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희 목사의 CDN 성경연구】 (162) 은혜의 보좌(Mercy seat)

 

NC. Cumberland University(Ph.D.), LA. Fuller Theological Seminary(D.Min.Cand.) , 총신대학교 일반대학원(Th.M.), 고려신학대학원(M.Div.), 고신대학교 신학과(B.A.), 고신대학교 외래교수(2004-2011년), 현)한국실천신학원 교수(4년제 대학기관), 현)총회신학교 서울캠퍼스 교수, 현)서울성서대학 교수 현) 평안의교회(서울서부노회) 담임목사
NC. Cumberland University(Ph.D.), LA. Fuller Theological Seminary(D.Min.Cand.) , 총신대학교 일반대학원(Th.M.), 고려신학대학원(M.Div.), 고신대학교 신학과(B.A.), 고신대학교 외래교수(2004-2011년), 현)한국실천신학원 교수(4년제 대학기관), 현)총회신학교 서울캠퍼스 교수, 현)서울성서대학 교수 현) 평안의교회(서울서부노회) 담임목사

히브리서는 하나님에게 다가가거나하나님 앞에 들어가는주제를 특별히 사용한다. 대제사장은 접근의 길을 여는 것에 특별한 역할을 하는 자다. 하나님은 그 아들의 고귀한 일을 통해 보좌 앞에 나아가는 길을 마련해 주셨다. 히브리서 저자는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의 사역이 완벽한 완성에 도달했다는 의미에서 완성된것임을 거듭 강조한다. 왕적 대제사장으로서 그리스도는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셨고, 새 피조물로서의 성전 경계를 자기 자신에게서 다른 사람들에게로 확장하셨다. 이전의 지성소는 하나님의 하늘의 보좌의 발판이었고, 대제사장만이 그 발판 앞에 나아갈 수 있었다. 대제사장의 한 가지 일은 우리를 하나님께 가까이 이끄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 자신의 희생적 피로 하늘나라로 올라가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심으로써, 인간의 죄를 위한 영원한 사함을 제공하였으며,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께 나아가도록 하는 영원한 출입권을 제공하셨다. 그러므로 그분의 대제사장직은 그가 많은 아들들을 영광에들어가도록 이끄는 수단을 제공하였다. 머레이(A. Murray)우리가 하늘 성소로 들어갈 담력을 얻었으니 가까이 나아가 들어가자는 한 줄로 히브리서 전체의 실제적 교훈을 요약하고 적용할 수 있다고 하였다. 신자들은 확신과 자신을 가지고 하나님께로 나아가야 한다. 그리스도의 피로 그들이 정결하게 씻겼기 때문이다. 어떤 수치도 죄책도 신자들이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는 것을 막을 수 없다.

 

1. 왕적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

히브리서에서 예수님의 왕적 대제사장직은 무엇보다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게 하신 분을 대변한다. 승천하신 예수님과 동일화된 신자들은 하늘 성소에 계시는 하나님의 임재 속에 들어가지만 아직 죄가 없는 상태에 있는 것은 아니다. 신자들은 유일하게 예수님을 통해서만 하늘 성소에 참여하고, 따라서 신적 임재 속에 들어간다. 왜냐하면 죄가 없는 사람만이 하늘의 성소에 들어갈 수 있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더라고 죽임을 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까이 나아가다란 단어는 구약시대의 대제사장에게 사용되었다. 칠십인역에서는 이 말을 종종 제사의식에서 대제사장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에 대해 사용한다. 예배자들은 성소의 외부 경계지점까지 근접할 수 있었다. 일반 제사장들은 제단까지 다가갈 수 있었다. 대제사장은 시은좌, 즉 은혜의 보좌에 다가갈 수 있었다. 그러나 히브리서는 그리스도가 앞장서서 지나갔기 때문에 청중이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갈수 있다고 말한다. 아브라함을 비롯한 다른 믿음의 위인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앞으로 나아갔다. 실제적인 의미에서 이것은 계속해서 영적으로 성숙하고, 굴복하도록 압력을 가하는 시련에 맞서고, 구별된 삶의 방식을 실천함으로써 서로 지원을 아끼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을 뜻한다. 저자의 말의 의미는 죄인은 긍휼과 자비를 위해 제사의식이 아니라 예수님께 의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아가다또는 이르다는 공동체 예배에 참여하는 일을 우회적으로 표현하는 말이다. 인간은 신앙고백과 기도, 세례와 성만찬을 통해 하나님을 향해 가까이 나아간다. 하나님 임재 앞에 이른다. 이처럼 가까이 가는 일또는 이르는 것은 제의적 사건이다.

 

죄인은 제사의식이 아니라

예수님을 의지해야 한다

 

히브리서 언어의 가장 주목할 특징은 원래 성막과 그 희생 제사를 가리키는 언어가 영적 차원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들에게 적용되는 방식이다. 우리는 왕이시며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수 있다.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은 하나님의 임재 앞에 우리가 나아갈 수 있는 동기가 된다. 거친 세상에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데 가장 큰 영감을 주는 이는 바로 왕적 대제사장이신 예수님 자신이다. 그는 대제사장으로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를 거역하는 일을 참으시고그리고 왕으로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시기 때문이다. 구원의 창시자이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임재 앞으로 나아가는 길을 열 뿐만 아니라, 왕같은 제사장으로서 그리스도인들이 그를 따를 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보여 주고 있다. 머레이(A. Murray)는 성소로 나아가는 담대함을 의식적인 느낌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바 예수님의 피가 보증하는 객관적 입국의 권리며 자유라고 말한다.

속죄일에 상징적이나마 화해의 역사가 끝나고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백성에게 내리는 것은 바로 지상의 속죄소 앞이었다. 하늘의 은혜의 보좌에 그리스도인들의 대제사장이 임재해 계시는 것은 화해의 역사가 상징적으로가 아니라 실제로 완성된 것을 말한다. 마지막 때는 온전히 새로운 시대를 시작하는 것이며, 이러한 새로운 시대를 향해 예수님은 창시자, 선구자, 그리고 목자로서 인도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그의 제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은 그가 행하신 일의 수혜자로서뿐만 아니라 그가 열어 놓은 길을 주의 깊게 그리고 목적의식을 가지고 따라야 하는 순례자로서 묘사되고 있다.

 

2. 대제사장 그리스도를 통해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간다

보좌’(qrovno")는 그리스도가 앉은 곳일 수도 있지만 하나님의 보좌일 가능성이 더 높다. 은혜의 보좌란 표현은 의심할 바 없이,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상징이 구름이 그 위에 머물러 있었던 지성소 내의 시은좌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은좌, 즉 속죄소는 실로 적절하게, 그룹들 사이에 거하셨던 하나님의 보좌로 표현될 수 있다. 머레이(A. Murray)는 하나님의 우편에 계신 대제사장 예수님을 아는 것은 참으로 독자들이 가진 치료제이며 하늘의 소명에 부응하는 삶의 환희와 힘을 회복시키는 요소라고 말한다. 은혜의 보좌는 하나님의 보좌다. 여기에 예수님이 자기 백성의 대제사장으로서 아버지의 우편에 앉아 계시는 것이다.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는 것은 하나님과 대제사장이신 예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다. ‘나아감은 대제사장이 지성소로 나아가는 구약성경의 배경에 의존하고 있다. 고대 세계의 유대인과 그리스도인들에게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이런 이미지는 특히 기도에 대한 상징으로 발전했다.

은혜의 보좌는 자비를 베푸는 왕의 보좌로 이해할 수 있다. 사람들은 공의, 논쟁, 민사, 보상과 관련된 청원을 가지고 왕의 보좌 앞에 나아갔다. 어떤 황제는 일부 사람들이 문제를 가지고 내게 왔다고 말하며 그들이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보좌는 왕권을 상징한다. 만약 그것이 주요한 특징이 은혜가 아니라면, 즉 그곳이 하나님의 풍부한 호의가 분배되는 장소가 아니라면 그것은 확실히 심판의 자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왕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은 이 보좌가 은혜의 좌소임을 보증하는 보증인이다. 회중은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경우에만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다. 그들은 듣고 믿는 가운데 가까이 나아간다. 고대 세계에의 문서에서 널리 사용되었던 이 표현은 예배 때 일어나는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과정을 의미한다.

 

자비를 베푸는 왕의 보좌인

시은소

예수님은 창시자, 선구자, 그리고 목자로서 인도하는 역할을 하면, 그를 따르는 자는 순례자로 묘사된다.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광야를 여행한 이스라엘 백성들과 비교하고 대조시킨다. 그들은 자신들이 찾던 목표를 얻지 못하였다. 다른 말로 하면, 안식을 얻지 못하였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러한 뛰어난 창시자, 선구자, 그리고 목자를 모시고 있기 때문에 책임감은 더 무거워졌다. 그래서 그를 따르려는 사람들은 광야 세대의 불순종과 죄를 반복하지 않아야 한다. 하나님이 약속한 안식에 들어가기 위해 믿음의 주를 바라보고 순례를 지속하도록 주의해야 한다. 때를 따라 돕는 은혜가 있다. 문자적으로 때를 맞춘 도움이다. 필요한 순간의 특별한 도움인 것이다. 유일한 조건은 그것을 기꺼이 받고자 하는 마음, 즉 그것이 필요하다고 여기는 생각이다. 대제사장인 그리스도가 성소에 들어간 결과로 다른 사람들은 그곳에 들어갈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니다. 그들도 그렇게 그곳에 들어가도록 요구한다. 독자들은 지상의 통치자가 앉은 보좌에 나아가지 않고 하늘의 보좌에 앉아 통치하시는 왕이시며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에게 나아가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만이 은혜의 참된 근원이시기 때문에 담대히 하나님에게 나아가야 한다. 이런 공급하심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필요를 때를 따라 도우신다는 것을 기대할 수 있다. 직역하면 이 어구는 적시에 있다는 뜻이다. 저자는 공동체가 직면한 박해의 시련을 염두해 두고 있다. 만약 그들이 신앙고백에 충실하고 예수님의 왕적 대제사장 사역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간다면, 하나님이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주신다는 것을 그들에게 확신시킨다.

구약의 장막 구조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열어 놓기보다는 사람들을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하도록 방해하였다. 장막은 이스라엘 가운데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상징하도록 건축되었다. 휘장은 지성소와 성소를 분리한다. 일 년 중 한 날에 국한된 대제사장의 제한된 지성소 출입은 하나님과 인간과 절대적으로 다르다는 점을 의미한다. 제사는 계속 반복되었다. 죄를 처리하는 데 무능하였다. 사실, 제사를 반복하는 것은 죄를 기억하게 할 뿐이었다. 구약의 제사장들은 백성들을 위할 뿐 아니라 자기 자신의 죄를 위해서 희생을 드려야 하는 죽을 인생들이기 때문에 부적합하였다. 옛 언약 하에서 하나님의 임재로 허락된 유일한 사람은 속죄일에 일 년에 한 번 지성소에 들어갔던 대제사장이었다. 하지만 백성들은 여전히 야훼의 임재로 나아갈 수 없었다. 하지만 예수님의 대제사장직 하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께 나아갈 새롭고 살 길을 발견한다. 그들은 때를 따라’, 즉 항상 하나님의 임재로 들어갈 수 있다. 머레이는 하늘 성소로 나가는 것을 예수님께서 하신 일의 열매이자 히브리서의 주요 교훈이며, 우리 신자들의 삶에서 하나의 필수 사항이라고 말한다.

 

제사를 반복하는 구약의 대제사장과

단 한번의 희생으로 완성하신

대제사장이신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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