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희 목사의 CDN 성경연구】 (160) 아들(Son)

 

NC. Cumberland University(Ph.D.), LA. Fuller Theological Seminary(D.Min.Cand.) , 총신대학교 일반대학원(Th.M.), 고려신학대학원(M.Div.), 고신대학교 신학과(B.A.), 고신대학교 외래교수(2004-2011년), 현)한국실천신학원 교수(4년제 대학기관), 현)총회신학교 서울캠퍼스 교수, 현)서울성서대학 교수 현) 평안의교회(서울서부노회) 담임목사
NC. Cumberland University(Ph.D.), LA. Fuller Theological Seminary(D.Min.Cand.) , 총신대학교 일반대학원(Th.M.), 고려신학대학원(M.Div.), 고신대학교 신학과(B.A.), 고신대학교 외래교수(2004-2011년), 현)한국실천신학원 교수(4년제 대학기관), 현)총회신학교 서울캠퍼스 교수, 현)서울성서대학 교수 현) 평안의교회(서울서부노회) 담임목사

히브리서 저자는 칠십인역에 정통해 있었다.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에 대한 교리를 가르치기 위해 그는 시편을 택했다. 왜냐하면 각 지역의 회당들에게 시편들을 불렀기 때문이다. 그들이 손쉽게 사용할 수 있는 구약성경이 없었기 때문에 예배자들이 시편을 암송해야만 했다. 따라서 히브리서 첫 장에 시편에서 인용한 부분들이 상당히 많다. 저자는 시편을 인용할 때 특정한 저자를 한 번도 언급하지 않는다. 또한 기록되었으되라는 형식적인 문구를 통해서 인용하지도 않는다. 성경은 인간 저자가 쓴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이다. 선지자를 통해 여러 모양과 부분으로 말씀하신 것을 기록한 것이다. 인간 저자는 간접적으로 한 번 언급된다. “누구인가가 어디에서 증언하여 이르되”. 이를 통해 이 구절이 저자에게 얼마나 사소한 것이었는지가 드러난다.

히브리서에는 모두 약 36개 정도 되는 인용문 가운데서 3분의 2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으로 되어 있다. 네 번은 그리스도가 말씀하신다. 한 번은 심지어 누구인가가 어디에서 증언하여 이르되라고 소개말을 달고 나타난다. 그러한 수사학적 기교는 아마 저자가 인용의 출처를 모르기보다 인간의 증거보다 오히려 그 증언 자체가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다.

 

1.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으신 왕이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나라라는 개념은 다윗의 나라와 결부되어 있다. 다윗의 보좌는 하나님의 보좌로 불리었다. 하나님은 다윗을 선택해서 그에게 기름을 부으셨다. 다윗 왕조의 왕이 즉위하면, 야훼는 그들을 아들로 양자 삼는다. 이는 가나안 통치자들과의 엘의 부계 관계를 되새긴다. 역대기 저자들은 야훼와 다윗 왕조의 밀접한 유대관계 때문에 다윗의 왕좌를 하나님의 왕국으로 지칭할 수 있다.

구약에서 다윗의 뒤를 잇는 왕과 야훼와의 특별한 관계는 왕에 대한 시편들에 잘 나타난다. 예를 들면 시편 2편에서 왕은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이고(2:2), 하나님의 양자이다. 메시야에 대한 여러 인용 구절이 다윗 왕조에게 적용되어 왔다는 것이 눈에 띈다. 그리고 이 시편들이 기타의 것들 중에서 아마 예루살렘 성전에서 사용된 대관식의 시편들이라고 언급되면서 이것이 시편에서 최초의 언급이라는 것은 많은 현대 학자들이 고찰한 견해이다.

저자는 히브리서를 여는 첫 단락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으신 왕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초기 그리스도교에서 흔히 사용된 일련의 인용문들을 시작하고 마무리한다. 서언에서 아들의 초월적인 신성에 관한 고백은 시편 2편과 시편 110편에 대한 암시로 구성되어 있다. 이와 동일한 고백적 구조가 일련의 인용에 분명히 들어 있다. 시편 2:8로부터 우리는 시편 본문이 법률적 권리를 강조하지 않고 점유의 권리를 강조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히브리서에서도 상속이라는 개념은 장소와 시간에 의해 한정되는 성격을 갖고 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대제사장으로 세우신 증거를 위해서 저자는 시편 2:7에 호소한다.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천사들보다 탁월하심을 뒷받침하기 위해 인용한 구절이다. 저자가 시편 2:7에 호소하는 것은 약간 놀랍다. 이 본문은 예수님을 대제사장으로 말하는 것과 전혀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 본문은 그분의 왕권을 강조한다. 이 절은 예수님의 승천과 하나님의 우편에 만유의 주와 왕으로 앉히신 것을 말한다. 예수님께서 멜기세덱과 같은 왕적 대제사장이기 때문에 시편 2:7을 인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특별한 대제사장이다. 멜기세덱과 같은 왕으로도 섬기는 대제사장이다.

저자는 시편 2:7을 혈통이 아니라 임명의 선언으로 정확히 해석한다. 그는 이 본문을 인용하여 대제사장이신 아들이 보좌에 오르고 찬사를 받은 결정적인 요인이 하나님의 직접적인 증거임을 증거하였다. 그 인용은 왕권적인 능력과 권위를 갖는 아들의 서임을 언급한다. 시편 2편과 시편 110편은 예루살렘에서 행해진 왕의 제의들로부터 생겨난 본문들이다. 사무엘하 7장의 신탁을 보여주는 천명을 반복해서 선포하고 있다. 시편 2편에서 우리는 하나의 대관식 공식 어귀인 것으로 보여지는 선포가 들려지고 있음을 듣게 된다.

저자가 시편 2편을 인용했다는 것을 처음부터 주목해야 한다. 역사적 문맥에서 시편 기자는 세상의 통치자들에게 이스라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왕에게 복종하라고 경고한다. 세상의 통치자들은 하나님이 세우신 다윗 계열의 왕을 대적하여 괴롭혔다. 그러나 이 왕을 거기에 세우신 것은 야훼 자신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높이 올리심으로써 세계 만물의 상속자로 정하셨다. 물론 적들의 저항은 아직 완전히 소멸되지 않았다. 원수들은 그리스도가 상속자로 정해짐으로써 항복하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상속자 개념은 시편 구절들을 근거로 할 때 논쟁적인 의미로 이해될 수도 있다.

 

2. 아들 그리스도는 왕으로 섬기는 대제사장이다

저자는 다윗의 대를 이어 온 세계를 다스릴 분에 합당한 칭호로서 아들이라는 명칭을 강조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결코 천사들에게 아들이라는 호칭을 붙일 수 없었던 것이다. 오직 예수님만 유일하게 합당하다. 랍비들 사이에서 이 아들이라는 호칭은 아론, 다윗, 메시야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 또는 메시야 자신을 지칭하는 말로 다양하게 사용되었다. 그러나 저자는 이 시편 구절을 분명하게 메시야와 관련지어 해석하고 있다. 따라서 여기서 아들은 예수님의 위대한 존엄성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스라엘 왕들은 시편 2:7-8이 묘사하고 있는 온 우주의 통치를 경험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이 시편 본문은 그 의미를 메시야적 해석에 맡겨야 하는 이상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는 말이 다윗에게 적용될 때, 이 말은 그의 대관식 기념일을 가리킬 것이다. 저자가 생각하는 오늘은 언제인가. 오늘은 그리스도께서 하늘 보좌에 좌정하신 날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높인 것을 공고하신 날이다. 그리고 저자는 예수님을 자기 아들로 환호하여 맞이한 바로 그 하나님이 또한 그를 영원한 대제사장으로 환호하며 맞이했다고 말하고 있다. 아들을 낳았다는 것은 예수님이 승천하신 대제사장으로 메시야적 왕의 자리에 오르신 것을 가리킨다. 예수님은 죽음과 부활로 인해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기 때문이다. 이 말은 고대 동 지중해 신화에서 기대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육체적으로 왕이 태어난 것을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렇게 표현된 아버지와 아들 관계는 왕과 그리고 넌지시 그의 왕조에 대한 신의 후원, 지지 혹은 조력을 함축한다. 야훼는 아들을 낳으셨다’, 즉 그를 왕으로 세우시고 하나님을 대신해 세상을 다스리게 하셨다. 이 왕의 주권에 대적하는 모든 나라들은 파괴될 것이다. 피난처를 찾으려면 이 왕의 통치에 복종해야 한다.

다윗은 자신의 나라를 옛적의 거룩한 광야 및 신정 전승들과 결부시키고자 무척 애를 썼다. 다윗은 왕이 되자마자 예루살렘, 곧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쳤던 곳을 정복하였다(삼하 5:6-10). 다윗은 하나님의 발등상인 언약궤가 어디에 있는지를 수소문해서, 그것이 여전히 아비나답의 집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화려한 취주행렬과 더불어서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겼다. 나단 선지자는 이런 하나님의 궤를 위해 집을 건축하고자 하는 다윗의 소원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전달한다. 이 신탁 메시지는 왕조와 예루살렘의 창설자에게 전해진 것이다. 그의 아들에게 전해진 것이 아니었다. 이 신탁은 야훼께서 집을 필요로 하시기때문에 성전을 짓는 것이 아님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성전이 야훼의 집일 뿐 만 아니라 야훼께서 다윗을 위하여 세우실 왕조를 상징하는 것임을 암시한다.

하나님은 백향목으로 지은 집을 원하시지 않고 영원한 다윗의 집을 견고하게 세우겠다고 약속한다. 그가 죽은 후에 그의 아들과 계승자가 하나님의 집을 세울 것이다. 하나님이 다윗에게 하신 약속은 구약 예언에서 확장되었다.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를 시작하실 다윗 계열의 메시야적 왕을 기대하는 기초가 되었다. 다윗은 이스라엘 가운데서 야훼의 무제한적인 은혜에 대한 하나의 수단이요 운반자가 되어진다. 사무엘하 7:12-16은 이스라엘의 삶에 제한 없는 은혜로우심의 출발점이요, 메시야 사상에 대한 천명에 대한 출발점으로 간주되어진다.

다윗의 집은 사울의 집과 달리 영원히 세워질 것이다. 이 다윗의 아들은 이스라엘의 통치자’, ‘평강의 왕’, ‘만민의 인도자와 명령자’, ‘마땅히 얻을 자’, 그리고 이라고 말한다. 모세 계약이 이스라엘 역사의 영역을 강조한 반면, 다윗 계약은 이스라엘이 경배하는 하나님이 좁고 소유욕이 강하고 배타적인 의미에서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아니라, 천지를 지으신 창조주이시며, 모든 나라를 다스리는 왕이심을 선언함으로써 이스라엘의 거룩한 역사와 이스라엘의 계약 공동체의 한계들을 무너뜨렸다.

야훼께서 취소할 수 없는 왕조를 약속하시는 다윗과의 언약이 사무엘하 7장에 깊숙이 자리한다. 저자는 왕직과 관계된 본문을 예수님께 적용한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사람의 아들이 항상 다윗의 보좌에서 다스릴 것이라는 언약의 약속을 십자가에서 성취하신다. 아들 됨은 다시 통치와 다스림과 긴밀하게 연결된다. 하나님은 다윗의 후손 가운데 한 사람이 일어나 하나님의 이름을 위한 집을 지을 것이며 그 나라의 보좌는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 약속이다. 그가 다윗을 계승할 아들의 아버지가 될 것이며 이 아들은 그의 아들이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은 특별한 약속으로, 이 이 약속은 솔로몬 치세 시에 즉시로 성취되었다. 하지만 저자는 이 구절을 메시야에게 적용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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