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희 목사의 CDN 성경연구】 (157) 제단(Altar)

 

NC. Cumberland University(Ph.D.), LA. Fuller Theological Seminary(D.Min.Cand.) , 총신대학교 일반대학원(Th.M.), 고려신학대학원(M.Div.), 고신대학교 신학과(B.A.), 고신대학교 외래교수(2004-2011년), 현)한국실천신학원 교수(4년제 대학기관), 현)총회신학교 서울캠퍼스 교수, 현)서울성서대학 교수 현) 평안의교회(서울서부노회) 담임목사
NC. Cumberland University(Ph.D.), LA. Fuller Theological Seminary(D.Min.Cand.) , 총신대학교 일반대학원(Th.M.), 고려신학대학원(M.Div.), 고신대학교 신학과(B.A.), 고신대학교 외래교수(2004-2011년), 현)한국실천신학원 교수(4년제 대학기관), 현)총회신학교 서울캠퍼스 교수, 현)서울성서대학 교수 현) 평안의교회(서울서부노회) 담임목사

구약성경에서 제단은 제사를 거행하고 제사장직을 수행하는 자리다. 그리스도교도 제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히브리서에서 우리의 눈길을 끄는 새로운 사상이다. 저자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관련하여 제단이라는 용어를 이전에는 사용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용어를 히브리서에서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 사역과 관련한 제의적 언어의 사용에 관한 유추에 근거하여 해석할 수 있다. 칼빈(Calvin)은 제단을 제물희생을 의미한다고 한다. 그리고 장막은 장막에 딸린 모든 외부적인 상징으로 이해한다.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에 국한할 경우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제단이 없다. 그러나 히브리서는 제단과 상관없다고 선언하지 않고 그리스도인들에게 제단이 있다고 말한다. 이 제단은 믿음을 통해서만 분명해진다. 저자가 말하는 제단은 문자 그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제사를 드렸던 제단은 죄를 위해 그리스도가 죽으신 더 좋은 제단을 가리킨다. 하늘의 성소에 실제로 제단이 있음을 말하는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히브리서는 결코 하늘 제단을 말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제단이 있다는 저자의 반응은 성격상 신조적이다.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신다’,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다는 고백 진술을 반향한다. 제단이라는 말은 제사에 대한 환유로 사용되고 있다. ‘제단장막보다 더 큰 의미를 갖는다. 왜냐하면 제단은 영원한 분, 영속적인 분의 약속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자는 현실과 뚜렷한 관계가 있다. 후자는 종말론적이고 영적인 긴장을 없애버린다. 그림자 개념으로 된다. 후자는 절대적이지 않다. 그것은 세상의 장막이다. 하늘의 성소가 아니다.

 

1. 그리스도인의 제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다

저자는 히브리서를 마무리 지으면서 그리스도의 제사에 그 구심점을 두고 강조한다. 그리스도의 제사는 속죄일에 드렸던 제사의 원형이다. 저자는 다시 한 번 속죄일의 의식을 기초로 사용하여, 그리스도의 제사에 관심을 기울인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분명히 물질적인 것이 아닌 영적인 것으로서의 참된 제사를 드린다. 히브리서는 제단이라는 용어를 성소에서 속죄일에 영문 밖에서짐승을 제물로 태우는 장소로 옮기고 궁극적으로는 성문 밖에서당한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옮기기 위해 환유법을 사용한다. 우리에게 있는 제단은 예수님이 자신을 희생하신 십자가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 제단이 선물이며, 속죄일에 드린 대제사장의 제사는 그 그림자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공동체는 골고다에 모이기보다 그리스도의 자기희생에 관한 선포를 위해 모임으로써 이 제단에서 만난다.

이 제단에서 먹다는 것은 희생제사에 참여하는 것에 대한 비유적 표현이다. 예루살렘 제단에서 먹는 행위는 그 음식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제단에서 발생하는 몫을 가져다주었다. 옛 제의의 지지자들이 제단에서 먹을 권리가 없다는 선언은 그들이 골고다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나눌 수 없다는 것을 확증한다. ‘제단이라는 말은 봉헌하고 봉헌된 제물을 나누어 먹는장소들과 유형론적 관계가 있다는 것은 당연하다. 독자들은 옛 언약의 음식들을 통해 힘을 얻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 우리에게는 짐승을 받쳤던 제단보다 더 나은 제단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제사는 십자가 위에서 드려졌다. 그러므로 이것을 제단으로 말하는 것은 합당하다. 저자가 여러 곳에서 자주 언급한 바와 같이, 그리스도교에 있어 제사는 십자가 위에서만 이루어진다. 유월절에 유대인들이 제단에서 나온 것은 물질적인 음식이지만, 그리스도교 제단에서는 그리스도 자신이 나온다. 이 차이가 저자에게 명백하고 심오한 영향을 주었다.

그리스도교에 있어 제사는

십자가 위에서만 이루어진다

 

모세의 제도 아래서 제사장들은 일정한 짐승 제물의 살코기와 소제물을 자신들의 양식으로 삼을 권리가 있었다(7). 그러나 레위기 14:1 이하에 기술된 속죄 제물 같은 것과 속죄일에 드리는 속죄제물(16)은 그들이 먹을 수 없었다. 그들은 이 땅의 장막에 참여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제단에서 먹을 권한이 없다. 그들은 구시대를 살고 있고 여전히 옛 언약의 제단에서 먹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반면 그리스도인들은 더 나은 제단에서 먹는다. 우리는 모두 왕 같은 제사장들이다(벧전 2:5). 참되고 완전한 속죄제물이신 그리스도의 제물을 나누어 먹을 권리가 있다. 이 특권이 레위 제사장들에게는 없다. 왜냐하면 이날에는 속죄제물의 육체를 영문 밖에서 완전히 불살라 버리기 때문이다 제단에서 먹을 것을 금함은 레위기 16장에서 제시된 것처럼 매년 일차 속죄일을 위한 율법의 규정과 관련이 있다. 저자는 레위적 조항과 예수님이 영문 밖에서 죽임을 당했다는 사실 사이에 상응하는 것을 발견한다.

저자는 우리에게 제단, 즉 그리스도의 제단은 그분의 제단에서 먹는 것이 옛 언약의 음식과 제단보다 더 나은 것을 보이는 가운데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예수 그리스도의 왕적 대제사장을 다시 한 번 새롭게 묘사하고 있다.

유대교와 Greco-Roman 저자들은 제사가 도덕적 행위를 대체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일부는 도덕적 행위가 동물 제사보다 우월하다고 여겼다. 히브리서는 기도나 다른 이들을 섬기는 일을 제사라고 말한다. 예수님은 하늘 성소에서 섬기는 대제사장이시다. 그분은 거기에서 우리를 대표한다. 예수님께서 그 길을 여시고 우리를 인도해 들이신다. 승천하신 왕적 대제사장으로서 그분은 무한한 신적 능력으로 모든 것을 하신다. 성소의 섬기는 자로서 그분은, 모든 면에서 그 형제들과 같이 되신 것과 온갖 동정과 인내로 일하신다. 그러므로 신자들 자신은 하나님의 보좌 바로 직전 성소 자체에 들어가는 방법과 어울리는 일종의 제사장적 섬김을 실천할 것을 요구받는다. 이 제사장 섬김은 예식과 예식적 봉사뿐이었지만 이제부터는 매일 서로 사랑하고 격려하고 도와주는 활동을 포함한다. 청중의 제단은 그들이 그리스도를 통해 찬송의 제사와 다른 사람들을 위한 선행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존재한다. 저자는 우리에게 있는 제단장막에서 섬기는 자들은 제사장들뿐만 아니라 장막예배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을 가리킨다.

 

2. 흔들리지 않는 나라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왕같은 제사장들

저자는 독자들이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다고 말한다. 그는 바로 이것에 의지하여 그들에게 두 가지 권면을 한다. 하나는 감사요 다른 하나는 예배. 사실상 이 둘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대한 감사는 참된 예배의 핵심적인 구성 요소이기 때문이다. 마이클(Michel)은 앞 장에서 전개된 설교와 마지막 장의 생활률적 격언 사이의 내적인 연관성을 강조한 스티크(C. Spicq)의 견해를 지지한다. 스티크에 따르면 새로운 제사장직은 일상생활에서 특정한 의무를 이행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왕노릇하며 이에 대한 응답으로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기는제사장 직무를 행함으로써 은혜를 받아야한다. 다수의 유대 저술가와 마찬가지로 히브리서 저자 역시 예배에 합당한 태도에 관해 말하면서 제사법의 언어를 비유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히브리서 13:15-16은 신자의 제사장 직무도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하나님께 찬송의 제사”, 입술의 열매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인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는삶을 포함한다고 말한다. 이런 제사장적 삶의 방식은 옛 땅 위에 영구한 도성이 없으므로 장차 올 완전한 형태의 도성을 찾는자들에게 적합하다.

하늘로부터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과 새 언약의 결과로 일어나는 일이 바로 하늘과 땅의 진동과 변화이다. 그리고 이러한 진동과 변화는 하나님의 통치를 동반한다.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은 것은 우리의 왕이 하나님이시며 그분의 나라가 영원하기 까닭이다. 머레이(Murray)는 우리의 왕이며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의 다스림은 현재에서조차 우리의 영혼 안에서 무궁하고 쇠하지 아니하는 생명의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으로써, 이것을 수용하는 믿음은 그것을 경험할 것이라고 말한다.

흔들리지 않는 왕국을 받은 우리는 은혜를 누려야 한다. 그리고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겨야 한다. 쾨스터(Koester)섬기다를 모든 예배자들에게 적용시킬 수 있기 때문에, 장막을 섬기는 규정이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관련시킨다. 이 모두가 유대교 관례의 일부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히브리서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을 희생시켜 유대교 관례를 확고히 하려는 움직임에 대한 경고일 수 있다.

흔들리지 않는 나라에서 왕같은 우리가 섬기는 것은 제사장의 직무다. 섬김은 제사장의 직무 일반을 의미한다. 제사장의 직무를 표현하는 제의적 찬양을 뜻한다. 제사장들이 예배자들을 위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던 것처럼, 왕같은 제사장들인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찬양을 드린다. 다윗은 시편 27편에서 제사장적 예배와 찬양을 드린다: “내가 그의 장막에서 즐거운 제사를 드리겠고 노래하며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시27:6b)

섬기다(라트루오)는 옛 언약의 제사장적 섬김에 사용되는 전문 기술 용어다. 그리스도교 예배(service)는 성막 예배의 영적 성취라는 점을 암시한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환대하고 옥에 갇힌 이들과 고통당하는 자들을 돌봄으로써 다른 이들을 섬기는 일을 포함한다. 베드로는 교회의 구성원을 왕같은 제사장들거룩한 제사장들로 표현하며 그들의 임무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리는것이라 말한다(벧전 2:5, 9). 히브리서는 하나님이 짐승을 드리는 제사로 기뻐하지 않으시며 찬양과 섬김의 형태로 나타나는 순종이 그를 기쁘게 한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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