧 전도 강연으로 끝을 맺었다. 결국 하나님 잘 믿어야 복 받는 나라가 된다는 식이었다.*4)

 

신학입문과 성결교회의 전도사가 되기까지

그 일이 있고난 뒤, 삼각지 연경신학교(교장 강신명)를 찾아가 상담 받고 입학하였다. 첫 학기에 김구 선생의 강연이 학내에서 있었다. 거기서 감동을 받고는 홀로 예수를 위해 헌신하기로 다짐하였다. 김구 선생의 여러 사람들이 내게 재혼을 하라고 합디다만 저는 조국과 민족을 위해 홀로 살아가리라 작정하였다.’는 말에 감동을 받은 것이다.

19464월 중순 열린다는 성결교단의 총회소식(신문광고)을 보고는 이성봉목사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애오개언덕의 아현교회를 찾아갔다. 이성봉목사는 교단총회 중이었지만 매우 반가워하시며 그녀를 맞아주었다. 이 목사님은 이명직, 최석모, 김창근, 박현명 등 교단의 지도자 8명에게 그녀를 소개하고는 즉석에서 문답을 하여 성결교의 특별 전도사로 임명하였다. 이런 경우는 성결교회에서 전무후무한 일일 것이다. 곽산 모교회도, 시댁의 교회도 장로교회다. 서울의 연경신학교도 장로교신학이었으나, 이성봉목사와의 인연을 계기로 성결교회 전도사가 되어 큰 족적을 남겼다.

 

김만효의 충청도 목회사역과 강화도 사역

1948년 삽교교회를 시작으로 역리교회, 예산교회를 재건하고, 목리교회에서는 담임교역자로서 모금을 크게 하여 교회를 건축하였다.*5) 김만효 전도사는 그 후 원주 호저교회, 충주 전원교회에서 목회하며 부흥을 경험하면서도 늘 강화를 잊지 않았다. 그의 나이 57세가 되던 1970년 정초 그의 발걸음은 강화도로 향한다. 한 달 전 개통한 강화대교를 지나면서 내 살아생전 열 개의 교회를 세우리라!” 강화제일교회를 시작으로 10년 만에 여섯 교회를 세워나갔다. 오해도 많았다. ‘감리교회의 텃밭에 성결교회라니...’, 그녀는 마지막 은퇴할 때까지 강화에 머물며 어려운 교회와 목회자들을 돌보며 계속해서 전도하였다. 제이교회, 제삼교회, 선두리교회, 고부교회가 모두 그녀의 작품이다. 1990년까지 김만효 전도사님은 살아생전에 4만여 명에게 복음을 전하였으며, 24곳의 교회를 돌보았고, 300여명의 결신자를 얻어 주님께로 인도하였다.

그녀의 강화도사역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강화는 그녀의 고향(평북 곽산), 이북 땅을 마주보는 지역이기에 늘 고향교회에 대한 향수와 통일 후 재건을 생각하던 곳이었다. 쇄국으로 문호가 닫혔던 강화에 내리교회 로스선교사에 의해 감리교회가 세워지고, 영국국교회(성공회)의 막강한 재정지원으로 10여개의 성공회교회당이 탄탄하게 입지를 다진 곳 강화를 생각하면서, 그녀는 강화 덕포리가 고향인 유숙화 권사와의 약속을 끝내 지키며 5곳의 성결교회를 세웠고 후학목회자들을 격려하였다. 초기 강화도 성결교회목회자들의 배고픔에 늘 마음 아파했다. 자칫 잊혀질 뻔 한 김만효의 기림은 추억을 넘어 강화역사박물관에 한 면을 장식하게 되었기에 다행으로 생각하며, 앞으로 그녀를 기념하는 책자와 함께 기념동산까지 세워지길 기대한다.

 

<미주>

1)「활천(活川)19877월호 p.22.

2)「활천(活川)19877월호 p.22.

3)「활천(活川)19877월호 p.22.

4)「활천(活川)19877월호 pp.22-23.

5) 송현교회에 도움을 청하니 황성주 담임목사께서 새벽제단에 세워줄테니 은혜를 끼쳐 모금해보라.’는 말씀에 밤새워 기도하고 말씀을 전하였다. 그때 은혜 받은 유숙화권사(당시 동인천경찰서장 부인)가 황목사님과 함께 아침 강사대접을 하면서 내가 목리교회 건축비를 댈 테니 나의고향 강화에도 성결교회를 세워 달라.”고 간청해, “그러마고 약속을 하니.” 당시 목리교회는 그 헌금으로 논 다섯 마지기(1천 평)을 마련하고 교회당을 건축하였다.

 

김만효 전도사 연보

1913.12.30. 평북 곽산에서 2대째 장로이며 부농인 김씨 집안의 셋째 딸로 태어나다.

1915(02) 유아세례를 받고 주일학교를 다니다.

1919(06) 3.1, 독립만세를 부르다 40여명이 죽은 곽산 학살사건이 일어나다.

1926(13) 관인소학교(초등학교)를 졸업하다.

1926(13) 여성도 공부해야 한다는 부모의 혜안으로 영창의숙(중학교 과정)에 입학하다.

1928(15) 주일학교 교사를 하며 설교하다.

1929(16) 영창의숙에서 매주 1회씩 예배하며 신앙훈련을 하고 졸업하다.

1933(20) 곽산읍교회 2대 장로 가문의 홍성도와 결혼해 딸 둘(영숙, 영옥)을 낳다.

1939(26) 군 징집영장이 나온 남편이 대동아전쟁에 끌려가다.

1940(27) 남편의 전사(戰死) 소식을 듣다.

1941(28) 만주 심양 언니 집에 머물며 신앙에 정진하다.

1941(28) 심양교회 부흥집회(강사 이성봉목사)에서 회개하고 성결의 은혜를 체험하다.

1942(29) 시가(媤家)에 돌아와 시모에게 용서를 빌고 두 딸을 키우며 읍내에서 전도하다.

1943(30) “주여, 나도 이성봉목사 같은 전도자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다.

1943(30) 신사참배 반대로 담임목사, 장로들이 체포돼 주일예배가 어려워지자, 주일강단에서 신사참배

는 우상숭배이라는 시국설교를 하다 체포돼 수감되다.

1944(31) 법정에서 5년 선고를 받자, “이 재판은 엉터리다. 참 재판은 예수께서 하실 것이다.”라고

외쳐 법정모독죄를 적용받고 10년이 선고돼 갖은 고초를 겪다.

1945(32) 복역 중에도 재봉 주특기가 있어 수인들의 옷을 만들며 복음을 전하고 예배하던 중 수감생활 8개월여 만에 해방을 맞다.

1945(32) 해방 후, 노방전도를 하며 서울에 가서 신학을 공부하고 전도자가 되겠다는 소망을 가지다.

1945(32) 서울행 경의선 열차 안에서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복음을 전하다, 극적으로 이성봉목사를 만 나 격려를 받고, 내년 4월 중순 아현교회 교단총회에 오라.’는 말씀과 함께 명함을 받다.

1945(32) 정동감리교회에서 열린 김구주석 귀국환영회에 나가 이북여성대표로 왔다며 즉석 축사를 하 고, 이승만박사, 김구주석 등 애국지사들과 교제하다.

1946(33) 삼각지 연경신학교(교장 강신명목사)에 입학하여 공부하던 중 교내에서 열린 김구선생의 강 연에 영향을 받고 홀몸으로 헌신을 다짐하다.

1946(33) 4, 아현교회에서 열린 총회에서 이성봉, 이명직, 최석모, 김창근, 박현명목사 등 8명에게 즉석 시취문답을 받고 성결교회 특별 전도사에 임명되다.

1947(34) 충남예산 삽교교회 전도사로 파견돼 교회재건에 힘쓰다.

1948(35) 충남예산 역리교회 재건 시 담임교역자로 많은 병자를 치유하니 교회가 부흥하다.

1950(37) 한국전쟁으로 온양에 숨어 예배드리다 다시 예산으로 돌아오다.

1953(40) 10년간 폐쇄되었던 예산읍교회를 재건하다.

1954(41) 원주 호저교회 제2대 교역자로 성장의 초석을 다지다(현 원주교회).

1961(48) 충남예산 목리교회 제3대 교역자로 건축계획을 세우고 모금하여 교회당을 건축하다 (현 한빛교회).

1968(55) 충주 대전리교회 제6대 교역자로 청년들에게 독립심과 기도생활을 강조하다(현 전원교회).

1970(57) 유숙화권사(충무교회 황우여장로 모친)와의 약속을 기억하고 남은여생 강화에 10개의 성결교 회를 세우겠다며 강화 덕포리로 향하다.

1970(57) 강화 제일교회를 개척하다(현 덕포교회).

1973(60) 강화 제이교회를 개척하다(현 두운교회).

1975(62) 강화 제삼교회를 개척하다(현 성산교회).

1977(64) 강화 선두리교회를 개척하다.

1978(65) 강화 고부교회를 개척하다.

1990(77) 강화읍에 용정교회를 개척한 뒤, 선두리교회에 적을 두고 계속 전도하러 다니다.

2003(90) 913, 호주에 이민 가서 정착한 외손녀(둘째 홍영옥의 딸)에게 머물던 중 소천하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본헤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