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희 목사의 CDN 성경연구】 (159) 영문(Camp)

 

NC. Cumberland University(Ph.D.), LA. Fuller Theological Seminary(D.Min.Cand.) , 총신대학교 일반대학원(Th.M.), 고려신학대학원(M.Div.), 고신대학교 신학과(B.A.), 고신대학교 외래교수(2004-2011년), 현)한국실천신학원 교수(4년제 대학기관), 현)총회신학교 서울캠퍼스 교수, 현)서울성서대학 교수 현) 평안의교회(서울서부노회) 담임목사
NC. Cumberland University(Ph.D.), LA. Fuller Theological Seminary(D.Min.Cand.) , 총신대학교 일반대학원(Th.M.), 고려신학대학원(M.Div.), 고신대학교 신학과(B.A.), 고신대학교 외래교수(2004-2011년), 현)한국실천신학원 교수(4년제 대학기관), 현)총회신학교 서울캠퍼스 교수, 현)서울성서대학 교수 현) 평안의교회(서울서부노회) 담임목사

영문밖에 있는 인간과 동물은 하나님 보시기에 부정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속죄일의 희생제물을 먹을 수 없다는 금령도 그 제물의 특별한 거룩성과 특별한 속죄기능과 긴밀한 관계가 있다. 히브리서 저자는 예표(type)와 대형(antitype) 간의 유사점을 더 말한다. 속죄제로 드려진 짐승의 시체는 영문 밖에서 불태웠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 밖에서 십자가에 달리셨다. 그리스도가 영문 밖에서 자신을 제물로 드린 것은 백성의 불신에 대한 신적 심판을 나타냈다. 히브리서에서 영문 밖성문 밖’, 도성 밖을 의미한다. 영문(parembolhv)은 광야시대의 장막 진영을 연상시키는 전통적인 낱말이다.

옛 언약 아래에서는 속죄일에 성소에서 짐승의 피를 매년 갖고 들어가는 대제사장의 속죄, 짐승들의 몸은 영문 밖에 처분하는 조항은 성문 밖에서 죽음을 경험하셨던 예수님에게 적용된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문 밖에서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셨다. 그렇기 때문에 독자들은 장차 올 도성을 기다리며 그리스도의 제자들로서 기꺼이 영문 밖으로 나아가고, 그분의 수치를 담당하는 가운데 예수님을 따르고 본받아야 한다.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님께서 자신의 의로운 통치를 주장하시기 위해 다윗의 성에 입성하셨을 때, 약속된 다윗의 보좌는 그 성 밖에서 일어났던 십자가로 판명되었다.

 

1. 그리스도는 영문 밖에서 고난을 당하시다

예수님은 마지막 때에 바치는 화목제물로서, 구약성경의 제사를 성취하고 능가하는 제물로서 영문 밖에서고난을 당했다. 영문 밖이라는 표현이 진영 밖에서라는 구약성경의 표현과 암묵리에 동일시되고 있다. 희생제물의 몸체가 영문밖에서 불태워졌다는 것과 예수님이 예루살렘의 성문 밖에서 고난을 당했다는 사실은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는다. 어느 정도 사고의 조정이 필요하다. 그 요점은 피의 흘림과 몸의 고통이 십자가상의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그리스도교 이해의 일부를 이룬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고 예루살렘 성벽 밖에 묻혔다는 진술은 복음서의 기술과 일치한다. 시체는 성문 밖에 묻어야 한다는 유대교의 규정과도 맞는다. 또한 로마의 관습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십자가 처형을 성문 밖에서시행하도록 규정했다.

골고다에서 예수님의 죽음은 영문 밖에서 시체들의 처분에 상응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피로 자기 백성들을 거룩하게 한 것으로 표현되는 구속의 역사는 희생의 피를 지성소로 가져온 것에 상응한다. 구약성경에 따르면 죄인은 진 밖에서 사형에 처해진다. 그런데 이 구절에는 진정한 대제사장이 죄 지은 백성을 거룩하게만들기 위해 영문 밖에서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성문 밖 골고다를 암시하는 문맥에서 제자도에 대한 요청은 십자가로의 길로 예수님을 따를 것을 함축한다. 저자는 예수님께로 나아가는 것을 그의 십자가를 지는 것과 연관짓는 초기 전승에 철저히 익숙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성문 밖에서 예수님의 고난과 영문 밖에서 태워진 짐승의 제물 사이에는 유사성과 차이점이 있다. 속죄일에 제물로 드려진 짐승들이 영문 밖에서 불태워졌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문 밖에서 고난을 당하셨다. 영문 밖에서 짐승을 불태웠다는 레위기 16:27의 암시는 예수님이 성문 밖에서십자가 죽음을 당하신 사실의 의미를 분명히 하고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그를 따르라는 훈계의 근거를 제공해준다. 동물의 고기를 소각시키는 것은 본래 속죄행위의 일부가 아니다. 부정한 것을 제거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 예수님은 영문 밖에서고난을 당했다. 여기서 저자는 예수님의 죽음을 언급할 때마다 고난당하다동사와 그 파생어를 사용한다. 결과적으로 히브리서에서 고난당하다동사는 죽다라는 의미를 갖는다. 희생동물들은 사람들이 그 피를 흘려 속죄에 사용하는 성전에서 죽었다. 이에 반해 예수님은 영문 밖에서 죽었다.

속죄일에 이스라엘 진영 밖에서 동물의 제물을 태우는 제사와 예루살렘 성벽 밖에서 죄에 대한 예수님의 새언약 희생 사이에 유사를 저자가 끌어낸다. 하지만 저자는 이점을 추구하지는 않는다. 대신에 성문 밖에서당한 예수님의 고난과 독자들이 당한 고난 사이에 평행점을 찾는다. 저자는 아마도 예수님께서 겪으신 것과 독자들이 겪은 것 사이를 연결하기 위해 고난당하다라는 말을 사용했을 수도 있다. 독자들은 자신들이 믿음 때문에 죽은 것은 아니지만, 그들 역시 실제로 고난 가운데 있었기 때문이다. 땅의 도성 또는 도시는 부와 명예를 위한 기회를 제공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고 갈대아 우르를 떠났고,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당하기 위해 궁정 생활을 포기했다. 그리스도인들 역시 이와 동일하게 행동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2. 그리스도인들은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리스도에게 나가야 한다

예수님의 고난에 대한 역사적 진술 다음에 독자들로 영문 밖으로 예수님께 나아가서 그의 치욕을 짊어져야 한다는 생활률적 요구가 이어진다. 예수님께서 영문 밖에서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에 그러므로 신자들 역시 치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리스도에게 나아가야 한다. 구약성경에서 영문 밖에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특별히 자기 백성들과 거하신 곳으로부터 배제되었다는 말이고, 따라서 부정한 것은 진 가운데 머물 수 없음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에게 나아감은 장소가 아니라 사회적 실제로 정의된다. 그리스도를 위해 치욕을 당하는 곳이라면 그곳이 어디든 영문 밖이다.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을 다른 이들이 수용하지 못하도록 비방했다.

능욕(ojneidismov")이란 표현은 비난, 학대 그리고 수치의 뉘앙스를 전달한다. 우리는 예수님이 십자가의 수치를 견뎌내며 그가 치욕을 견디었던골고다에 자리로 나아가야 한다. 마치 모세가 당시에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던 것과 같은 이치이다. 브루스(Bruce)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를 결론의 절정으로 간주한다. 이 권면은 독자들에게 자신들과 그리스도를 완전히 동일시하고 직접적으로 권고하는 최후의 호소이다. 그리스도를 따르는데 있어서 가장 좋은 자리는 능욕과 치욕이 동시에 내재해 있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옆이다. 이것이 히브리서의 전체에 걸쳐 나타나는 가장 열렬한 소망이다. 히브리서에 따르면 사람들이 치욕을 짊어지는 것은 자신을 그 치욕에 내어 주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향해 하나님께 찬송을 드림으로써 일어난다.

하나님의 백성은 자기 자신의 거룩함을 보전하기 위하여 이 더럽혀진 도성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하나님의 백성은 낯선 곳으로, 영문 밖의 더러운 장소로 나아가야 한다. 왜냐하면 바로 이처럼 더러운 장소에 하나님이 제정한 종말론적 정결이 실제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런 종류의 탈출은 오랫동안 용훼되어 왔던 잘못된 거룩함에 대한 가장 날카로운 선전포고이다. 영문 밖으로 나간다는 것은 유대 그리스도인인 독자들이라면 유대인 공동체를 등지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유대교의 하나님을 전심으로 따르려는 이들에게는 유대인 공동체의 인정을 받는 것은 소중한 일이었다.

그리스도는 지성소로 들어갔다. 그러나 성소 안으로의 이동과 영문 밖으로의 이동이 함께 묶을 때만 그리스도인의 삶의 역설이 포착된다. 히브리서가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은 이스라엘의 장막시대와 하나님 백성의 종말론적 상응 관계다. 세상에 대한 거부는 세상으로부터의 도피나 영혼들의 비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되고, 권리나 소유를 포기하고 고난의 길을 걷도록 준비하는 것으로 생각되어야 한다(10:32-34). 예수님은 성문 밖에서 고난을 당하심으로써 자신을 거룩하지 못한 세상과 동일시하셨다. 저자의 최후 호소의 결정적인 성격은 나아가자는 현재 중간태 의지적 가정법에서 명백하게 드러난다. ‘우리는 그에게 나가기를 계속하자는 의미이다. 이 행동은 단호한 결별과 관련된 행동이다. 영문 밖으로 나아가자고 할 때 더 강화된다. ‘나아가자라는 어구는 매우 엄숙한 표현이다. 도피와 구별되는 표현이다(24:16). 나아감 곧 탈출은 파국을 모면하려는 도피가 아니라 권리와 소유에 대한 자발적인 포기이다. 저자는 독자들에게 영문 밖으로 예수님께 나아가라고 촉구한다. 그들의 안전과 안정감은 옛 언약의 제사들에서 찾으면 안 된다. 자신들의 죄 사함을 이런 제사들에서 찾지 말아야 한다.

과거의 편안한 도시 현장을 떠나 흔들리지 않는 나라로 가는 그런 순례 여정을 아브라함과 모세의 후손으로서 이들의 영적 유업에 맞게 살아가는 것이 될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을 향해 나아간다는 표현은 이집트에서 나오거나 아브라함이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가는 행위를 연상시킨다. 이런 종류의 나아감은 하나님의 역사에서 끊임없이 되풀이하여 나타났다. 그러나 이제 이러한 일은 급진적인, 종말론적인 의미에서 일어나고 있다. 사람들은 단순히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향해 나가는 것이다. 더 이상 그리스도에게 물리적으로 접근할 수 없기 때문에 그에게 나아가는 것은 본질적으로 믿음의 움직임이다.

히브리서 저자는 독자들에게 예수님에게 나아가자고 촉구한다. 그들의 안전과 안정감을 옛 언약의 제사들에서 찾으면 안 된다. 자신들의 죄 사함을 이런 제사들에서 찾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예수님의 치욕을 짊어지고 예수님의 제자들로 드러나야 한다. 영문을 떠나고 예수님과 온전히 하나가 되라는 권면은 제자도의 특색 있는 이해를 돕는다. 성문 밖으로 나간 예수님의 행위는 따르는 사람들의 선례를 설정한다. 공동체의 임무는 거룩한 영내의 안전함, 편리함, 체면을 뒤로 하고 예수님께 임했던 비난을 받을 것을 감수하면서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동질성은 지금 예수님께로 나아가는문제다. 고난에도 불구하고 그를 단호히 따르는 것은 값진 헌신과 관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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