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승훈목사의 인물연구⑥] -황성주 목사

글∙임승훈목사/서울신학대학교 신학박사, 더감사교회 담임, 위대한맘 대표
글∙임승훈목사/서울신학대학교 신학박사, 더감사교회 담임, 위대한맘 대표

황성주는 191275일 충북음성에서 부친 황동원과 모친 고귀원 사이에 맏아들로 태어났다. 부친은 그의 항렬 용()자를 따라 용주라 이름 지었다. 부친을 따라 그가 7살이 될 무렵 김천으로 이사하니, 그는 김천초등학교를 나왔다. 김천에서는 어머니를 따라 황금동교회 주일학교를 다녔다. 초등학교는 겨우 졸업하였지만 집안 형편상 진학을 할 수 없게 되었다. 2살이 어린 동네 친구 여일심 등과 어울리며 세상의 길로 나아갔다. 나쁜 길로 가는 데는 둘이서 그렇게도 손발이 잘 맞을 수가 없었다. 여름철 배가 고프면 아랫마을 과수원에 들어가 서리 해 먹었다. 심심하거나 답답한 날이면 김천 역사(驛舍)에 숨어들어 대구나 대전까지 무임승차로 오가며 별난 짓을 다하는 악동들이었다.

그는 예능에 소질이 있었다. 용돈이 생길 때마다 성주와 일심은 극장에서 영화(무성연화)와 연극 보기를 좋아하였다. 그의 꿈은 배우가 되는 것이었다. 영화를 보던 중 나발 부는 모습에 반해서 용돈을 모아서는 나발을 사서는 날마다 연습을 해댔다. 그때부터 더욱 배우 흉내를 내면서 뻔질나게 극장엘 들락거렸다. 때로는 시나리오를 쓰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아마추어 연극배우노릇도 하는 등 배우에 대한 그의 집념은 강하였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를 그냥 놓아두지 않았다. 그가 19살이던 여름철 어느 날, 당일에도 친구 일심과 함께 영화를 보러 김천극장으로 가는 중이었다. 번화한 시내 중심가에서 북소리가 들리고 몇 사람이 모여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들은 호기심에 구경꾼들 틈에 끼어들었다. 때를 놓치지 않고 전도자는 두 청년에게 다가왔다. 자신들을 소개하더니 구원의 복음을 전하고는 무작정 남산동교회(김천남산교회)로 이끌고 갔다. 마침 부흥성회 중이던 터라 구원의 초청에 손을 들었고 다음날 새벽기도회를 참여하면서 용주의 인생은 180도 바뀌게 되었다. 곧 학습을 받고 같은 해 12월 세례를 받았다. 주일학교교사로 봉사를 시작했다. 1932년이니 용주의 나이 20살 때의 일이었다.

21살이던 338, 십자군전도대의 천막집회가 김천에서 열린다는 목사님의 광고를 접하였다. 저녁 예배 후, 비슷한 또래의 청년 7명이 의기투합하여 이번 집회에 은혜를 받기 위해서는 먼저 기도를 해야 한다며 지하 기도실에서 뜨겁게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새벽 2시경에 그는 회개의 기도가 터져 나왔다. 멋으로 알고 했던 모든 장난이 불의한 죄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가슴을 치고 울면서 회개하였다. 7명이 모두 회개하며 통곡하는 중에 용주는 중생의 거듭남을 체험하였다.

집에 돌아가 어머니께 무릎을 끊고는 불효를 용서해달라고 빌었다. 친구들을 찾아가 빌렸던 돈을 계산하여 돌려주었으며, 또 과수원에 가서는 주인에게 과거 이집에서 과일 도둑질한 것을 말하고는 용서를 빌며 값을 지불하였다. 김천역장을 찾아가서는 소년 시절 6번에 걸쳐 무임승차한 것의 용서를 구하고 대금을 변상하였다. 얼마 후 열린 집회에서 황용주를 비롯한 여일심 등 7명의 청년들은 큰 은혜를 경험하고,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확신하게 되니, 기도와 성경읽기에 더욱 힘쓰게 되었다. 이때부터 용주는 자신의 이름 용()자가 마귀를 상징하는 것임을 깨닫고는 거룩할 성()자로 바꾸게 되어 황성주란 이름으로 개명하였다.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성청운동의 창시자

1934121일 저녁9*1), 황성주를 비롯한 은혜 받은 7명의 청년들이 모여들었다. 때는 일경의 감시가 호시탐탐 노리는 시절이다. 모임을 만들어 하나님의 일을 더욱 열심히 해보기로 결단하였다. 모임의 이름은 성결교회의 벗이라는 이름의 성우청년회(聖友靑年會)’. 이들은 기도와 봉사, 그리고 전도를 열심히 하여 남산교회를 부흥시키는 데 일조하였다. 7인의 이름은 황성주, 여일심, 안계완, 이기창, 이상윤. 신태영, 조용수가 바로 그들이다. 이 조직이 발전하여 몇 해 후에는 성청전국연합회가 되기에 이르렀다.

 

인성 덕성 영성의 목회자

황성주목사는 대구봉산교회 전도사를 시작으로 신수동교회에서 전도사로 사역하였고, 김천교회, 수정동교회, 인천송현교회를 거치면서 풍부한 인덕을 베푸는 성자 같은 목회를 하였다. 한국전쟁으로 한반도가 전쟁에 휩싸이니 모든 사람들이 반도의 끝자락 항구도시 부산으로 몰려들었다. 부산이 떠내려갈 지경이었다. 마침 그가 수정동교회 담임시절이다. 수정동교회 역시 인산인해를 이루었지만 짜증 한번 내는 일없이 사택과 교회, 기도실, 예배실 등은 물론 장로들을 설득하여 피난 중인 서울신학교 교수들, 목사들, 교단의 지도자들을 모두 포용하였다.

필자가 청소년기 목도한 황성주목사는 신앙의 태산과도 같았다. 수많은 후학들이 그의 뒤를 따라 신학에 입문하였다. 신학교에 입학하면 교파를 가리지 않고 장학금을 주어 공부케 하였다. 개척교회의 목회자들이 수없이 송현교회의 문을 두드렸다. 그들이 도움을 호소할 때마다 흔쾌히 강단을 내주었다. ‘자네가 성도들을 감동시켜 모금해가란 의미였다.’ 성도들에게는 늘 개척교회 선교후원에 헌신하도록 독려하였다. 그의 지도와 그늘 아래서 수많은 목회자들이 나왔다. 신석우, 장준철, 김영모, 최세걸, 김정봉, 강영주목사는 물론 송목회라 하여 모이는 송현교회 출신 목회자만도 40여명에 이르니, 그의 인성, 덕성, 영성목회에 영향 받은 바 크다.

 

교단과 교회를 사랑한 목회자

그가 경성신학교를 졸업하고 목회한 1945-1979년 은퇴할 때까지 34년 동안, 교회개척은 33교회에 이른다. 김천남산교회에서 2교회를 개척하고, 부산 수정동교회에서는 9교회를, 인천 송현교회에서 14교회를 개척하였다. 그 외에도 교회세우기는 계속되어 서울에서 1교회, 미국목회 중 3교회, 기타 4교회에 이른다. 대표적인 교회로는 인천 석남중앙교회, 서울 강남교회가 그의 작품이다.

좌측 아랫줄 화살표시가 황성주 목사 출처 :https://blog.daum.net/ds1cbw/339
좌측 아랫줄 화살표시가 황성주 목사 출처 :https://blog.daum.net/ds1cbw/339

뿐만 아니라 그는 교단이나 교계와 지역사회가 자신을 필요로 할 때는 아낌없이 헌신하며 참여하였다. 50대 중반 인천지역복음화위원회 위원장을 시작으로 외항선교회장, 동부경찰서 경목회장, 유지재단 이사,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총회장, 서울신학대학 이사장, 동북아신학교협회 국제대회장, 인천시기독교연합회장, 아세아성결연맹부회장, 인천시70만복음화위원회 위원장 등 큼직한 직함들을 잘 소화하였다. 이 모든 것은 맏아들(영삼)이 약대를 나오고 개업 하루 전에 연탄가스 사고로 아들을 앞세운 뒤의 일이다.

 

가족목회의 승리자

황성주는 22세 때에 김수월 씨와 결혼하여 슬하에 11남매를 두었다. 딸을 내리 다섯을 낳았고 이어 아들과 딸을 여섯이나 더 얻었다. 다복하였다. 아들들은 셋이 목사인데, 셋째 영근은 미국에서 목회하며, 넷째 영진은 엘살바도르 선교사로 헌신하고 있다. 다섯째 사위(박수복목사)와 여섯째 사위(김광수목사)가 미국에서 성공적인 목회를 하고 있다. 자녀가족 중에 목사가 6, 장로가 4명이며, 집사1명이다. 1979년 송현교회 은퇴 후 황성주목사는 미국에 이민하여 요세미티광야기도원을 세우고, 목회수기 나의 나 된 것은을 발간하며 왕성하게 활동했으나 이민 17년만인 19961118, 요세미티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천국에 입성하였다.

<미주> *1) 어떤 자료에는 125일이라 기록되기도 하였으나, 황성주목사가 직접 쓴 김천교회 성우회의 활동기(1937년 제3)에 의하면 21일 저녁 9시라 밝히고 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늦은 시간에 모임을 열었을까? 그것도 정월 해가 일찍 떨어지는 한겨울인데 말이다. 일경의 눈을 피하기 위함이 아닐까 짐작해본다. 실제로 성우회모임과 관련하여 경찰에 끌려가 문초를 당한 적도 있다. 그는 담대히 교회봉사와 복음의 확장이라는 순수 종교적 목적을 피력하여 김천경찰서장에게 허락을 받은 바도 있다.

 

연보(年譜)

* 1912. 7. 5 충북음성에서 출생하다. 어린 시절 이름은 용주(龍周)였다.

* 1919(07) 경북 김천으로 이사하다.

* 1927(15) 김천보통학교를 졸업하다.

* 1933(21) 8, 거리전도대에 이끌려 여일심과 함께 남산교회 김응조목사의 부흥집회에

참석하여 은혜를 체험하다.

* 1933(21) 8월 김천 남산동교회(현 남산교회) 입교하다.

* 1933(21) 9, 이름을 황성주(黃聖周)로 바꾸다.

* 1933(21) 12월 김천 남산동교회에서 세례 받다.

* 1934(22) 집사로 임명받다.

* 1934(22) 121, 저녁 9, 성우(聖友)청년회 발기인 총회를 열다.

황성주, 여일심, 안계완, 이기창, 신태영, 이상윤, 조용수 7인이 중심이 되어 성청활동 중에 다수교회, 광천교회, 태촌교회, 조마교회, 신안교회, 구미교회를 개척하다.

* 1934(22) 86, 김수월씨와 결혼하다.

* 1938(26) 1, 대구 봉산동교회 자원봉사 전도사로 사역하다.

* 1940(28) 3, 경성신학교에 입학하다.

* 1940(28) 4, 서울 신수동교회 신학생 전도사로 사역하다.

* 1943(31) 53, 일제의 탄압, 본 교단교역자 검거 때 용산경찰서에 투옥되다.

* 1944(32) 경성신학교를 졸업하다(4).

* 1945(33) 10, 김천남산교회 담임교역자 청빙 받다.

* 1945(33) 1125, 목사안수 받다.

* 1947(35) 11, 부산 수정동교회 담임목사 청빙 받다(11년 시무).

* 1953(41) 영남고등성경학교 설립 및 교장 역임하다.

* 1953(41) 1, KNCC부회장 역임하다.

* 1958(46) 인천 송현교회 담임목사 청빙 받다(21년 시무)

* 1965(53) 5, 예수교대한성결교회 제3회 총회장 당선되다.

* 1965(53) 예성, 기성 합동총회에서 부총회장 당선되다.

* 1966(54) 인천지역복음화위원회 위원장 피선되다.

* 1966(54) 외항선교회 회장, 인천 동부경찰서 경목회장 피선되다.

* 1966(54)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유지재단 이사 피선되다.

* 1967(55) 56,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제22회 총회장 당선되다.

* 1967(55) 서울신학대학교 이사장 피선되다.

* 1967(55) 11, 동북아신학교협회 국제대회장 피선되다.

* 1969(57) 인천시기독교연합회장, 아세아성결연맹부회장 피선되다.

* 1972(60) 인천시70만복음화위원회 위원장 피선되다.

* 1974(62) 송현성결교회 성전 건축하여 헌당하다.

* 1974(62) 서울신학대학교 이사장에 피선되다.

* 1975(63) 경기 평신도신학교 설립 및 교장 역임하다.

* 1976(64) OMS국제대회 부회장 역임하다.

* 1977(65) 김수월사모 소천하다.

* 1979(67) 송현교회 원로목사 추대 후 곧 도미하다.

* 1985(75) 미국 요세미티광야기도원 설립(원장)하다.

* 1987(77) 310, 목회40년 기념회고록 및 성지순례기 나의 나 된 것은을 출간하다.

* 1988(78) 2, 헤이워드제일교회 창립하다.

* 1988(78) 825, 세계 살롬선교회 창립 및 총재에 취임하다.

* 1996(84) 1118, 요세미티광야기도원에서 기도와 명상으로 보내던 중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다.

* 2018 서울신대인상을 그의 친구 여일심과 함게 공동수상하다.

 

가족사항

장녀 : 황영자권사/고 김영희장로

차녀 : 황정자사모/유영국목사

삼녀 : 황인자권사/이동복장로

사녀 : 황경자권사/김정수장로

오녀 : 황신애사모/박수복목사

장남 : )황영삼

차남 : )황영대목사/안명자사모

삼남 : 황영근목사/설현숙사모

사남 : 황영진목사/이은숙사모

육녀 : 황영옥사모/김광수목사

오남 : 황영만장로/조연순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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