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현대교회의 영성에 현기증을 느끼고 있다. 왜 일까?

이집트를 관통하는 생명의 젖줄 나일강의 길이는 1500이다. 나일강은 아프리카에서 발원하여 이집트의 수도인 카이로를 지나 지중해로 빠져나간다. 우리 일행은 카이로에서 침대열차를 타고 밤새도록 달려 룩소에 도착했다. 열차는 나일강 주변을 따라 연결되었고 나일강 주변을 중심으로 도시와 농촌이 형성되었다. 사람들은 생명의 젖줄인 물옆에 모여 수천년의 삶을 이어왔다. 사막 한 가운데서 문명을 꽃피우고 대를 이어 살수있었던 힘과 원동력은 마실물과 농사지을 물이 풍부했기 때문이다. 사막이라는 악조건속에서도 물옆에 있으면 부족함이 없었다. 모든 것을 가능하게 했다. 사막 한가운데 거대하게 흐르는 나일강의 물은 나에게 단순한 물이 아니었다. 밤새도록 기차를 타고 내려가면서 유리창에 비치는 나일강과 주변에 형성된 마을의 모습은 나에게 신선한 충격이었고 영감을 불어넣어주기에 충분했다.

성경에 예수님은 나를 믿는자는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말씀하셨다. 삶의 질곡이 있다할지라도 예수님을 나의 구원자로 믿는다면 우리의 환경에 생명의 역사는 흘러간다. 물을 떠난 생명체들이 살아남지 못하는 것처럼 생명의 주님을 떠난 사람도 살지 못한다. 그러나, 예수님께 붙어 있으면 가지는 죽지 않고 많은 열매를 맺는다. 가지의 사명은 붙어 있는 것이다. 나일강의 물을 보고 주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주님, 일생동안 주님의 언저리에 머물러 있겠습니다. 그것이 최고의 복인 것을 다시 되새겨보았다.

아스완은 이집트의 휴양도시이다. 도시 건너편에 중세 수도사들이 머물고 있던 수도원이 있다. 쪽배를 타고 건너가는 재미는 긴여행으로 지친 우리의 몸에 쉼이라는 안식을 주기에 충분했다. 수도원은 황폐한 건물로 세월의 먼지를 뒤집어 쓴 채 모래언덕위에 우뚝 버티고 있다. 수도원의 건물은 토담집처럼 소박했다. 수도사들은 일생동안 이곳에서 모래와 흙과 바람과 태양과 함께 살았다. 그들이 거처하는 방은 3-4평 정도인데 흙벽돌로 침대를 만들었고, 침대위에 벽돌을 파낸 작은 공간은 한 두벌 정도만 겨우 넣을 수 있는 개인 사물함이었다. 그 방에서 6명 정도가 함께 생활하였다. 혼자사용하기에도 좁은 방에서 그들은 평생 순례의 생활을 한것이다. 절제와 검소함과 겸손함과 거룩성의 모습들이 시대를 깨웠고 사람들에게 영혼의 안식을 전해주기에 충분했다. 누군가에게 삶의 모습을 통해 마음의 고향을 느끼게 해줄수 있다면 그 사명을 다한것일 것이다. 수도원의 복도와 방에는 세 개의 구멍이 있었고 그 구멍을 통해서 햇살과 바람이 내부로 들어왔다. 세개의 구멍은 단순한 창문이 아니라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수단이었다. 그 창문을 통해 삼위일체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았고 믿음을 고백했고 자신의 존재와 사명을 되새기는 통로가 되었다.

수도사들의 삶과 청교도인들의 삶은 너무도 닮았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시대가 달라도, 그들의 공간이 달라도 한결같은 일치점이 있다. 청교인들의 삶의 모토는 꼬람 데오”(Coram Deo), 하나님의 존전” 앞에서 이다. 이들은 하나님앞에 서 있기에 그들의 삶은 세속인들의 가치관과 확연히 다른 윤리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청교도인들은 삶의 자리에서 정직과 근면과 절제의 자세로 살았다. 청교도인들의 정신이 후손들에게 적지않은 영향력을 주고 있다. 하이 터치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수도사들과 청교도인들의 삶을 그리워하고 있다.

최원영목사. 본푸른교회, 본헤럴드대표
최원영목사. 본푸른교회, 본헤럴드대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현대교회의 영성에 현기증을 느끼고 있다. 왜 일까? 본질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정직이 최상의 청책이다“(Honesty is best policy)라는 말이 있다. 수도사와 청교도인들은 신앙과 삶이 하나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얼굴과 눈동자앞에서 서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살았기 때문이다. 이 시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본주의 4.0 시대를 열어야 한다고 외치고 있다. 교회의 4.0 시대는 무슨 그릇을 준비해야 하는가? 수도사와 청교도인들의 삶에서 배워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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